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25) / 허기는 귀신이다 - 서안나의 '슬픈 식욕' - 뉴스페이퍼 (news-paper.co.kr)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25) 허기는 귀신이다 - 서안나의 '슬픈 식욕'
슬픈 식욕 / 서안나
그녀는 조선족이라고 한다
얼굴만 보아서는 알 수 없지만
그녀의 말 한 마디로 출신 성분이
정확히 간파되고 만다
전국을 떠다니며 산다고 한다
잔뿌리 같은 열 손가락으로
허공이라도 움켜쥐고 싶다는 그녀
음식을 제대로 먹지 않아도
아랫배가 왜 부풀어 오르는지
지퍼가 벌어질 때도 있다고 했다
슬픔을 배가 부르도록
먹어본 적도 있다 했다
쓰레기통을 뒤지며 배를 채우는
슬픈 식욕의 힘으로
공중부양하는 것을 믿느냐고도 물어왔다
온몸 가득 바람을 불러들여
부레옥잠이 되고 싶다는 여자
빚을 갚기 전에
땅에 발붙일 수 없노라고
보랏빛 눈물 흘리며
천형을 받고 있다 말하는 여자
허공에서 지느러미를 퍼덕이며
배가 터지도록 세상의 온기를 퍼먹고 있는
식욕이 슬픈 풍어(風魚) 한 마리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2002. 11)
<해설>
지금 우리나라에는 중국 국적의 조선족 여성이 많이 들어와 산다. 음식점 종업원으로 일하는 경우가 많다. 농촌총각과 결혼해 삶의 터전을 한국으로 아예 옮긴 여성도 있다. 젊은이들은 중국 대처로 가고 중년은 일자리를 찾아서 한국으로 가서 연변의 조선족 인구가 현저히 줄어들고 있다고 한다.
시인이 그리는 조선족 여성은 끔찍한 굶주림의 기억을 갖고 있다. “쓰레기통을 뒤지며 배를 채우는/슬픈 식욕의 힘”은 이 시의 소재이자 주제다. 빚을 갚기 전에는 땅에 발붙일 수 없다고(즉, 정착할 수 없다고) 보랏빛 눈물을 흘리며 말하는 조선족 여인은 빚을 갚기 위해 전국을 떠돌아다니며 산다. 주로 허드렛일을 하며 살아가는 여인이리라. 시인은 그녀를 “식욕이 슬픈 풍어(風魚) 한 마리”라고 표현한다.
일반적으로 잘 쓰이지 않는 ‘풍어’라는 낱말은 공중부양과 부레옥잠과 관련이 있다. 종이로 만든 큼지막한 물고기는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허공에서 지느러미를 퍼덕인다. 있어야 할 곳에 있지 못하는 삶을, 물에 떠다니며 사는 부레옥잠처럼 정착하지 못하는 삶을 조선족 여인은 낯설고 물선 이곳 대한민국에서 영위하고 있다. 그녀는 “배가 터지도록 세상의 온기를 퍼먹고 있”다. 아아 그놈의 슬픈 식욕 때문에.
<이승하 시인 약력>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시집 『공포와 전율의 나날』, 『감시와 처벌의 나날』, 『아픔이 너를 꽃피웠다』, 『나무 앞에서의 기도』, 『생애를 낭송하다』 등과 소설집 『길 위에서의 죽음』을 펴냄. 산문집 『시가 있는 편지』, 『한밤에 쓴 위문편지』,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등을, 문학평론집 『세속과 초월 사이에서』, 『한국문학의 역사의식』, 『욕망의 이데아』, 『한국 현대시문학사』(공저) 등을 펴냄. 시창작론 『시, 어떻게 쓸 것인가』도 있음. 지훈상, 시와시학상, 가톨릭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출처 : 뉴스페이퍼 2019.05.09
/ 2022.03.24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