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꽃산책] 풀과 나무에게 말을 걸다

[들꽃산책] 한여름 풀꽃 나무꽃 피어난 서울식물원의 한낮 풍경

푸레택 2022. 7. 9. 21:19

우윳빛 꽃 나무수국

[들꽃산책] 한여름 풀꽃 나무꽃 피어난 서울식물원의 한낮 풍경

/ 2022.07.09(토) 서울식물원에서 촬영

왕원추리
참나리

■ 가을의 노래 / 유자효

잃을 줄 알게 하소서
가짐보다도
더 소중한 것이
잃음인 것을,
이 가을
뚝뚝 지는
낙과(落果)의 지혜로
은혜로이 베푸소서

떠날 줄 알게 하소서
머무름보다
더 빛나는 것이
떠남인 것을,
이 저문 들녘
철새들이 남겨둔
보금자리가
약속의 훈장이 되게 하소서

도라지

■ 공부 / 유안진

풀밭에 떼 지어 핀 꽃다지들
꽃다지는 꽃다지라서 충분하듯이
나도 나라는 까닭만으로 가장 멋지고 싶네

시간이 자라 세월이 되는 동안
산수는 자라 미적분이 되고
학교의 수재는 사회의 둔재로 자라고
돼지 저금통은 마이너스 통장으로 자랐네

일상은 생활로, 생활도 삶으로 자라더니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버리네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기 위해서
그렇게도 오랜 공부가 필요했네

배우고 돌아서서 잊어버리는
미적분을 몰라도 잘 사는 이들
잘 살아서 뭣에다 쓰게
쓸 데가 없어야 잘 산다는 듯이
꽃다지들 저들끼리 멋지게 피어 웃네

연과 수련

■ 쪼그만 풀꽃 / 이준관

목련처럼 크고 화려한 꽃보다

별꽃이라든지 봄까치꽃이라든지 구슬붕이꽃 같은
쪼그만 꽃에 더 눈길이 간다
겸허하게 허리를 굽혀 바라보아야
비로소 보이는 꽃
하마터면 밟을 뻔해서
미안한 마음으로 바라보아야
비로소 보이는 꽃
앉아서 보듬어주고 싶어도
너무 너무 작아서
보듬어줄 수 없고
나비도 차마 앉지 못하고
팔랑팔랑 날갯짓만 하다 가는 꽃
눈으로나마
보듬어주고 안아주고 싶어서
자꾸만 눈길이 간다

참나리
꼬리조팝나무
노루오줌
리아트리스
리아트리스

■ 파리 / 정호승

한마리 파리도
푸른 하늘을 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흰 구름을 사랑할 때에도
한마리 파리가
푸른 하늘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한마리 배고픈 파리가 밥상 위에 날아와 앉는 것은
한 그릇 밥의 거룩함을 깨달았기 때문일 뿐
파리를 내리치는 파리채여
파리채를 손에 쥔 인간의 손이여
멈추시라
파리도 하늘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소리를 기뻐하며
새처럼 나뭇가지에 앉아 밤하늘 별을 바라볼 때가 있다
인간을 분노하게 하는 것은 인간일 뿐
인간이 지니지 못한
날개를 지닌 파리는 자유롭다

냉초
비비추
부처꽃
좀목형
부들레아

■ 세상을 사랑하는 법 / 나태주

세상의 모든 것들은
바라보아주는 사람의 것이다
바라보는 사람이 주인이다
나아가 생각해주는 사람의 것이며
사랑해주는 사람의 것이다
어느 날 한 나무를 정하여 정성껏
그 나무를 바라보라
그러면 그 나무도 당신을 바라볼 것이며
점점 당신의 것이 될 것이다
아니다, 그 나무가 당신을
사랑해주기 시작할 것이다
더 넓게 눈을 열어 강물을 바라보라
산을 바라보고 들을 바라보라
나아가 그들을 가슴에 품어보라
그러면 그 모든 것들이 당신의 것이 될 것이며
당신을 생각해 주고
당신을 사랑해 줄 것이다
오늘 저녁 어둠이 찾아오면
밤하늘의 별들을 우러러 보라
나아가 하나의 별에게 눈을 모으고
오래 그 별을 생각해 보고 그리워해 보라
그러면 그 별도 당신을 바라보기 시작할 것이며
당신을 생각해 줄 것이며
드디어 당신을 사랑해 줄 것이다

정성껏 바라보는 나무 호도르
“호도르도 나 사랑해?”

에키네시아
에키네시아
고려엉겅퀴(곤드레나물)

먼저 가는 것들은 없다 / 송경동

몇 번이나 세월에게 속아보니

요령이 생긴다 내가 너무
오래 산 계절이라 생각될 때
그때가 가장 여린 초록
바늘귀만 한 출구도 안 보인다고
포기하고 싶을 때, 매번 등 뒤에
다른 광야의 세계가 다가와 있었다

두 번 다시는 속지 말자
그만 생을 꺾어버리고 싶을 때
그때가 가장 아름답게 피어나보라는
여름의 시간 기회의 시간
사랑은 한 번도 늙은 채 오지 않고
단 하루가 남았더라도
우린 다시 진실해질 수 있다

아그배나무
마타리
아로니아
개복숭아나무

■ 목숨의 노래 / 문정희

너 처음 만났을 때
사랑한다
이 말은 너무 작았다

같이 살자
이 말은 너무 흔했다

그래서 너를 두곤
목숨을 내걸었다

목숨의 처음과 끝
천국에서 지옥까지 가고 싶었다

맨발로 너와 함께 타오르고 싶었다
죽고 싶었다

나무수국
꽃개오동
큰금계국
마곡문화관(옛 양천수리조합배수펌프장)

■ 하늘로 가는 길 / 박영

참으로 슬퍼할 일
너무 많아도 이제 울지 않기로 하자

한 세상 울다 보면
어찌 눈물이야 부족할 리 있겠느냐만
이제
가만가만 가슴 다독이며
하늘 끝 맴돌다 온
바람소리에
눈 멀기로 하자

이 가을, 자신에게
너무 혹독하게 다그치지 않기로 하자
아니야,
아니야라고
말하지 않기로 하자

마곡문화관 앞 연못
서울식물원 호수원
주제원 포토존
글라디올러스

■ 짝사랑 / 김병훈

한 사람을 알고 부터
내 스스로가 선택한 가장 아름다운 고통이다

 

어린이정원 모두텃밭

■ 바다의 마음으로 살게 하소서 /김옥진

소유가 아닌 빈 마음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받아서 채워지는 가슴보다
주어서 비워지는 가슴이게 하소서
지금까지 해왔던 내 사랑에
티끌이 있었다면 용서하시고
앞으로 해나갈 내 사랑은
맑게 흐르는 강물이게 하소서

위선보다 진실을 위해
나를 다듬어 나갈 수 있는 지혜를 주시고
바람에 떨구는 한 잎의 꽃잎일지라도
한없이 품어 안을 깊고 넓
바다의 마음으로 살게 하소서
바람 앞에 스러지는 육체로 살지라도
선(善)앞에 강해지는 내가 되게 하소서
크신 임이시여 그리 살게 하소서

철저한 고독으로 살지라도
사랑 앞에 깨어지고 낮아지는
항상 겸허하게 살게 하소서
크신 임이시여

왕원추리
벌개미취
원추천인국(루드베키아)
마곡문화원 AHN JUN ON GRAVITY 사진전

■ 눈물을 흘릴 때 / 정우경

눈물은
눈에서만 흐르지 않아요

가슴 속에서
가슴 속에서 흐르고 있을 때가
더 많답니다

나무수국
범부채

■ 붙잡을 수 없는 것들 / 천양희

세상의 모든 먹는 것 중에서
나이를 먹는 것처럼 먹기 싫은 것이 없고
맛없는 것이 없을 것 같다
세상일이 모두 마음먹기에 달렸다고는 하지만
아무리 마음을 잘 먹어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세월과 나이이다

내가 어떻게 벌써 이 나이인가
믿기지 않을 땐 나도 모르게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자신감도 없어진다
그까짓 나이쯤이야, 라며 큰소리쳐 보지만
삶이 철컥, 자물통을 채워버리는 것 같아
솔직히 겁이 난다
가는 세월 붙잡을 수 없고
세월 따라 먹는 나이를 나도 어쩔 수 없어서다

세월이 약이겠지요 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세월이 흐르고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뒤에야
비로소 알게 된다
젊은 날의 상처나 슬픔도
세월이 치유해주기 때문이다

젊은 날은 가난이나 고통,
슬픔이나 상처까지도 힘이 되었는데
지금은 무섭게만 느껴지니
내가 삶을 너무 과식해서 배탈이 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붙잡고 싶어도 붙잡을 수 없는 것이 세월이고
먹고 싶지 않아도 먹어야 하는 것이 나이라면
잘 보내고 잘 먹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사람도 명작처럼
세월이 흐르고 세기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고 감동을 주는
명인이 될 수 없을까 생각해 보게 된다
사람도 나이를 잘 먹고 잘 살다 보면
명인이 되고 명품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대체로 나이를 먹어서 늙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이상과 정열을 잃어버릴 때 늙는 것이다
세월의 흐름은 피부에 주름살을 늘릴 뿐이지만
꿈이나 열정을 잃어버릴 때는
영혼의 주름살을 늘린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 같다

나이를 먹어서 꿈이 줄어든다면
추억이라도 쌓아놓자
그 추억의 힘으로
마음속에 영감의 수신탑을 세울 수 있다면
세월이 흘러도 나이를 먹어도
희망의 전파를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세월이 흐르면서 줄어드는 아름다움이나
희망, 용기나 희열 같은 것이
더 소중하게 생각되고
나이가 들면서 사랑이나 용서,
나눔이나 배려 같은 말이
더 소중하게 생각된다

세월이 간다든가 나이를 먹는다는 것이
덧없다고 하지만
가는 것은 세월이나 나이가 아니라
우리가 한결같지 못하고 변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이 들어서 가진 것이 없다고 후회할 때
나는 내가 뿌린 것이 없어서
거둘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세월이 흘러도 해놓은 것이 없다고 자책될 때
나는 또 내가 행한 것이 없어서
얻을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횡재할 일이 있을 때 횡액을 생각할 줄 알고
돈이 오는 곳에 반드시
그림자가 따라온다는 것도 생각하게 된 것이
세월을 보내고 나이를 먹은 요즈음의 나 자신이다

세월이 나를 휩쓸고 가는 강이라면
나 또한 그 강이며,
세월이 나를 태우는 불이라면
나 또한 불이라던 말이 떠오른다
그래서 세월과 나이는 함께 간다고 했을 것이다

이 나이에 무슨?...이 아니라
이 나이임에도 불구하고라는 마음으로
세월을 잘 보내고 나이를 잘 먹어야겠다
세월이여 제발,
내 나이를 잘 데리고 가다오

- 
천양희 산문집 《내일을 사는 마음에게》 

범부채


https://youtu.be/VJrQLst_EVI

https://youtu.be/b5_yCHtlQKE

https://youtu.be/LAuyTpXSzY0

https://youtu.be/Ag1PtfdQwS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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