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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주 시인의 인문학 산책] (12) 타자(others)

푸레택 2022. 9. 6. 19:03

[장석주 시인의 인문학 산책] <12> 타자(others) (daum.net)

 

[장석주 시인의 인문학 산책] <12> 타자(others)

낯선 이 '타자'를 거부하는 것은 근본 악이다2001년 9월11일 뉴욕에서 일어난 '테러'는 세계를 두 개로 나눈다. 시간의 측면에서:테러 이전과 이후, 범죄학의 측면에서:테러리스트와 희생자,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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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이 '타자'를 거부하는 것은 근본 악이다

2001년 9월11일 뉴욕에서 일어난 '테러'는 세계를 두 개로 나눈다. 시간의 측면에서:테러 이전과 이후, 범죄학의 측면에서:테러리스트와 희생자, 문화인류학의 측면에서:문명인과 야만인, 종교적인 측면에서:기독교도와 무슬림, 그리고 철학의 측면에서:나와 타자로. 그 사이에서 진부한 악들이 무성하게 자라난다. 악이 진부한 것은 그 안에 '본질'이 결핍되어 있기 때문이다. "악이란 선(Good)의 결핍이 아니라 본질의 결핍이다"(데리다). '테러'의 표적이 된 뉴욕 국제무역센터 쌍둥이빌딩은 보드리야르에 따르면 "자본의 포스트모던적 조건을 축약"해서 보여주는 대상이다. 그것은 "다른 빌딩들이 제각기 영원한 위기와 자기 도전 안에서 끊임없이 스스로를 초월하는 (모더니스트) 체계의 원본적인 계기라면, 세계무역센터의 두 개의 타워는 복제의 현기증 안에서 이전까지의 체계가 종식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시각적인 증표"(리처드커니, '이방인, 신, 괴물'에서 재인용)라는 것이다.

◇9.11테러 이후 세계는 나와 '타자'를 구분하는데 몰두하고 있다. 그러나 나와 우리에게 낯선 타자가 물리쳐야 할 괴물이자 에이리언이 되는 순간 살인, 폭력. 인종 청소, 전쟁과 같은 불행은 심화하기 마련이다.세계일보 자료사진

보드리야르는 그것의 붕괴가 테러리스트들의 서구 자본주의 세계에 대한 공격을 넘어서서 "서구의 전 지구적 자본 자체의 자살행위"의 상징이라고 비약한다.

이것은 제국에 대한 피식민지의, 혹은 다수자에 대한 소수자의 치명적인 자기 존재증명일까? 분명해진 것은 무고한 사람들을 희생시킨 이 잔인하고 끔찍한 폭력은 전 지구적 자본주의가 항상 붕괴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기독교도들'과 '무슬림'으로 갈라진 세계는 이 갈라짐으로 말미암아 언젠가 종말로 치달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와 불안이다. "내파된 타워의 이미지는, 너무나 전능하고 어디에나 존재하기 때문에 테러리스트가 제국의 심장을 겨냥하여 마치 바이러스처럼 나라 내부에서 공격을 감행할 수밖에 없었던 미 제국의 자기 붕괴를 보여준다."(리처드커니, 앞의 책) 그리하여 9·11의 '테러'는 "모든 사건들의 어머니"가 되었다. 마주보고 서서 서로의 이미지를 복제하던 이 빌딩의 붕괴는 세계를 미국과 그들, 안과 밖으로 나눈다. 미국은 '테러' 이후 자국에 들어오는 외부인을 타자라는 바이러스로, 잠재적인 테러리스트로 규정한다. 미국의 입국 심사가 강화된 것은 그 때문이다.

'나'와 다른 타자란 누구인가? 9·11 테러 이후 이 물음은 갑자기 떠오른 '역사의 종말'이라는 징후 속에서, 혹은 혼동과 무질서 속에서 중요한 무게를 갖게 되었다. 타자는 저편에서 이편으로 온다. 타자의 나타남은 우연적이고 이 우연성은 '나'의 실존이 경험하는 원초적인 사건이다.

피해자와 학살자는 우연적으로 테러가 일어난 그 시각에 바로 그 '장소'에 있었기 때문에 극적으로 운명이 갈렸을 뿐이지, 두 집단 사람들은 존재론적 성분에서 다르지 않다. 그들은 하나의 심장과 두 개의 허파, 206개의 뼈, 그리고 그것들을 감싼 얇은 피부로 이루어진 존재다. 사르트르가 말한 바 "나는 상처받을 수 있는 자라는 것, 나는 상처입을 수 있는 육체를 가졌다는 것, 나는 어떤 장소를 차지하고 있으며, 나는 내가 무방비 상태인 그 장소에서 어떤 경우라도 도망칠 수 없다는 것, 즉 나는 '타자에게' 보여지고 있다는 것이다."(사르트르, '존재와 무') 그들은 '상처받을 수 있는 자들'이다. 그런데 한쪽은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고, 한쪽은 가해자가 되었다. 가해자가 된 타자들은 낯선 자다. 낯선 것은 나쁘고 위험하다. 그러니까 정체를 알 수 없는 타자는 잠재적으로 괴물이고 에이리언이다. 미디어들은 자주 타자를 적으로, 이방인을 희생양으로, 반대하는 자를 악마로 상징조작을 한다. 대부분의 국가들은 타자라는 외계 바이러스로부터 자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방어막을 친다. 저 미국의 입국심사대에서 외국인 여행자에게 보이는 까다로움을 떠올려보라! 그 까다로움은 모든 외국인 여행자를 불법을 저지를 잠재성을 가진 적으로 규정하는 태도에서 비롯한다.

'님'에 대한 존재론적 탐구를 평생 시의 과업으로 삼았던 만해 한용운은 "나는 곧 당신이어요."(한용운, '당신이 아니더면')라고 쓰고, 시인 랭보도 "나는 타자다"라고 쓴 바 있다. 스피노자는 "자기 자신 안에 존재하며 자신을 통해 파악되는 것"을 나의 실체라고 이해했는데, 근대 독일의 관념철학은 이걸 주체로 바꾼다. 나는 항상적으로 나 자신인 바, 신체를 가진 또 다른 존재로 환원할 수 없는 존재다. 홀로 나일 수 없고, 타자와 맺는 관계의 맥락 속에서 나로 태어난다. 나와 대척적인 자리에 있는 너는 타자의 자리에 놓인 나다. 나와 너는 존재의 위상학에서 동일 지점에 있지 않다. 나와 너는 분리되어 있고, 다른 장소에 떨어져 있다. 나는 너의 부재 속에서 비로소 태어난다. 나는 너에게로 향함으로써 이타적 실존을 산다. 그래서 "당신과 나의 거리가 멀면 사랑의 양이 많고, 거리가 가까우면 사랑의 양이 적을 것입니다."(한용운, '사랑의 측량')라는 시구가 나온다. 사랑은 나의 자기됨과 내 존재의 확장을 포기함으로써, 나를 너에게 줌으로써 살아지는 이타적 실존이다. 너와의 사랑에 빠진 나는 자발적으로 너에게 갇힌 자요, 너에게 볼모됨을 기쁨으로 삼는 자다. 사랑에 빠진 나는 호르몬의 힘을 빌려 너를 향한 열정으로 타오른다. 이타성은 "존재 안에서는 결손이고 시듦이며 어리석음이지만 존재를 넘어서는 탁월이며 높음"(레비나스)이다. 나는 너를 환대할 뿐만 아니라 너에 대해 무한책임을 지는 까닭에 레비나스는 "나의 자발성을 타인의 현존으로 문제삼는 일을 우리는 윤리라 부른다"라고 쓴다. 그런 점에서 타자는 나에게 법이며 명령이고, 윤리의 계시적 시작점이다.

레비나스의 중요 저작들의 번역본이 나와 있지만, 그의 철학은 대부분의 독자에게는 생소할 것임에 틀림없다. 레비나스는 1906년 1월12일 리투아니아의 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고 1995년 12월25일 새벽에 프랑스 파리에서 숨을 거두었다. 스트라스부르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한 레비나스는 후설과 하이데거의 현상학에 정통한 현상학자였다. 레비나스는 반유대주의에서 비롯된 폭력과 인종주의가 널리 퍼진 서유럽에서 학대받는 유대인으로 산 경험과, 경험을 넘어서서 타자 및 그 타자에 대한 책임을 보여주는 현상학의 맥락에서 자아와 타자 문제를 중심 주제로 삼는 사유를 발전시켰다.

강영안은 '타인의 얼굴'에서 레비나스의 나와 자기성, 타자와 고통을 통한 주체와 윤리학, 신과 종교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친절하게 안내한다. 이를테면 "타인의 얼굴은 나의 자발적인 존재 확립과 무한한 자기 보존의 욕구에 도덕적 한계를 설정한다. 타인은 거주와 노동을 통해 이 세계에서 나와 내 가족의 안전을 추구하는 나의 이기심을 꾸짖고 윤리적 존재로서, 타인을 영접하고 환대하는 윤리적 주체로서 내 자신을 세우도록 요구한다"와 같은 구절은 매우 압축적으로 레비나스 철학의 핵심을 드러낸다. 도스토옙스키는 "우리들 각자는 각 사람에 대해서 각 사람에 앞서 잘못이 있고 나는 다른 사람보다 잘못이 더 많다"고 썼다. 주체성이란 타자와의 윤리적인 관계를 통해서 정립되는 그 무엇이다. 나는 타자를 위한 존재, 타자의 필요에 대해 적극적으로 책임지는 존재다. 레비나스는 도스토옙스키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우리는 모든 사람에 앞서, 모든 사람에게 책임이 있고 나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책임이 더 많다". 레비나스가 주체의 철학이라는 토대 위에 세운 타자의 윤리학은 나를 "타인의 고통을 짊어진, 고통받는 의인", 즉 대속자 그리스도에까지 밀고 간다.

다시 한번 타자란 누구인가? 타자는 낯선 이다. 그 낯섦은 차라리 타자의 본질이다. 타자는 언제나 내 앞에, 지금 알 수 없으며, 앞으로도 알 수 없는, "내가 완전히 파악할 수 없는 무한성"으로 서 있다. 사르트르가 "타자는 지옥이다"라고 했듯이, 그것은 끔찍하다. 타자는 "나에 대해서 완전한 초월과 외재성"을 갖는다. 타자는 내 앞에서 감추어진 그 무엇인데, 그것을 찾는 몸짓이 에로스다. 애무는 에로스의 동작태(動作態)다. 애무는 손에 잡히지 않고 계속 미끄러지는 것을 만지는 행위다. 감추어진 것이란 무엇인가? 아이가 출산함으로써 그 실체가 드러난다. 아이는 "타자가 된 나"다. 아이의 출산으로 나는 나에게로의 영원한 회귀운동에서 벗어나고, 타자와 타자의 미래 속에서 자신의 한계를 넘어선다. 타자란 모두 잠재적 적이기 때문에 타자를 적대하고 죽이는 일은 정당하다. 결국은 전쟁, 폭력, 인종청소와 같은 20세기의 비극은 나를 앞세우고 나의 존재 유지를 최고의 가치로 내세운 데서 나온 것이다. 타자를 거부하고 배제하는 것은 근본 악이다. 그토록 방대한 체계와 정교한 논리 속에서 자란 서양철학이 으뜸으로 내세운 이성은 히틀러와 국가사회주의의 등장이라는 근본 악이 출현하는 걸 막지 못했다. 세 형제의 맏이로 태어나 두 동생이 나치에 의해 희생되는 아픔을 겪은 레비나스가 서양철학을 비판하면서 타자에 대해 다르게 사유함을 하나의 체계로 완성해낸 것은 이 근본 악을 넘어서기 위함이다. 레비나스는 타자를 받아들이고 환대하며 타자에게 선을 행함으로써만 이 근본 악을 넘어설 수 있다고 믿는다.

글=강석주 시인ㅣ세계일보 2010.09.13

함께 읽으면 좋은 책들

● 사르트르, '존재와 무', 손우성 옮김, 삼성출판사, 1990

● 강영안, '타인의 얼굴―레비나스의 철학', 문학과지성사, 2005
● 서동욱, '차이와 타자', 문학과지성사, 2000
● 리처드 커니, '이방인, 신, 괴물', 이지영 옮김, 개마고원, 2004

/ 2022.09.06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