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충기의 삽질일기] 먼지잼·보름치·개부심 알면 95점 | 중앙일보 (joongang.co.kr)
[안충기의 삽질일기] 먼지잼·보름치·개부심 알면 95점
봄은 햇살, 여름은 비다. 비의 대장은 장맛비다. 이번엔 얼마나 퍼부을까. 12년 만에 전국 동시 장마라기에 마음이 급해졌다. 매년 제주에서부터 올라오는 비구름을 보며 밭일의 순서를 가늠하는데, 이번엔 대비할 시간이 그만큼 적다는 얘기다. 장마철은 한해 농사의 깔딱 고개다. 이 시기를 앞뒤로 밭은 얼굴을 바꾼다. 큰비 몇 번 내리고 나면 풀과 채소는 앳된 모습을 버리고 수염 뒤덮인 험악한 사내가 된다. 풀은 내 밭의 조폭이다. 나에게 주는 것도 없으면서 가진 것 다 내놓으라고 겁박을 한다. 내 주머니에서 털어갈 게 없으면 저희끼리 아귀다툼을 해댄다. 피아가 없고 원칙도 없는 싸움이다. 개판인 셈인데 일주일에 한번 밭에 가는 나로서는 싸움에 개입해 심판을 볼 여력이 없다. 그래도 놔두면 밭은 금세 엉망이 되니 한 주라도 낫질을 거를 수 없다.
작물 지지대를 보강하고, 일주일새 다시 쑥쑥 자라는 토마토와 고추 순을 따줬다. 금세 온몸이 젖는다. 땀은 이마를 흘러 눈으로 들어가고 안경알 안으로 뚝뚝 떨어진다. 대파에 북을 주며 호미질 하다 보니 흙이 푸석푸석하다. 장마는 제주도와 남부지방을 적시고 중부지방은 먼지잼만 하고는 다시 아래로 내려갔다. 내 밭에는 비설거지를 할 때 목에 떨어지던 몇 방울이 전부다. 목마른 땅은 하늘이 야속하다. 비를 가리키는 우리말이 얼마나 될까. 같은 말이 지역마다 다르고, 같은 지역에서도 강 건너고, 산 넘으면 또 달라지기도 한다. 대충 찾아봤는데도 아래와 같다. 57개다. 한자어와 사투리 관용어까지 모으면 그 수는 몇 곱이 될 테다.
그러면 읽어 내려가며 모르는 말이 몇 개나 되는지 세어보실까요.
장마 전에 잔뜩 먹자. 맛난 밥, 맛없는 밥을 따질 때가 아니다.
안개비: 빗줄기가 가늘어 안개처럼 부옇게 보이는 비. 무우霧雨
는개: 안개보다 조금 굵고 이슬비 보다 가는 비. 제주 방언
이슬비: 는개보다 굵고 가랑비보다 가늘게 내리는 비. 미우-微雨. 이실갱이·이스락지·이스럭지·이시락지·이시럭지-전북. 지냉비-함남. 이스랭이-경상. 이스렁비-충남
보슬비: 바람 없는 날 알갱이가 끊어지며 가늘고 성기게 조용히 내리는 비. 보수락비- 평북·함남·황해
부슬비: 보슬비보다 조금 굵은 비. 부시레기-경남. 부실비-경북 동남부
가루비: 가루처럼 가늘고 부스러지듯 포슬포슬 뿌옇게 내리는 비
실비: 실처럼 가늘고 길게 금을 그으며 내리는 비
구부리고 일하느라 머리 위에 있는 오이 순을 따주지 못했다. 이번 주말엔 잊지 말 것.
가랑비: 이슬비보다 좀 굵게 내리는 가는 비. 잔비-경북 영일. 싸락비-함남. 세우細雨
날비: 비가 올 것 같은 징조도 없이 내리는 비. 흔히 많이 오지 않고 조금 내린다. 북한어
발비: 빗발이 보일 정도로 굵은 비. 제주방언
장대비: 장대처럼 굵고 거세게 좍좍 쏟아지는 비=작달비
억수: 물을 퍼붓듯이 세차게 내리는 비. 고레장비·고래비-제주
큰비: 줄기차게 내리는 크고 많은 비. 호우豪雨
달구비: 땅을 다지는 데 쓰이는 쇳덩이나 둥근 나무토막인 달구로 짓누르듯 빗발이 아주 굵은 비
채찍비: 채찍을 내리치듯이 굵고 세차게 내리치는 비
농구선수가 된 로메인. 다소곳하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잎도 이제는 단맛보다 쓴맛이 강하다.
먼지잼: 먼지나 잠재울 정도로 아주 조금 내리는 비
여우비: 맑은 날 잠깐 뿌리고 마는 비. 여시비-전북. 해비 햇비-북한. 야시비-경상. 여시비-전남
소나기: 갑자기 세차게 쏟아지다가 곧 그치는 비. 취우驟雨. 소내기-군산 부안 정읍, 쐬나기-고창, 쏘낙비-군산 김제 부안, 소낙비-군산 남원 부안 정읍, 주제기비·겁비-제주, 소냉기-경북, 소나구-평북, 우레-함경
산돌림비: 산기슭으로 내리는 소나기,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한 줄기씩 내리는 소나기
불소나기: 몹시 내리퍼붓는 소나기
개부심: 장마로 큰물이 난 뒤 한동안 멎었다가 명개를 부시어내며 다시 퍼붓는 비
바람비: 바람과 함께 몰아치는 비
하늘 향해 두 팔 벌린 상추. 참하던 놈이 저리 변할 줄이야. 참비름과 바랭이보다 키가 크다. 뒤로 보이는 밭에 들깨와 비트를 뿌렸는데 풀들이 훨씬 빨리 자라고 있다.
상추꽃망울 무더기. 어떻게 보아도 예쁜 꽃을 피울 것 같지 않다.
웬걸, 한 꺼풀 벗은 상추꽃. 애들은 커서 뭐가 될지 알 수 없다. 기다림이 필요한 이유.
도둑비: 밤에 몰래 살짝 내린 비
누리: 우박
은비: 끄느름하게 오랫동안 내리는 비. 고우苦雨
보름치: 음력 보름 무렵에 내리는 비나 눈
그믐치: 음력 그믐께에 내리는 비나 눈
찬비: 살갗에 닿으면 소름이 돋는 차가운 비. 한우寒雨. 처우凄雨. 냉우冷雨. 언비-제주
밤비: 밤에 내리는 비. 야우夜雨
웃비: 다 그치지는 않고, 한창 내리다가 잠시 그친 비
아욱을 뒤에 세우고 핀 20일무 꽃. 아욱만큼 큰데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쓰러졌다.
봄비: 봄철에 조용히 가늘게 내리는 비. 춘우春雨. 최화우催花雨-꽃을 재촉하는 비
여름비: 여름철에 내리는 비. 하우夏雨
가을비: 가을에 내리는 비. 추우秋雨. 가실비-경북. 가실기비-강원
겨울비: 겨울에 내리는 비. 동우冬雨. 게울비·저울비-강원
바람비: 바람과 함께 몰아치는 비
모다깃비: 뭇매를 치듯이 세차게 내리는 비
우레비: 우레가 치면서 내리는 비. 뇌우雷雨. 우레비-북한어
마른비: 땅에 닿기도 전에 증발되어 버리는 비
단비: 곡식이 꿀처럼 달게 받아먹을 비. 작물이 필요할 때 맞춰 내리는 비. 꿀비-북한어
바글바글 고수 꽃. 바람이 일렁일 때 마다 진한 향이 나풀거린다. 작은 꽃도 모이면 크다.
짙어가는 녹음. 비는 언제 오나.
중복물: 중복 무렵에 내리는 큰비. 북한어
말복물: 말복 무렵에 내리는 큰비. 북한어
탁지우濯枝雨:음력 유월쯤에 오는 큰비
목비: 모낼 무렵 한목 오는 비
못비: 모를 다 낼 만큼 충분히 오는 비
약비: 꼭 필요한 때 내리는 비. 약이 되는 비. 북한어로는 제초제를 뜻한다
복비: 복을 가져다주는 비. 농사철에 때 맞춰 내리는 비
큰비: 상당한 기간에 걸쳐 많이 쏟아지는 비. 대우大雨. 호우豪雨
오란비: 장마의 옛말
건들장마: 초가을에 비가 내리다가 개고, 또 내리다가 개고 하는 장마
손바닥보다 크게 자라는 아욱잎도 꽃이 피기 시작하면 작아진다. 꽃과 잎이 양분을 나눠먹으니 그렇다. 꽃대를 잘라줘도 옆구리에서 다시 가지를 치며 꽃을 피운다. 계절을 이길 수는 없지.
비꽃: 비가 내리기 시작할 때 성기게 떨어지는 빗방울. 북한어
줄비: 끊임없이 쫙쫙 내리는 비
바람비: 바람과 더불어 몰아치는 비일비: 봄비. 농번기인 봄에는 비가 와도 일을 한다는 뜻으로 쓰는 말
잠비: 여름비. 여름에는 바쁜 일이 없어 비가 오면 낮잠을 자기 좋다는 뜻
떡비: 가을비. 가을걷이가 끝난 뒤 내리는 비. 떡을 해 먹으면서 여유 있게 쉴 수 있다는 뜻
술비: 겨울비. 농한기라 술을 마시면서 놀기 좋을 때 내리는 비라는 뜻
나비는 의심이 많아 가까이 가는 낌새가 있으면 금세 폴폴 날아간다. 아욱꽃이 얼마나 맛 나는지 이놈은 꼼짝을 않는다. 쪽쪼옥~ 꿀을 빠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내 밭둑을 지키는 호위무사 옥수수. 발치의 풀을 쳐내다가 낫을 잘못 놀려 대공 하나를 잘라버렸다. 미안하다 내 탓이다.
솔밭 쪽에서 밭둑으로 맹렬하게 넘어오는 환삼덩굴을 걷어내는데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 우우우웅~ 프로펠러음이나 엔진음처럼 일정한 주파수를 가진 저음이다. 기계음이 아닌데 뭔가 심상찮다. 퍼뜩 지난해 기억이 떠올라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역시 그렇다. 소리 발신지는 어느새 내 키를 훌쩍 넘어버린 옥수수대 끝이다.
허공에서 흔들리는 ‘벌통’ 옥수수꽃. 날아드는 벌과 꽃등에 날개 소리에 귀가 멍멍하다.
잔뜩 흐리고 비는 주지 않는 하늘. 벌침이라도 한방 놔야 하나.
무더기로 피기 시작한 꽃 속으로 벌과 꽃등에가 새카맣게 날아들고 있다. 이 꽃에서 저 꽃으로, 저 대공에서 이 대공으로 수백 마리가 어지럽게 교차비행하며 내는 날갯짓 소리가 모이고 증폭돼 귀가 멍멍하다. 꽃 속에서 뒹굴며 온몸에 화분을 묻히느라 놈들은 카메라를 가까이 들이대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다시 허리 숙여 밭둑의 풀을 쳐내며 나간다. 봄에 밭쥔장이 잔뜩 약을 친 밭둑에서 민들레가 가장 먼저 뿌리를 내렸다. 그 모습이 신통해서 놔뒀는데 여기저기서 마구 꽃을 피워 밭둑을 가득 채웠다. 한 포기만 남기고 모두 목을 쳤다.
내 밭의 깡패 바랭이꽃. 억센 놈, 무서운 놈, 질긴 놈, 징한 놈.
아침밥 먹느라 정신없는 양배추 벌레 가족. 아삭아삭 잎 한 번 갉고, 이슬 한 방울로 목축이고 안빈낙도가 따로 없다.
김훈의 소설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 ‘남한산성’에는 민들레가 두 번 나온다. 대충 생각나는 장면과 대사는 이렇다.
뱃사공의 손녀 나루가 떠날 준비를 하는 김상헌에게 묻는다.
“언제 돌아오실 건가요”
그가 답한다.
“송파강가에 민들레꽃이 피면 꼭 돌아오겠다”
영화는 막판에 성벽 위에 핀 민들레꽃을 클로즈업한다. 그 뒤로 자막이 뜬다.
‘그해 봄, 다시 민들레가 피었다’
민들레는 전쟁의 끝 봄의 시작을 은유한다. 꽃에 담긴 메시지는 희망이다.
영화에서는 이른 봄을 말하지는 사실 민들레는 한여름에도 끊임없이 피고진다.
옥수수를 병풍으로 세우고 피고 지는 민들레. 한 포기에서 형은 지고 아우는 피고.
두 번째 씨를 뿌린 상추는 큰 포기 아래 묻혀 흐물흐물 녹아버렸다. 두 번째 뿌린 씨앗은 그래도 싹이 텄다. 그 옆에서 바랭이며 비름이 더 빨리 자라고 있어 낙관할 수 없다. 매일 문안인사를 드려야 하지만 도리가 없다. 모종상추는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바글바글 붙은 자주색 꽃망울 안에서 연노랑 꽃잎이 부채처럼 터진다. 다른 채소들도 일제히 꽃대를 올리기 시작했다. 모종과 씨로 심은 채소는 한 달 정도의 시차가 있는데도 꽃피는 시기는 비슷하다. 장마 전에 열매를 맺어 대를 이으라는 DNA 명령 때문일 테다. 쌈채소들 잎은 살이 내리고 빛을 잃어간다. 그나마 성한 포기도 다음 주면 끝이다. 모두 뽑아낼까 놔둘까 부질없이 갈등하다가 지치고 손아귀에 힘도 빠져 낫을 거뒀다.
처음 심어본 반결구상추인데 잎상추보다 보드랍다. 모양과 색깔이 맘에 들어 계속 심어볼까 생각 중.
목이 길어지기 시작한 버터헤드. 너도 이젠 이별, 그동안 잘 먹었다.
옆 밭의 아주머니는 오늘도 내 밭을 오르내리며 비름 순을 꺾느라 바쁘다. 장마 지나면 다 갈아엎을 텐데 많이 훑어가세요.
밭 여기저기에 자라는 흔한 풀이다. 이 꽃 뭐예요? 유명번역가 조영학 선생에게 물어봤다. 털별꽃아재비,라고 즉각 답이 왔다. 이 양반, 꽃에도 조예가 깊어 묻기만 하면 ‘자판기’처럼 이름이 나온다. 최근에 책 『천마산에 꽃이 있다』를 냈다. 털별꽃아재비는 남미가 원산인 풀이란다. 이 땅에 토착한 귀화식물은 꽤 많다. 타향도 정들면 고향이다. 외국사람 차별하면 우리도 밖에 나가 똑같이 당한다.
애인을 기다리는 중이거나, 도를 닦는 중이거나, 아무 생각 없거나... 소리쟁이 꽃대 위에 앉은 이분 존함은 뭐더라.
칠월은 토마토 계절이다. 방울토마토에 붉은 기운이 돌기 시작했다. 주먹토마토가 곧 뒤따를 테다.
살이 오르기 시작한 고추. 고추는 매워야 맛인데 씹어보니 아직 비리다.
사진·글=안충기 아트전문기자 2019.07.06
/ 2022.03.22 옮겨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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