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2) / 연애시의 최고 절창 - 윤후명 시인의 '어쩌자고 어쩌자고' - 뉴스페이퍼 (news-paper.co.kr)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2) / 연애시의 최고 절창 - 윤후명 시인의 '어쩌자고 어쩌자고'
어쩌자고 어쩌자고 / 윤후명
어둠이 더 짙어지기 전에
너를 잊어버려야 하리 오늘도
칠흑 같은 밤이 되면
사라진 길을 길삼아
너 돌아오는 발자욱 소리의
모습 한결 낭랑하고
숨막혀, 숨막혀, 숨막혀, 숨막
혀를 깨물며 나는 자지러지지
산 자 필(必)히 죽고
만난 자 정(定)히 헤어지는데
어쩌자고 어쩌자고 너는
어쩌자고 어쩌짜고
온몸에 그리운 뱀비늘로 돋아
발자욱 소리의 모습
내 목을 죄느냐
소리죽여 와서 내 목을 꽈악
죄느냐, 이 몹쓸 그립은 것아,
-『홀로 등불을 상처 위에 켜다』(민음사, 1992)
[해설]
유사 이래 제일 많이 창작된 것이 연애시일 것이다. 동양에서 제일 오래된 시가집인 『시경(詩經)』에서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하고 있는 시가 연애시다. 『시경』은 풍(風), 아(雅), 송(頌)으로 분류되는데 ‘풍’ 160편은 각 지방의 민요로 거의 다 남녀의 연애감정과 이별의 아픔을 다루었다. ‘아’는 공식 연회에서 쓰는 의식가이며, 송은 종묘의 제사에서 쓰는 악시(樂詩)다. 서양에서도 서정시의 원류는 연애시만을 줄기차게 쓴 여성시인 사포(Sappho)라고 할 수 있다. 사포는 기원전 6세기 때 사람으로 시와 음악과 무용을 학동들에게 가르치면서 수강료로 살아갔다. 역사에 이름을 남긴 최초의 예능교사라고 할까.
이 땅의 고대가요 중 제일 먼저 창작된 것이 유리왕의 「황조가」이니, 연애감정이 있었기에 유리왕은 일국의 왕이면서 또한 시인이었다. 「공무도하가」와 「구지가」보다 앞서서 기원전 17년에 창작된 이 작품은, 당나라에서 시집온 치희(雉姬)가 본국 출신 왕비 화희(禾姬)의 질투를 견디다 못해 자기 나라로 가버리자 유리왕이 시름에 겨워 쓴 것이다. 꾀꼬리들아 너희들은 어쩜 그리 의좋게 지내고 있느냐. 나는 아내를 잃고 이렇게 슬픔에 잠겨 있는데.
윤후명이 첫 시집 『명궁』을 ‘윤상규’라는 이름으로 낸 것은 1977년이었다. 15년 뒤에 두 번째 시집을 필명 ‘윤후명’으로 내니 그 제목이 ‘홀로 등불을 상처 위에 켜다’였다. 그 상간에 시에서 소설로 갔다고 생각해 시 쓰기가 “종결되고 말았다”라고 한 나의 평문이 못마땅했는지 윤후명은 “나는 영원히 시인이기에 내 작업은 결코 ‘종결’되지 않았다”고 ‘시인의 말’에다 썼으며, 손수 그 시집을 사인하여 내게 부쳐주셨다. 아이고, 속이 뜨끔하였다.
그는 역시, 뛰어난 시인이었다. 나는 세상의 무수히 많은 연애시 중에서 이 시를 제일 좋아한다.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그 소리가 어찌나 낭랑한지 숨이 막히는 것이 사랑이란다. 숨이 막혀 혀를 깨물며 자지러지는 것이 또한 사랑이란다. “발자욱 소리의 모습”이니 상상인가 환상인가. 그 발자욱 소리만 들어도, 그 모습만 떠올라도, 목이 꽈악 죄는 기분을 당신은 느껴보았는가. 사랑의 감정은 사람의 눈을 멀게 하고 귀가 먹게 하고 숨이 꽈악 막히게 한다.
“숨막혀, 숨막혀, 숨막혀, 숨막/ 혀를 깨물며 나는 자지러지지”가 이 시의 백미가 아니랴. 끝내는 “소리죽여 와서 내 목을 꽈악” 죄는 “이 몹쓸 그립은 것”을 시인은 사랑한다고 한다. 미치도록. 아아, 어쩌자고.
윤후명은 2012년에 육필시집 『먼지 같은 사랑』과 또 한 권의 시집 『쇠물닭의 책』을 펴냈다. 2017년에는 시선집 『강릉 별빛』을 펴냈다. ‘70년대’ 동인의 일원으로서 2012년 ‘고래 동인’으로 다시 뭉쳐 네 번째 합동 시집 『고래 2018』을 펴내기도 했다. 그는 시 같은 소설을 쓰다가 지금은 시도 쓰고 소설도 쓰고 있다.
<이승하 시인 약력>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시집 『공포와 전율의 나날』, 『감시와 처벌의 나날』, 『아픔이 너를 꽃피웠다』, 『나무 앞에서의 기도』, 『생애를 낭송하다』 등과 소설집 『길 위에서의 죽음』을 펴냄. 산문집 『시가 있는 편지』, 『한밤에 쓴 위문편지』,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등을, 문학평론집 『세속과 초월 사이에서』, 『한국문학의 역사의식』, 『욕망의 이데아』, 『한국 현대시문학사』(공저) 등을 펴냄. 시창작론 『시, 어떻게 쓸 것인가』도 있음. 지훈상, 시와시학상, 가톨릭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출처] 뉴스페이퍼 2019.04.16
/ 2022.03.17 옮겨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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