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꽃산책] 가을이 오는 길목에서
/ 2022.09.03(토) 서울식물원에서 촬영
■ 가을의 기도 / 김현승(1913~1975)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 같이
■ 가을단상 / 이제민
고추 말리는 아낙네의 손
가을걷이하는 농부의 얼굴
가을 햇살은 따사롭기만 하다
긴긴 기다림으로
간절함으로
한 해의 풍요를 기도하던 일
탐스러운 열매가 주렁주렁
가을은 무르익어 가고
이른 새벽부터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
가을은 깊어만 가고
하늘 높이 나는 고추잠자리
가을은 높아만 가네
가을 그림자
길게 늘어지면
한 해의 내 그림자도
편히 쉬겠지
■ 가을 바람 / 강소천(1915~1963)
아람도 안 벌은 밤을 따려고
밤나무 가지를 흔들다 못해
바람은 마을로 내려왔지요
싸릿가지 끝에 앉은 아기 잠자릴
못 견디게 놀려주다 그도 싫어서
가을바람은 앞벌로 내달렸지요
고개 숙인 벼 이삭을 마구 디디고
언덕배기 조밭으로 올라가다가
낮잠 자는 허수아빌 만났습니다
새 모는 아이 눈을 피해 가면서
조이삭 막 까먹는 참새떼 보고
바람은 그만그만 성이 났지요
저놈의 허수아비, 새는 안 쫓고
어째서 낮잠만 자고 있느냐?
후여후여 팔 벌리고 새를 쫓아라
가을바람에 허수아비는 정신 차렸다
두 팔을 내저으며 새를 쫓는다
새들이 무서워서 막 달아난다
가을바람 오늘은 좋은 일하고
마음이 기뻐서 막 돌아갑니다
머리를 내두르며 돌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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