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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충기의 삽질일기] 인맥관리의 비결, 잎맥 안에 있다 (2022.03.22)

푸레택 2022. 3. 22. 21:10

[안충기의 삽질일기] 인맥관리의 비결, 잎맥 안에 있다 | 중앙일보 (joongang.co.kr)

 

[안충기의 삽질일기] 인맥관리의 비결, 잎맥 안에 있다

밭 주위를 맴돌며 봄볕을 쐬는 일이 이 시기의 낙이다. 많은 이들이 이 시기에 고개를 저으며 떠난다. 간결한 삶이 있고, 얽히고설켜 돌아가는 그물 같은 관계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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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구경할 때는 아무 생각 말고 그저 바라볼 것. 그런데 모기는 어떻게 빗줄기 사이로 날아다닐까

[안충기의 삽질일기] 인맥관리의 비결, 잎맥 안에 있다

주말농사에는 네 번의 방학이 있다. 씨 뿌린 뒤 2~3주 동안이 봄방학이다. 싹은 서서히 트고 풀은 아직 기척이 없을 때다. 나는 물을 주지도 않으니 그나마 할 일이 없다. 밭 주위를 맴돌며 봄볕을 쐬는 일이 이 시기의 낙이다.

여름방학은 장마철인 요즈음이다. 봄채소는 모두 꽃을 피우고 생을 마감했다. 이제 고추·토마토·오이·가지·옥수수 같은 열매채소 계절이다. 잎채소가 있던 자리는 풀 천지가 됐다. 풀뿌리는 악착같고 서로 얽혀서 손아귀 힘으로는 어쩌지 못한다. 비 오는 날은 공치는 날이다. 물러진 땅을 밟고 다니면 비 그친 뒤 콘크리트처럼 단단해진다. 처마 밑에 앉아 낙숫물을 넋 놓고 보는 재미는 나른하지만, 해가 나면 그래도 통로를 덮은 풀을 쳐내야 한다. 모기는 독이 오를 대로 올라있다. 땀내를 맡고 달려드는 놈들에게 걸리면 잠깐 새 벌집이 된다. 틈만 보이면 여지없이 대가리를 들이민다. 틈이 없으면 두꺼운 옷에도 침을 박아 넣는다. 말이 방학이지 여름방학은 고약하다. 많은 이들이 이 시기에 고개를 저으며 떠난다.

비 그치고 팔월이 되면 밭을 갈아엎고 무·배추 모종을 심고 가을상추씨를 뿌린다. 곧바로 가을방학이다. 다시 풀은 자라지만 여름처럼 그악스럽지 않고 햇살은 슬금슬금 무뎌진다. 첫서리 전에 김장거리를 거두면 학년이 끝나는데, 대지가 열기로 가득한 지금 겨울방학 생각은 사치다. 봄부터 틈틈이 채소 잎사귀를 살폈다. 가만 보니 그 속에 세상 풍경이 들어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 관계도 보인다. 간결한 삶이 있고, 얽히고설켜 돌아가는 그물 같은 관계도 있다.

통통한 꽃대에서 꽃봉오리가 올라오더니 꽃잎이 활짝 피었다. 매미 날개 무늬로도 보인다

태풍이 덮친 날 둥치 우람한 나무가 기우뚱 쓰러지며 가지가 부러졌다. 깊고 너른 뿌리 덕에 아주 쓰러지지는 않았지만 위태롭다.

하늘 향해 줄기를 죽죽 뻗은 자작나무들. 잎과 잎 사이로 쏟아지는 빛이 부딪치며 숲은 부드럽게 빛난다.

냇물 모여 강물이 되고, 강물은 어울려 바다로 들어간다. 평원 군데군데 호수가 박혀 있고 논마다 푸른 벼가 가득하다.

오른쪽 위 호수에서 떨어진 물이 좌우 골짜기를 타고 내린 물길과 만나 큰물이 되었다

왼쪽 어마어마한 호수에서 빠져나온 물이 거미줄처럼 얽힌 관개수로를 따라 들판을 초록으로 적신다. 물은 사시사철 흐르니 1년에 2모작은 충분해 보인다. 바다 같은 호수 중국 타이호(太湖)나 홍쩌호(洪澤湖)주변이 이런 모양 아닐까. 마당발을 자랑하는 이들의 그물망 인맥 같기도 하다. 한 다리 건너면 다 아는 사이다.

오전 5시30분, 동해에서 떠오른 해에 백두대간 동사면이 환하다. 건너편 능선도 햇살을 되받아 서서히 기지개를 켠다. 계곡을 따라 흐르는 물은 동해로 빠져나간다.

오후 7시, 해는 산맥 서사면을 물들이며 넘어간다. 태백산에서 갈라진 물길은 북으로는 한강을 따라가 서해로 흘러들고, 남으로는 낙동강을 따라가 남해와 만난다. 바다에는 경계가 없다. 서로 가는 길은 다르지만 언젠가는 다시 만난다.

근육질 산과 등성이를 헤집고 비집으며 계곡이 굽이친다. 길은 물을 따라 돌고, 고개를 넘으며 마을과 마을을 이어 사람들 소식을 전한다.

첩첩 산중. 모퉁이를 돌고 또 돌아도 산이고 끝인가 하면 다시 산이다. 그래도 햇살 따가운 산길을 돌아가면 서늘한 그늘이 한참 이어진다. 오로지 양지, 오로지 음지는 없다.

땀범벅이 되어 산등성이에 올라서니 문득 시야가 탁 트이고 선들바람이 분다. 내려다보니 저 아래 웅장한 산록과 골짜기.

봄 길은 환하다. 간지러운 햇살 받으며 여기 기웃 저기 기웃하며 하루 종일 걸어도 즐겁다.

여름 길은 지친다. 그래도 얼린 생수병 들고 설렁설렁 걷다가 무릎에 힘 빠지면그늘에서 쉬면 된다. 시내를 만나면 탁족은 필수.

계곡이 물들기 시작했다. 해는 뜨고 지고, 계절도 오고 간다. 천년 제국은 없다.

붉게 타는 가을. 잎이 마르고 계곡 물이 줄면 곧 하얀 겨울이다. 동백처럼 능소화처럼 계절은 어느 날 툭, 목을 꺾는다.

아틀라스 산맥의 서쪽은 풍요롭다. 산맥이 동쪽 사하라에서 불어오는 열풍을 막아주고 서쪽 대서양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준봉들을 넘지못하고 비가 되는 덕이다. 여기는 자갈과 바위가 널린 황량한 동쪽이다. 군데군데 오아시스를 끼고 사람들은 살아간다. 동쪽으로 하루를 더 가면 알제리와 국경이 되는 모래사막이 나타난다.

올록볼록한 뽁뽁이. 겨울만이 아니라 여름에도 남향 창가에 붙이면 단열효과가 뛰어나다. 왼쪽에 난 구멍은 때워야겠다.

세상을 꽤 오래 산 거북 등이다. 울퉁불퉁하고 쭈그러지기도 했다. 다양한 스펙트럼의 이끼를 보아 살아온 이력이 대하소설감은 되겠다.

해 뜨거나, 해 넘어 갈 때 잠시 볼 수 있는 산 그림자. 붓과 물감으로 표현할 수 없는 경지를 자연은 잠깐씩 맛보기로 보여준다.

어둠이 있어 빛이 있고, 빛이 있어 어둠이 있다. 빛과 어둠은 수시로 섞이며 변하는데 잠시도 같지 않다. 흑과 백은 인간 혓바닥이 만든 유희일 뿐 자연에는 없는 논리다.

장마는 오래가지는 않는다. 비 그치고 해가 나면 다시 삽을 들 시간이다.


사진·글=안충기 아트전문기자ㅣ중앙일보 2019.07.27

/ 2022.03.22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