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88) / 겁이 사람을 살렸다 - 마종하의 '겁' - 뉴스페이퍼 (news-paper.co.kr)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88) 겁이 사람을 살렸다-마종하의 '겁'
겁 / 마종하
비결은 ‘겁’이다
겁으로 산 것이다
빌어먹을 눈치보기라니
1ㆍ4후퇴 때 어머니께서
바가지를 쥐어주시며
흙담에 몸을 가리고
소리지르라고 하셨다
“밥 좀 주세요!”라고
나는 못하겠다고
울먹였으나, 어머니께선
목소리를 높이라고
얼굴을 떨며 주문하셨다
그때부터, 뿌리의 겁,
질린 찬밥이 되었는지
가난은 이제 친숙하다
죄 없는 마음으로
기름 뺀 힘살만으로
저 널린 허무를 가꾸며,
마른 바가지와도 같이
겁마저 가볍게 꾸린다
-『창작과 비평』(2004년 겨울호)
<해설>
어떤 일이나 대상을 두려워하는 마음의 상태를 가리키는 순우리말이 ‘겁’이다. 아마도 시인이 겪은 이 시의 내용은 실제 체험이 아니었나 싶은데, ‘죽기 아니면 살기로’ 버텨야 했던 1ㆍ4후퇴 때의 일이다. 어머니는 바가지를 쥐어주시며 흙담에 몸을 가리고 소리를 지르라고 하셨다. “밥 좀 주세요!”라고. 화자는 못하겠다고 울먹였으나 어머니는 목소리를 높이라고 얼굴을 떨며 주문하였다. 겁이 원래 많았던 것일까, 그때부터 “뿌리의 겁”이 질린 찬밥이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가난은 이제 친숙하여, “죄 없는 마음으로/ 기름 뺀 허무를 가꾸며” 겁마저 가볍게 꾸릴 수 있게 되었다. 그때 그런 끔찍한 ‘겁’의 체험이 겁의 순치를 가능케 한 것이다.
우리는 겁쟁이라는 말을 안 좋은 뜻으로 쓰고 있지만 겁이 사람을 살리는 경우가 있다. 파란 많았던 한국 근ㆍ현대사를 살펴보면 용기가 사지로 몰아넣고 겁이 목숨을 건지게 한 경우가 꽤 있었다. 하지만 이육사나 최익현을 생각해보면 용기가 옳고 겁은 비겁한 것이다. 청나라와 러시아와 싸워 이긴 일본의 침략 위협에 우리가 겁을 먹었기 때문에 나라를 빼앗기지 않았겠는가.
<이승하 시인 약력>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시집 『공포와 전율의 나날』, 『감시와 처벌의 나날』, 『아픔이 너를 꽃피웠다』, 『나무 앞에서의 기도』, 『생애를 낭송하다』 등과 소설집 『길 위에서의 죽음』을 펴냄. 산문집 『시가 있는 편지』, 『한밤에 쓴 위문편지』,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등을, 문학평론집 『세속과 초월 사이에서』, 『한국문학의 역사의식』, 『욕망의 이데아』, 『한국 현대시문학사』(공저) 등을 펴냄. 시창작론 『시, 어떻게 쓸 것인가』도 있음. 지훈상, 시와시학상, 가톨릭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이승하 시인ㅣ뉴스페이퍼 2019.07.11
/ 2022.04.20 옮겨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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