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의진의 시골편지] 고독한 철학자 (daum.net)
누가 서명지에 사인을 해달라는데 직업란이 보였다. 직업이 여러 가지인 나로서는 장난삼아 ‘점쟁이’라고 쓰고 싶었으나 서명인을 확인도 한다길래 허억 웃다 말았다.
난 이 나이에도 장난꾸러기여서 큰일이야. 가을밤별로 별점을 친다면 ‘쓰잘데기없는 소리’ 욕을 얻어먹을 일. 별을 좇던 동방박사도 멸시천대 멱살잡이를 당했을까. 별들이 점선을 긋고 서로를 당기며 밤하늘을 촘촘히 지킨다. 한 해 모두들 잘 견뎠어. 다음엔 좋은 일이 꼭 있을 거야. 별점이 좋다.
올 들어 가장 추워라. 강아지도 추운지 낑낑댄다. 모포를 챙겨들고 나갔는데 별자리가 예뻤다. 문득 이 하늘 아래 혼자라는 생각. 점쟁이 용어로 독수공방살 제대로 맞았군. 헤르만 헤세는 ‘운명이 한 사람을 자아에게로 걸어가도록 길을 낸 게 고독이다’라고 정의했다. 독거 생활자들은 자아와 자주 마주치게 된다. 나 자신에게 던진 줄을 종종 잡아당겨보곤 한다.
독일어로 외롭다는 뜻의 ‘아인잠(Einsam)’은 중세 때부터 쓰인 말이다. 자기 자신(ein)과 일체(sam)가 된 사람을 의미한다. 나 자신과 다툼 없이 평온해진 사람. 이 고요함도 사람들을 만나는 순간 깨지게 되는데, 끝이 있는 외로움인지라 즐길수록 값지다. 결혼생활을 하고 있는 이들이 보면 외로움을 많이 탄다. 연인 짝꿍이 인생 본연의 외로움을 덜어주진 못한다. 사람으로 해결이 날 문제가 아닌, 깊은 외로움이 우리 인생에 있다. 철학은 별이 뜬 밤과 추위와 고독이라는 토양에서 움튼다. 고독한 철학자들이 눈을 빠끔 뜨고 밤을 지새운다.
철학을 전공하고 학교에서 가르치기도 하는 친구가 있는데, 네가 내 수제자라 했더니 헤헤 좋아한다. 뭐가 좋아. 반대라면 또 모를까. 철학을 배워 점술 철학관을 차리지는 못하지. 점쟁이는 그래도 어엿한 점방을 차린다. 불경기 암울한 날엔 점쟁이가 돈을 만지는 수가 많겠다. 까까 사먹을 돈도 마르고, 점쟁이 철학관이 부러워라.
임의진 목사·시인ㅣ경향신문 2020.11.05
/ 2022.06.18 옮겨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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