[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장석주 시인의 인문학 산책] (14) 통섭(consilience)

푸레택 2022. 9. 6. 21:02

[장석주 시인의 인문학 산책]〈14〉 통섭(consilience) (daum.net)

 

[장석주 시인의 인문학 산책]〈14〉 통섭(consilience)

"잘게 쪼개진 지식간의 벽 허물어 통합" 지식계의 새 흐름초끈이론(superstring theory)이나 양자 역학을 모르는 인문학자는 요즘의 지식사회에서는 거의 퇴물 취급을 당한다. 자연과학과 인문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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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게 쪼개진 지식간의 벽 허물어 통합" 지식계의 새 흐름

초끈이론(superstring theory)이나 양자 역학을 모르는 인문학자는 요즘의 지식사회에서는 거의 퇴물 취급을 당한다. 자연과학과 인문학은 상호 삼투하면서 지식의 융합을 일궈낸다. 이질성으로 딴길을 가는 것으로 보이는 지식이 실은 하나로 통합될 수 있다는 것인데, 이런 논의가 활발해지는 가운데 주목받은 어휘가 '통섭(consilience)'이다. 통섭은 잘게 쪼개진 지식 간의 벽을 허물자는 지식계에 불어닥친 새 흐름의 지표어다. 자연과학·사회과학·인문학·예술들 사이에는 벽이 있고, 그 벽과 벽 사이에는 얼음이 끼어 있다. 그 얼음을 녹여 벽을 허물자는 얘기다. 얼음 녹이기(ice melting)는 소통이 그 핵심이다. 그 최종적인 효과는 지식과 지식의 경계를 넘나듦이고 여럿을 녹여서 하나 됨이다. '통섭' 세계관의 핵심은 "모든 현상들―예컨대, 별의 탄생에서 사회 조직의 작동에 이르기까지―이 비록 길게 비비 꼬인 연쇄이기는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물리 법칙들로 환원될 수 있다는 생각"(에드워드 윌슨, '통섭')이다.

윌슨은 경계를 허물고 큰 틀에서 하나의 전체를 이루고 서로 넘나들 수 있도록 하자고 주장한다. 예를 들면 생화학, 세포학, 유전학, 생리학, 생태학 등 수평적으로 세분화되어 있는 생물학을 통합생물학으로 합쳐서 생명의 다양성을 포괄적으로 연구·이해하자는 시도다. 이런 혁신적 사고에 이론적인 기초를 깔아준 사람이 에드워드 윌슨이다.

윌슨은 생물학과 사회과학, 인문학, 더 나아가 종교까지 지식의 범주에 넣어 이 모든 지식의 대통합을 제안한다. "통섭은 봉합선이 없는 인과관계의 망이다"라는 생각의 바탕 위에서는 생물학, 철학, 윤리학, 경제학, 사회학, 심지어 예술, 종교에 이르기까지 통섭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윌슨은 사회과학을 드러내놓고 때린다. 사회과학은 '과학'으로서 갖춰야 할 기본과 본질에서 비켜서 있기 때문에 자연과학에 견줄 때 열등하다. 사회과학은 "사회에서 마음과 뇌로 이어지는 여러 수준을 관통하는 인과적 설명"을 하는 데 실패하고, 과학 '이론'의 본질을 결여하고 있어서 '과학'의 자리에서 폐위될 위기이고, 자연과학과의 경쟁에서는 뒤처졌다는 것이다. 냉전체제의 무너짐은 곧 '마르크스-레닌주의의 파산선고'다. 그로써 사회과학이 그동안 공산주의에 그릇된 환상을 품어왔고, 인종주의의 적개심이 불러올 엄청난 비극은 예측하지 못했음이 까발려졌다. 이는 사회과학의 한계를 드러낸 사건이다.

과연 사회과학은 학문적 실효성을 탕진한 뒤에 생물학과 인문학에 흡수되고 말 것인가? 윌슨은 사회과학에 깊은 영향을 끼친 데리다나 푸코와 같은 후기구조주의 철학을 지적 사기와 같은 "현란한 몽매주의적 진술들"이라고 몰아치며 "골동품 창고"로 보내야 한다고 말한다. 나중에 이들 후기구조주의자들에게 약간의 경의를 표하는데, 그 이유는 이들이 "열광적 낭만주의의 현대적인 집전자로서 문화를 비옥하게" 만든 공로 때문이란다.

윌슨은 예술이 인간의 본성에서 솟구쳐 나오는 바탕이라고 관용적인 태도를 취하기도 한다. "예술은 일상적 존재의 외양적 혼돈 상태로부터 질서와 의미를 이끌어내기도 하지만, 동시에 신비한 것을 향한 우리의 갈망에 자양분을 준다"(윌슨, 앞의 책)는 게 그의 생각이다.

윌슨의 논리를 따라가자면, 객관적 진리의 표준은 "논리적이고 의미론적인 분석"에서가 아니라 "마음 자체의 물리적 토대를 지속적으로 탐구함"으로써만 얻어질 수 있다. 사회과학이나 철학의 실패는 "아무도 내부의 정신적 세계 속에서 인과과정의 미궁을 거쳐 외부세계의 물질적 현상을 추적하지 못했으며, 그리하여 아무도 의식활동의 내적 물질적 현상과 외적 물질적 현상을 짝짓는 정밀한 지도를 그리지 못했다"(윌슨, 앞의 책)는 점에 있다. 그 결과로 사람의 마음과 본성, 문화와 사회 변동에 대해 설명하는 사회과학의 이론들은 폐위되고, 그 자리를 진화생물학이나 인지뇌과학, 인간행동유전학, 환경과학이 차지할 것이라는 게 윌슨의 예견이다. 이를테면 인간행동유전학은 쌍둥이 연구나 가족 계보 분석, 유전자 지도 그리기, DNA 서열 분석 따위를 통해 "유전자에서 문화로 이행하는 데 중요한 중간고리"를 담당한다.

윌슨은 마음·윤리·종교·예술 따위가 "내부의 정신적 세계 속에서 인과과정의 미궁을 거쳐 '어떻게' 외부세계의 물질적 현상"으로 나타나는지, 물리적 과정의 기술로 환원함으로써 인간 본성을 만드는 유전적 기초에 더해 사회적 행동의 후성 규칙들(epigenetic rules)을 밝혀내고자 한다. 유전 형질과 후천적인 학습으로 얻는 문화는 밀접하게 짝지어 있고 이는 공진화의 추진력이 되기도 한다. 사람이 후천적으로 습득하는 문화조차도 그 내부에서 사람의 유전적 형질이라는 속박에서 움직인다는 것이다.

한편으로 윌슨의 주장은 환원주의적이라는 비판에 마주서고 있다. 사람이 기계와 같이 부품으로 낱낱이 해체되었다가 다시 합체될 수 없는 것은 생명현상의 복잡함 때문이다. 윌슨의 비판자 중 한 사람인 웬델 베리는 "생명은 우리가 향유하는 것이지만 우리 너머에 있다. 어떻게 해서, 왜 우리가 생명을 누리게 되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생명에, 그리고 우리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것은 예측할 수 없다. 우리는 생명을 파괴할 수는 있지만 만들 수는 없다. 생명은 통제될 수 없다. 생명에 대한 통제는 환원주의와 함께 엄청난 파괴의 위험성을 내포한다"(웬델 베리, '삶은 기적이다')라고 쓴다.

과학·산업·기술은 유전자에서 문화까지 더 많은 것들을 밝혀내고, 밝혀낸 지식의 바탕 위에서 늘 인류에게 '발전'을 약속하고 '개발'을 공약하며 '진보'라는 장밋빛 미래를 제시한다. 그러나 앎의 영역이 커지고 과학과 기술이 발달하며, 무지몽매한 이성에 계몽의 빛을 더 환하게 비출수록 더 많은 숲과 생물들이 사라지고, 물과 토양은 오염되고, 오래된 공동체는 깨지고, 인류는 그 어느 때보다도 인간성과 생태계의 파괴라는 위기에 직면한다.

반면에 시인들은 있는 그대로의 세계 속에서 "알 수 없음"의 신비를 인식을 고양하는 매개로 삼는다. 블레이크는 "한 알의 모래에서 세계를 보고/ 한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본다"고 했다. 윌슨은 생명과 세계를 기계적이고 예측가능한 것의 영역으로 환원시킨다. 베리는 그 점을 이렇게 경고한다. "삶을 기계적이고 예측 가능한 것으로, 또 알 수 있는 것으로 다루는 것은 결국 삶을 축소하고 환원시키는 일이다."(웬델 베리, 앞의 책) 베리는 윌슨의 '통섭'이 본디 하나인 생명을 환원주의라는 칼로 분리하고 쪼갠 뒤에 이미 죽은 것을 하나로 합쳐 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베리는 통제할 수 없는 것을 통제하고 예측할 수 없는 것을 예측하려는 과학의 근본을 따지며, 그것을 매개로 하는 문명의 야만성과 착취적 성격을 드러낸다. 윌슨의 주장이 근본적인 편견과 가설들에 기초한 것으로, 과학과 기술에 대한 지적 오만으로 이끈다는 것이다. 그것은 현대과학의 물질주의와 환원주의의 위험성을, 기계론적 사고의 병폐를, 현대과학의 뒤에서 그것을 추동하는 산업주의와 제국주의 이데올로기가 가져올 수 있는 재앙에 대한 경고로 이어진다.

윌슨은 인류가 합법칙적 물질세계에 살며, 이 세계를 움직이는 모든 법칙들은 과학적으로 증명될 수 있는 영역에 속하고, 별들의 탄생과 같은 자연과학에서 사회제도의 운용을 다루는 사회학의 영역에 이르기까지 모든 현상들은 물리적 법칙으로 환원될 수 있고, 따라서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은 없다고 설명한다.

과학은 문명의 진보를 가져오기도 했지만 인간의 악과 야만성을 끔찍할 정도로 키우는 데 제 능력을 보태기도 했다. 과학의 권능이 무책임하고 탐욕스러운 사람들 손에 쥐어질 때 인류는 그 어느 때보다도 심각한 위기에 직면할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초토화한 원폭 투하나 나치의 우생학 실험 따위는 과학이 인류공동체에 얼마나 끔찍한 죄악의 도구로 오용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예다.

윌슨은 계몽주의 사상가들과 마찬가지로 인간 진보의 잠재력에 대한 믿음이 지나쳐서 문명의 톱니바퀴가 아무 고장 없이 항상 앞으로만 나아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놓친다. 이 톱니바퀴는 뒤로 갈 수도 있다. 과학자들은 필요에 따라 어떤 부분들을 감추고 속인다. 그런 예들이 수없이 많은 만큼 과학자들이 항상 진리만을 말하고, 과학이 인류의 문제들을 해결해 줄 것이라고 믿는 것은 순진하다. 윌슨의 논리를 조목조목 따지면서 현대과학이 조작한 환상들을 파헤칠 때 그 순진함은 어리석음과 다르지 않다는 게 밝혀진다.

과학·산업·기술이 삶의 의미있는 준거점이 될 수 없다면 "기계와 기계적 관념이 피조물의 삶의 조건과 상황을 결정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그것은 우리가 "알 수 없음", 혹은 "우주의 낯섦" 속에서 나날이 겪는 삶의 신비를 전면부정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윌슨이 주창하는 통섭에 귀를 기울이면서도 한편으로 그것을 꼬치꼬치 따지고 의심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글=장석주 시인ㅣ세계일보 2010.10.13

함께 읽으면 좋은 책들

● 에드워드 윌슨, '통섭', 최재천·장대익 옮김, 사이언스북스, 2005
● 웬델 베리, '삶은 기적이다', 박경미 옮김, 녹색평론사, 2006
● 최재천·주일우 엮음, '지식의 통섭', 이음, 2007
● 이인식, '지식의 대융합', 고즈윈, 2008

/ 2022.09.06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