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과학이 성차별을 하고 있다는 뒤늦은 깨달음 [알아두면 쓸모있는 과학] (daum.net)
(5) 과학이 성차별을 하고 있다는 뒤늦은 깨달음 [알아두면 쓸모있는 과학]
1992년 출간된 책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이하 ‘화성 남자 금성 여자’)〉는 연애서 분야의 스테디셀러다. 이 책은 ‘진화심리학(Evolutionary psychology)’을 기반으로 남녀가 화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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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출간된 책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이하 ‘화성 남자 금성 여자’)》는 연애서 분야의 스테디셀러다. 이 책은 ‘진화심리학(Evolutionary psychology)’을 기반으로 남녀가 화성과 금성의 거리만큼이나 차이가 난다는 아이디어로 시작한다.
남녀가 심리적·감정적·성적으로 아주 다른 세계에 살고 있으니, 이 차이를 이해하면 갈등을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20대 때는 연애 문제의 모든 해결책이 이 책에 있다는 생각을 한 때도 있었다. 상대를 화성 남자에 대입하고, 나를 금성 여자에 대입했을 때 그럭저럭 답이 도출되기도 했다. 그런데 〈화성 남자 금성 여자〉를 읽을 때마다 마음 한 구석에 찜찜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정말 진화심리학이 말하는 대로 나의 사랑은 나의 ‘DNA’를 후손에게 전달하기 위한 화학작용인가. 즉 ‘번식’을 위한 감정일 뿐이었나라는 의문이 든 것이다. 무의식 속에 있을지도 모르는 번식이라는 욕망에 지배당해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니! 상대에 대한 사랑은 ‘번식’의 욕구보다는 친밀감과 열정 같은 다양한 요소에 좌우되지 않았던가.
성의 고정관념을 고착시키는 진화심리학
진화심리학은 인간을 포함한 동물의 심리를 진화학적 관점에서 이해하려는 학문이다. 다양한 심리를 분석하는데 특히 남녀관계에 대한 내용은 논쟁적이다.
진화심리학은 원시시대 수렵·채집을 하던 시절 남녀의 모습이 자연선택과 진화를 거쳐 현재까지 남아있다고 본다. 수많은 정자를 생산하는 남성은 가능한 한 많은 연인을 원하고 유한한 난자를 가진 여성은 조건을 따지며 질 좋은 소수의 파트너를 선택한다. 남성은 구애하고 여성은 선택한다는 명제는 유명하다. 이 명제 속에서 번식은 남녀관계의 제1 목적이다. 남녀관계에 대한 간단한 해석의 틀을 제공하기 때문인지 진화심리학은 남녀의 심리를 풀이하는 데 자주 사용된다. 인기도 꽤 높아 대중서로도 많이 나와 있다.
그런데 진화심리학은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특히 비판을 많이 받았다. 전통적이고 규범적인 성 역할을 강화하는 기제로 작용한다는 이유에서다. 여성학계는 진화심리학이 기본적으로 남성 중심주의적이라고 비판했다. 미국 하버드대 마리 루틴 교수는 《나는 과학이 말하는 성차별이 불편합니다》라는 책에서 진화심리학자들이 ‘성은 곧 짝짓기’라는 고정관념에 빠져 있다고 지적했다. 예를 들어 침팬치류에 속하는 보노보는 번식의 목적 외에 자유로운 성 행동을 한다. 그런데 진화심리학에서 보노보는 ‘예외적’인 영장류로 취급된다.
일부 진화심리학자는 여기에 기반해 강간을 옹호하는 주장을 펼쳐 비판을 받기도 했다. 진화심리학 대중서 가운데 가장 유명한 책 《욕망의 진화》를 쓴 미국 텍사스대 데이비드 버스 교수는 이 책에서 강간을 옹호하는 논지를 펼친다. 버스 교수는 강간당한 여성의 임신율이 합의에 의한 성관계에 의한 임신율보다 2배 이상 높다고 언급한다. 남성은 공격하고 여성은 막는다는 진화심리학 논리에 따라 막아내려는 여성이 더욱 공격적인 남성과 짝짓기를 하게 되고, 이 특성이 후대로 이어진다고 봤다. 특히 임신율을 따지며 논지를 펼치자 여성계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강간을 당한 여성의 임신율이 높다는 데이터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강간은 엄연한 범죄 아닌가?
여성이 처음 만난 남성과의 잠자리에 소극적인 이유에 대해서도 우리 사회의 범죄율은 고려되지 않는다. 다만 남성은 본성이 공격적이기 때문에 처음 만난 여성과도 잠자리를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진화심리학을 다룬 대중서를 통해 퍼진, 남성은 적극적이고 여성은 신중해야 한다는 생각은 전통적인 성 역할을 강화하는 부작용을 낳고 있다. 마틴 루티 교수는 이를 두고 “여성주의 운동이 오랜 기간 투쟁하며 무너뜨리려고 했던 성에 대한 고정관념이 현대에도 여전히 굳건하다”고 진단했다. 고정관념이 과학적 사실이라는 ‘명찰’을 달고서 말이다.
물론 진화심리학은 인간의 본성과 마음에 대해 진화의 틀을 가져와 연구하면서 다양한 연구성과를 내기도 했다. 그러나 젠더 의식이 점점 높아지면서 진화심리학을 둘러싼 논쟁이 심화되고 있다. 특히 최근 한국 사회에서도 페미니즘 열풍이 부는 등 젠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진화심리학을 바탕으로 한 남녀의 심리를 다시 봐야 한다는 인식이 싹트고 있다.
남성 편향적인 과학 연구
알고 보면 성 편향은 과학 내에도 만연해 있었다. 남성 위주의 연구가 지속됐기 때문이다. 과학 실험에서 여성 모델은 배제되고 남성 모델이 표준으로 이용돼왔다. 동물 실험에 가장 흔하게 사용되는 쥐는 보통 수컷 쥐다. 이 때문에 수컷 쥐만 사용한 실험결과는 암컷 쥐만 가진 호르몬이나 다양한 기작을 반영해내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표준화된 인체라는 개념은 보통 성인 남성의 몸을 기준으로 삼아왔다. 보통 사람이 가장 효과적으로 일할 수 있는 사무실 온도는 섭씨 21도로 알려져 있다. 이는 1960년대 측정된 자료를 바탕으로 나온 수치인데 당시 몸무게 70㎏의 40대 성인 남성을 기준으로 정했다. 여성이 생각하는 실내 최적온도는 21도보다 높았다. 대사율과 체내 열 생산에 대해서도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보리스 킹마 박사가 사무직으로 일하는 여성에게 알맞은 실내온도를 다시 계산했더니 23~26도였다.
이 때문에 젠더의 다양성을 과학실험에 반영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그 결과 여성 모델이 실험에 투입되기 시작했고, 성별에 따라 다른 실험결과가 나온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예를 들어 성별에 따라 약물의 효과가 다른 경우가 있다. 미국 식품의약국(FDA)은 불면증 치료제인 졸피뎀이 남성과 여성에게서 약효가 다르게 나타난다는 사실을 이 약이 시판된 지 21년 만에 인정했다. 그 결과 FDA는 2013년 졸피뎀의 처방용량을 10㎎에서 5㎎으로 줄이라고 발표했다. 남성보다 여성의 혈액 내에 졸피뎀이 더 많이 남아있어 졸피뎀을 복용한 여성이 운전 중 조는 경우가 잦았다.
젠더 감수성이 높아지면서 비로소 인식하게 되는 차별도 있다. 필자는 심리학 분야의 글을 쓸 때 진화심리학에 쉽게 손이 갔었다. 그런데 진화심리학이 전통적인 성 역할을 강화하는 논리로 사용된다는 비판을 알고 난 뒤에는 진화심리학을 이용해 심리학 기사를 쓰는 것이 조심스러워졌다. 과학 자체에는 선악이 없다고 한다. 과학적 증거를 들이대면 사람들은 대부분 수긍하게 된다. 반대로 말하면 과학을 이용하는 태도가 중요하다는 이야기가 된다. 과학을 말할 때는 더욱 더 신중해야 한다. 그리고 이는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목정민 과학칼럼니스트ㅣ경향신문 2019.10.30
/ 2022.05.21 옮겨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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