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20) / 지리산 위령제 - 이영도의 '피아골' - 뉴스페이퍼 (news-paper.co.kr)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20) / 지리산 위령제 - 이영도의 '피아골'
피아골 / 이영도
한 장 치욕 속에 역사도 피에 젖고
너희 젊은 목숨 낙화로 지던 그날
천년의 우람한 침묵, 짐승같이 울던 곳
지친 능선 위에 하늘은 푸르른데
깊은 골 칠칠한 숲은 아무런 말이 없고
뻐꾸기 너만 우느냐, 혼자 애를 타느냐
<해설>
이영도를 가리켜 그리움의 시인, 자연서정의 시인, 망향의 시인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지만 작품 중에 우국과 애족의 시조가 있었음을 잊으면 안 된다. 어떤 때는 선이 굵은 시조, 주제의식이 튼튼한 시조를 쓰기도 했다.
피아골에 가보라. 지리산 제2봉인 반야봉의 중턱에서 발원한 맑고 풍부한 물이 깊은 숲을 누비며 내려가 삼거리ㆍ연곡사 등을 지나 섬진강으로 빠진다. 폭포ㆍ담소ㆍ심연이 계속되는 계곡미가 뛰어나고 특히 이곳의 단풍은 지리산 10경의 하나로 손꼽힌다. 옛날 이 일대에 피밭[稷田]이 많아서 ‘피밭골’이라는 이름이 생겨났고 이것이 변해 피아골이 되었다고 한다. 한국전쟁 중에, 특히 1948년 10월에 일어난 여순반란사건 때 이곳에서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이영도 시인은 이곳에서 죽어간 파르티잔과 군인ㆍ경찰들에게 합동위령제를 지내주는 마음으로 이 작품을 썼다.
피아골에서 죽어간 젊은이의 수가 얼마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파르티잔이 지리산 일대에서 꽤 오래 준동했으므로 피아골은 말 그대로 피의 골짜기였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깊은 골 칠칠한 숲은/ 아무런 말이 없고” 뻐꾸기만 울고 있다. 이념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젊은이들이 총을 들고 들어가 피아골 골짜기에서 숨어 지냈던 것일까. 그중 다수는 여기서 숨을 거두었다. “너의 젊은 목숨”이 낙화처럼 분분히 지던 날은 가고 지금 여기 피아골은 피아의 총탄 자국도 남아 있지 않다. 그래서 시인은 피아골의 역사적인 의미를 되씹어보고 있는 것이다.
<이승하 시인 약력>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시집 『공포와 전율의 나날』, 『감시와 처벌의 나날』, 『아픔이 너를 꽃피웠다』, 『나무 앞에서의 기도』, 『생애를 낭송하다』 등과 소설집 『길 위에서의 죽음』을 펴냄. 산문집 『시가 있는 편지』, 『한밤에 쓴 위문편지』,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등을, 문학평론집 『세속과 초월 사이에서』, 『한국문학의 역사의식』, 『욕망의 이데아』, 『한국 현대시문학사』(공저) 등을 펴냄. 시창작론 『시, 어떻게 쓸 것인가』도 있음. 지훈상, 시와시학상, 가톨릭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출처 : 뉴스페이퍼 2022.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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