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에서 돌아와 여행 때 찍은 사진들을 밤새 정리. 공복감을 달래려고 우유를 끓이다가 급기야 짜이를 한잔 만들어 먹었다. 인도인 친구가 있는데, 고국에 다녀올 때마다 그에게 짜이 찻잎을 부탁한다. 또 언제 생길지 모르니 아껴서 마시고 있다.
피로가 겹치면 달달한 밀크 티가 구미에 당긴다. 짜이를 파는 커피숍에 앉아 ‘차이코프스키’를 들으면서 동무들이랑 수다를 떨고 싶다. 코끼리의 나라 인도는 이야기만 들었을 러시아의 음악천재 차이코프스키. 아시는가. 인도에선 내 별명이 짜이가 고픈 ‘짜이 고프스키’라는 걸. 한 잔에 1루피 때부터 그 동네엘 가보곤 했는데, 지금은 심지어 50루피 짜이도 있다고 들었다. 세상 어디나 물가는 오르는데 사는 형편은 수십년 똑같다.
음료 차 문화가 커가면서 조급증이 많이 줄어드는 걸 보게 된다. 두런두런 차를 나눠 마시면 일상의 속도가 느려진다. 급박한 속도로 하루를 달리다보면 사건사고가 터지게 돼 있다. 하루에 차를 얼마나 자주 또 오래 마셨는가에 따라 한 인생의 속도를 알 수 있겠다.
내친김에 차이코프스키 얘길 하자면, 연주 여행 중에 이런 일기를 남겼다. “내가 정말 즐거운 시간은, 늦은 저녁 방에 앉아 차를 홀짝이며 혼자 쉴 때다. 어둠이 내린 창문 밖을 보는 일은 행복하다. 손님이 없는 이른 아침 시간도 좋다. 그 밖의 시간은 정말 피곤하다. 40㎞ 정도로 달리기를 하는 것 같다. 더구나 낯선 타국에서 외국어로 말하는 것도 괴롭다.” 주기별로 대인기피증을 앓았던 작곡가는 그 덕분에 혼자만의 시간을 즐겼고 창작에 열중할 수 있었다. 혼자서 차를 마시는 시간이 많았을 것이다. 차의 두 가지 즐거움은 여러 잔을 내려 다 함께 나누는 것. 그리고 한 잔을 내려 나 홀로 마시는 것.
청문회에서는 왜 아무개랑 같이 밥을 먹었냐며 따지더라. 차를 같이 마신 것 가지고는 따지지 않아. 차나 마시지, 왜 밥들을 먹어가지고… 밥은 식욕이라는 욕망을 동반한다. 여기에는 다른 욕망들까지 달라붙게 되어 있다. 어디서 차 한 잔 하자는 건 작은 내디딤. 라면 먹고 가라는 말은 당돌한 유혹이 된다.
임의진 목사·시인ㅣ경향신문 2019.07.10
/ 2022.07.22 옮겨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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