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나는 DNA로 결정되나요? [알아두면 쓸모있는 과학] (daum.net)
‘공부 잘하는 유전자’, ‘저주받은 비만 유전자’.
과학 뉴스를 읽다보면 한 번쯤은 접해봤을 만한 문구다. 이런 뉴스를 보면 공부 잘하는 유전자를 갖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노력해도 만년 꼴찌를 벗어날 수 없을 것 같고, 저주받은 비만 유전자를 가지면 다이어트를 해도 소용없을 것 같은 인식을 갖게 된다. 정말 유전자는 나를 결정짓는 것일까? 최신 연구 성과들을 살펴보면 비만이나 학습과 관련해서는 유전자가 설계도에 불과할 뿐이고, 습관이나 환경이 더 큰 영향을 미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인간 게놈 지도 완성 16년이 지났지만 2003년 인류는 거액을 들여 인간 유전체의 총합인 ‘게놈(genome)’ 유전자 지도를 샅샅이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우리 몸의 설계도라 불리는 DNA 30억쌍의 뉴클레오티드 염기가 배열된 순서가 지도로 공개됐다. 인간 게놈 프로젝트 결과가 발표됐을 때만 해도 유전자를 통해 인간의 모든 특징을 해석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막상 결과가 발표되자 환호는 오래가지 않았다. 30억쌍의 DNA 배열을 발견한 성과 자체로 가치가 있었지만, DNA 염기서열을 알아낸 것만으로 인간의 모든 것을 속속들이 알아내기는 역부족이었다. DNA는 DNA일 뿐 DNA가 촘촘히 발현돼 만들어진 인간은 DNA 설계도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계를 절감한 과학자들은 ‘인간후성유전물질 지도 작성 연구 컨소시엄’을 출범시켜 연구 중이다. 후성유전물질이라는 것은 DNA 발현에 필요한 다양한 물질들의 상호작용을 연구하는 것으로, 간단히 말해 DNA 발현의 환경적 요소를 분석하는 연구다.
공부 못하는 건 유전자 탓이 아니다
학습능력도 유전될까? 아니면 환경과 노력이 중요할까? 미국 남캘리포니아대 대니얼 벤저민 교수는 2016년 국제학술지 〈네이처〉에 발표한 연구에서 유럽에 거주하는 성인 29만명의 DNA와 공부시간을 분석했다. 분석 결과 공부를 오래한 사람에게서 공통적으로 74개의 돌연변이 유전자가 발견됐다. 이 연구는 공부 잘하는 사람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유전자가 있다는 내용으로 국내에 보도됐다. 그러나 저자는 자신의 연구가 ‘공부 잘하는 유전자가 발견됐다’고 해석되는 것을 경계했다. 학습기간에 가장 영향을 많이 미치는 대립유전자 1쌍에 대해 유전자를 가진 실험군과 갖지 못한 실험군의 공부시간 차이는 단 7주에 불과했다. 유전자와 공부시간이 상관관계를 가질 뿐 유전자가 공부기간을 결정하는 요소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현재 민간 유전자 분석기관에서 유전자로 학습능력이나 지능을 검사해준다는 광고는 불법 소지가 있다. 2006년 보건복지부는 지능과 학습능력에 관련된 요소가 유전자뿐 아니라 다양해 검사의 신뢰도가 낮다는 이유로 유전자를 통한 학습 및 지능검사를 금지시켰다. 이런 검사는 신경전달물질인 도파민 수용체를 만드는 DRD4 유전자 등을 검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유전자는 새로운 것을 찾아다니는 탐구심과 관계가 깊어 학습 의욕도 높을 것이라는 논리로 이뤄지는 검사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이 검사에 대해 대부분 회의적이다. 학습 및 기억에 대한 메커니즘이 완전히 규명되지 않았기 때문에 특정 유전자의 유무로 학습능력을 검증할 수 없다. 오히려 지능과 기억 같은 고등 정신능력은 여러 가지 유전자가 복합적으로 관여하는 데다 환경의 요소가 크기 때문에 유전자로 결정된다고 보기 어렵다.
현대인의 가장 큰 고민 중 하나인 비만과 관련된 유전자도 환경과 습관의 영향이 더 큰 편이다. 비만을 유발하는 유전자로 가장 먼저 알려진 것은 FTO 유전자다. 이 유전자에 돌연변이가 생기면 식욕이 증가하고 포만감을 잘 느끼지 못하게 된다. 그 결과 변이가 없는 사람과 비교해 체중이 평균 3㎏ 정도 더 나가고, 어릴 때부터 비만이 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 유전자를 가졌다고 해서 모두 비만이 되는 것은 아니다. 개인의 노력에 따라 비만이 될 확률도 달라진다. 국제학술지 《영국의학회지》에 2016년 발표된 연구를 보면 과체중이거나 비만인 사람들이 식이요법, 운동, 또는 약물치료 같은 방법을 통해 체중을 감량할 때 FTO 유전자 변이 유무가 다이어트 성공률에 별로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비만 유전자는 존재하지만 그 유전자는 체중 감량을 하고자 하는 인간의 노력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한 셈이다. 저주받은 비만 유전자를 가졌다고 탓할 필요도, 좌절할 필요도 없다. 비만과 체중 조절은 인간의 의지와 습관을 통해 충분히 극복 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유전자 결정론에 쉽게 끌리는 이유
DNA의 힘이 강력한 경우도 있다. 특히 질병 영역에서는 DNA의 힘이 막강한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헌팅턴병이나 낭포성 섬유증의 경우 관련 유전자를 보유하면 대부분 병이 발생한다. 유방암을 일으키는 유전자 BRCA의 경우를 보자. 유전자 변이를 갖지 않은 여성의 유방암 발병 확률은 7%인 데 비해 변이를 가진 경우 최대 50%까지 높아진다. 할리우드 유명 배우 안젤리나 졸리는 자신의 유전자 검사 결과 BRCA 유전자 변이가 있다는 결과를 받아들고 예방적 차원에서 유방 절제술을 시행해 논란이 일기도 했다.
책 《유전자는 우리를 어디까지 결정할 수 있나》를 지은 브리티시컬럼비아대 문화심리학과 스티븐 하이네 교수는 유전자 결정주의에 끌리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보통 과학 수업시간 멘델의 완두콩을 통해 유전 원리를 처음 접한다. 완두콩은 주름의 유무를 가르는 유전형질이 매우 단순했다. 멘델의 유전 도식이 기억에 남아있는 우리는 ‘공부 유전자’나 ‘비만 유전자’ 같은 용어를 접했을 때 이를 멘델의 완두콩 유전 도식을 바탕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유전자에 별명을 붙이는 관행도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공부 유전자는 공부를 잘하는 목표를 가지고 존재하는 유전자 같고, 비만 유전자는 비만이라는 목표를 잡고 작동하는 유전자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하지만 DNA는 어떠한 목표를 가지고 있지 않다. 심지어 단일 유전자가 반드시 질병을 일으키지도 않는다.
『후성유전학 태동
2000년대 초반, 유전자형이 동일해도 발병 유무가 다른 사례가 속속 보고됐다. 유전자가 동일한 일란성 쌍둥이를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한 명은 병에 걸렸지만 다른 한 명은 걸리지 않은 것이다. 이런 연구를 바탕으로 유전자가 동일해도 환경적 요인으로 유전자가 발현되지 않으면 병에 걸리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뿐만 아니라 부모세대가 환경의 영향으로 처음 획득한 유전형질이 자녀세대로 유전되기도 한다. 이를 후성유전학이라 부르는데 DNA 활성화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외부 요소는 메틸기라는 화학성분이다. 』
목정민 과학칼럼니스트ㅣ경향신문 2019.10.16
/ 2022.05.21 옮겨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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