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의진의 시골편지] 잃어버린 안경 (daum.net)
귀한 걸 잃어버린 뒤엔 맘이 오래 쓰이고 허탈함에 쓰라린 밤을 보내지. 보통 여름 소나기가 오는 철엔 우산을 가끔 잃어버리곤 해. 우산이야 뭐 요샌 흔한 물건, 잃으나 마나. 름 름 름자로 끝나는 말은? 여드름 고드름 여름. “여름은 젊음의 계절, 여름은 사랑의 계절”, 노래야 즐겁다만 여름은 역시 우산의 계절. 우산 하나에 두 사람이 포개지면 사랑의 계절. 그러다가 우산을 버스에 놓고 내리듯 사랑을 놓고 내리는 경우도 있지. 깜박하면 잃게 되는 사랑.
강아지들 편히 놀라고 울타리를 보수하고, 내친김에 솔숲 가지치기까지 해주었어. 아름드리 소나무가 열 그루, 사다리를 놓고 죽을 동 살 동. 한번 일을 시작하면 겁없이 하는 통에 사달이 생긴다. 안경을 쓰고 일을 보았는데 어디에다 두었는지 알 길이 없어. 안경테도 애정하는 존 레넌의 동그랑땡 모양. 최근에 비싼 이중 초점 렌즈로 알도 바꿨는데 말이지. 어디에다 두었을까? 아냐 수풀에 떨어트린 듯. 찾다 포기하고, 책 읽기도 포기하고, 넷플릭스 절찬 상영도 포기하고, 음악을 들으며 밤을 보냈다. 조국의 시간이나 윤석열의 시간이 아닌 오롯이 나만의 시간. 대체로 밤은 ‘건강한 포기’를 가르친다네. 하루가 지나고 갈퀴를 들고 살살 일하던 솔숲을 뒤졌으나 다시 한번 포기. 털버덕 주저앉아 얼음물을 마시는 순간이었어. 햇빛에 반짝이는 무언가가 있었다. 혹시? 초스피드로 달려가 보니 내 안경. 아이고야 어찌나 반갑던지.
보사노바 아저씨 조빔은 낮에 좋아하던 선글라스를 잃어버리고 공연을 했는데, 공연 중에 혹시 내 선글라스 본 사람 손 들어보라는 조크. 한 아가씨가 손을 들었는데, 그녀를 위해 ‘이파네마 소녀’를 들려주었다지. 다음 이야기가 궁금하면 오백원. 무엇을 잃은 거야 또 사면 되지만 누군가를 잃으면 돌이킬 수 없이 아프다. 잃기 전에 안경을 쓰고 서로를 자세히 봐두자. 우리는 사실 서로를 너무나 몰라.
임의진 목사·시인ㅣ경향신문 2021.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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