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도현의 꽃차례] 소나무의 운명/시인 (daum.net)
안도현 시인
[안도현의 꽃차례] 소나무의 운명 / 시인
열두어 살 무렵 나무젓가락과 깡통을 하나씩 들고 송충이 잡기에 동원된 적이 있었다. 가파른 산비탈에서 깡통이 가득 채워질 때까지 송충이를 잡았다. 선생님은 무엇보다 소나무를 살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민둥산에다 나무를 심는 산림녹화사업은 1970년대 초반부터 범국가적으로 이루어졌다. 빨리 성장하는 아까시나무, 리기다소나무, 일본잎갈나무, 편백 등이 이때부터 꾸준히 식재됐다.
국가가 주도한 이 조림 사업은 나무 대신 석탄과 석유를 주연료로 사용하면서 크게 성공했다. 지게를 지고 나무하러 가던 젊은이들은 상경해서 공장 노동자가 됐고, 이제는 봄날 근교의 산벚나무꽃을 지그시 관망하는 나이가 됐다. 50년이 지나간 것이다.
불땀이 좋아 나무꾼들에게 수난을 당하던 소나무는 울울창창 숲을 이루게 됐다. 숲에서 오래 성장한 소나무는 궁궐이나 사찰을 짓는 목재로 주로 이용됐으나 근래에는 업자들에 의해 도시로 이주했다. 조경업자들은 관공서와 아파트의 조경수로 소나무를 빠뜨리는 법이 없다. 몸값이 불어난 소나무는 21세기에도 그야말로 한국인들의 생활 밀착형 나무가 됐다.
소나무의 품종 중에 금강산에서 경북 울진까지 동해안을 따라 내려오면서 사는 금강송이 있다. 산림청과 문화재청이 울진 소광리 일대를 금강송 군락지로 지정할 무렵 시 한 편을 쓴 적이 있다. “소나무의 정부(政府)가 어디 있을까?/ 소나무의 궁궐이 어디 있을까?” 이렇게 시작하는 시인데, 군락지 입구에 시비가 세워져 있기도 하다.
최근 역대 최대 규모의 울진, 삼척 산불이 휩쓸고 간 곳은 금강송의 최남단 지역이다. 금강송은 가지를 옆으로 펼치지 않고 수형이 일직선으로 곧게 뻗은 아주 잘생긴 나무다. 폭설이 많이 내리는 지역에서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몸을 곧추세워 눈 피해를 덜 입는 똑똑한 나무이기도 하다.
금강송이 자라는 숲을 일찍이 김명인 시인은 눈물겹게 아름다운 시로 노래한 적이 있다. ‘너와집 한 채’라는 시다. 앞부분은 이렇다. “길이 있다면, 어디 두천쯤에나 가서/ 강원남도 울진군 북면의/ 버려진 너와집이나 얻어 들겠네 거기서/ 한 마장 다시 화전에 그슬린 말재를 넘어/ 눈 아래 골짜기에 들었다가 길을 잃겠네” 이 금강송이 자라는 숲이 이번 산불로 대거 사라졌다.
산불의 원인은 대부분 사람에 의한 실화다. 그렇다고 예방 캠페인을 강화하고 헬기와 소방장비, 인력과 예산을 대폭 늘린다고 못된 산불을 잡을 수 있을 것인가. 산불이 지나간 지역의 산림복구사업에는 거의 다 소나무를 심는다. 치산녹화 정책 50년 동안 빼곡하게 소나무를 심어 산을 푸르게 만들었으나 산불에는 속수무책이다. 소나무에 대한 애착이 혹시 산불의 크기를 키웠던 것은 아닐까? 숲에 소나무 밀집도가 높아지면서 산불의 행동이 바뀌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소나무 한 종을 편애하면 그 주위에 오히려 멸종위기종이 늘어날 수도 있다. 다양한 나무가 자라는 숲이 건강하다. 나무와 나무 사이의 거리 두기도 생각할 때다.
글=안도현 시인ㅣ서울신문 2022.03.15
/ 2022.03.16 옮겨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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