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26) / 아가가 웃는구나 - 최정애의 '아가 되던 날' - 뉴스페이퍼 (news-paper.co.kr)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26) 아가가 웃는구나 - 최정애의 '아가 되던 날'
아가 되던 날 / 최정애
아가가 문을 밀고 나오던 날
지구 위에 생명 하나 심은 게 좋아 웃다가
웃음이 눈물이 되는 법 깨달았지요
눈감고도 우유 먹는 게 신기하여
종일 굶은 배가 벌렁벌렁 뛰었구요
배내옷보다도 작은 인형만 한 아가
그 쬐끄만 몸은 우주를 채우고도 모자라
제 주먹만 한 할미 가슴으로 비집고 오데요
꽃물처럼 상큼한 숨결
서걱이는 마음 구석구석 산소가 되어
지구 한 바퀴를 구경시켜 주더군요
꽃술 눈으로 향기를 피우고
젤리 입으로 노래를 부르면서요
안개꽃 다발보다 짧은 키에서
어쩜 그렇게 깊은 생각이 나오는지
조근조근 귓속말 나눌 때
오므린 입이 졸린지
입술을 딱 벌리고 하품을 하데요
그때 내 가슴에서 기쁨 한 덩이 탁 터졌지요
꽃망울 하나가 놀라서 피었구요
-『시현실』(2002. 봄)
<해설>
시의 화자는 할머니다. 손녀가 자라는 모습을 보니 나날이 기쁘고 신비롭기만 하다. 즉, 이 시는 가장 순수한 마음으로 쓴 생명 예찬이다. 예찬의 대상은 아가만이 아니라 모성도 포함된다. 아가를 낳아보았기에 아가의 마음이 될 수 있는 사람, 곧 세상의 모든 어머니다. 아가가 커 가는 모습을 얼마나 잘 그렸는지 독자는 읽고 있는 동안 백지처럼 깨끗한 아가의 마음이 된다. 기뻐 어쩔 줄을 모르는 할머니의 마음이 된다.
우리는 아가의 새근새근 잠든 얼굴이나 방실방실 웃는 얼굴을 보면 티 없이 맑은 마음을 갖게 되고 너무너무 행복해진다. 아가가 할머니에게 다가와 조근조근 귓속말을 할 때, 입술을 딱 벌리고 하품을 할 때, 할머니의 마음만 천국이 되는 것이 아니다. 독자도 가슴이 벅차올라 기쁨 한 덩이를 탁 터뜨리고, 꽃망울 하나가 그 바람에 놀라서 피어난다. 시의 마지막 처리가 그야말로 화룡점정이다. 윤석중이 쓴 동요가 생각난다. “아가야 나오너라 달맞이 가자 앵두 따다 실에 꿰어 목에다 걸고 검둥개야 너도 가자 냇가로 가자”
<이승하 시인 약력>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시집 『공포와 전율의 나날』, 『감시와 처벌의 나날』, 『아픔이 너를 꽃피웠다』, 『나무 앞에서의 기도』, 『생애를 낭송하다』 등과 소설집 『길 위에서의 죽음』을 펴냄. 산문집 『시가 있는 편지』, 『한밤에 쓴 위문편지』,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등을, 문학평론집 『세속과 초월 사이에서』, 『한국문학의 역사의식』, 『욕망의 이데아』, 『한국 현대시문학사』(공저) 등을 펴냄. 시창작론 『시, 어떻게 쓸 것인가』도 있음. 지훈상, 시와시학상, 가톨릭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출처 : 뉴스페이퍼 2019.05.10
/ 2022.03.24 옮겨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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