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경희의 '힐링의 미술관'] 미인을 선택한 당신의 대가..20대엔 아프로디테·50대엔 헤라? (daum.net)
[유경희의 '힐링의 미술관'] 미인을 선택한 당신의 대가..20대엔 아프로디테·50대엔 헤라?
그리스 신화에서 ‘파리스의 심판’은 가장 흥미로운, 그러나 가장 말썽 많은 심판이었다. 오늘 다시 파리스의 심판이 열린다면 당신은 누굴 택할 것인가? 권력과 재물, 명예와 지혜, 아름다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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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스의 심판’, 1530년경, 루카스 크라나흐.
[유경희의 '힐링의 미술관'] 미인을 선택한 당신의 대가.. 20대엔 아프로디테·50대엔 헤라?
그리스 신화에서 ‘파리스의 심판’은 가장 흥미로운, 그러나 가장 말썽 많은 심판이었다. 오늘 다시 파리스의 심판이 열린다면 당신은 누굴 택할 것인가? 권력과 재물, 명예와 지혜, 아름다운 여자 중에서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파리스처럼 아름다운 여인을 선택한 결과로 무지막지한 전쟁을 치를 것인가?
까마득한 옛날, 뮈르뮈돈 왕인 펠레우스는 은빛의 발로 아름다움을 뽐내던 바다의 여신 테티스를 사랑하게 됐다. 둘의 혼례식이 거행됐는데, 오로지 불화의 여신 에리스만 초대받지 못했다. 불화의 여신을 누가 결혼식에 초대하겠는가. 에리스는 분노가 극에 달아 앙심을 품고 ‘가장 아름다운 여신에게’라는 문구가 적힌 황금사과를 결혼 피로연 식탁에 던지고 사라져버렸다. 싸움을 일으켜 분란을 조장하려는 심산이었다.
수많은 여신들이 나섰지만 그중 가장 힘이 센 세 여신이 최종 후보로 나서게 됐다. 헤라, 아테나, 아프로디테 등 세 여신이 이 사과를 서로 갖겠다고 다툰 것. 이를 중재할 존재는 신들의 신인 제우스밖에 없지만 제우스조차 이 여자들의 갈등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다. 올림포스 궁전의 여신들이 모두 자기와 관련된 인물들(아내, 딸, 애인 등)인지라, 감히 그 누구에게도 원망을 사고 싶지 않았던 것. 한 여신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두 여신의 원망을 사는 것이 자신에게 이로울 까닭이 없다는 것을 어찌 모르겠는가!
치밀한 전략가 제우스는 이 난감한 싸움을 지혜롭게 해결하기 위해 이데산(山)의 파리스에게 맡기기로 한다. 사실 파리스는 트로이 왕 프리아모스의 아들로, 그가 태어나면 자기 나라를 멸망시킬 것이라는 예언을 들은 부모에 의해 이데산에 버려진 인물이다. 마치 오이디푸스처럼 기적적으로 구조된 파리스는 왕자인 것도 모른 채 양치기들에 의해 키워졌다. 제우스는 파리스가 신들의 정체를 모르니 보복당할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공정하게 심판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제우스는 헤르메스를 시켜 사과를 파리스에게 건네줬다.
공이 파리스에게 넘어가자 세 여신은 그 황금사과를 차지하려 어떤 수단과 방법도 가리지 않고 그를 매수하기 위한 도전장을 내민다. 제우스의 아내이자 올림포스 신전의 권력과 살림의 총책을 맡고 있었으며, 모든 가정과 결혼의 수호신인 헤라는 소아시아 제국 전체를 통치할 왕권을 주겠다고 했다. 제우스가 혼자서 낳은 딸로, 명석한 두뇌와 이지적 마스크를 가진 아테나는 지혜와 전쟁의 여신답게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불굴의 용기와 지혜를 주겠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모든 신들로부터 아름다움을 공인받은 천하절색의 미와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헬레네)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上) ‘파리스의 심판’, 런던 내셔널갤러리, 1635~1638년경, 목판에 유화, 193.7×144.8㎝, 루벤스. 그림 속 세 여신은 모두 루벤스가 53세에 결혼한 두 번째 부인인 16살의 어린 신부 헬레나 푸르망의 20대 때 모습이다. (下) ‘파리스의 심판’, 1913~1914년경, 르누아르.
당시 파리스는 억지로 결혼한 뭉뚝한 몸매의 아내 오이노네에게 권태를 느끼고 있던 차였다. 그는 고민할 필요도 없이 아프로디테의 손을 들어줬다. 파리스는 아프로디테의 도움으로 그리스 땅으로 건너가,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오스의 따뜻한 영접을 받는다. 메넬라오스 왕의 왕비 헬레네가 바로 아프로디테가 파리스에게 아내로 삼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던 ‘인간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하필 하고 많은 여자 중에서 유부녀를 주겠다는 아프로디테의 무개념(?) 사랑법은 참으로 골칫거리처럼 보인다. 하지만 아프로디테가 폴리아모리(polyamory), 즉 비독점적인 다자연애관계를 추구하는 여신이었으니 말해 무엇하랴. 화가들은 파리스의 심판이라는 신화 주제에 매료됐던 것 같다. 수많은 작품이 남아 있으니 말이다.
파리스의 심판을 다룬 그림은 대부분 세 여신의 알몸을 노출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것도 고대 그리스 시대에 탄생한 삼미신 도상, 즉 우미의 여신을 벤치마킹해 조금씩 변형시켜 그렸던 것이다. 이런 류의 그림은 여체를 재현하는 솜씨를 과시하는 한편 시각적 즐거움을 제공하기 위한 매개체였다. 특히 알몸의 여신들이 아름다움을 겨루는 미의 경합이라는 주제의 선정성 덕분에 르네상스 이후 자주 등장하게 된다. 특히 가장 유명한 파리스의 심판은 바로크 시대 루벤스의 것이다. 루벤스는 파리스의 심판을 여러 점 그렸다. 바로크 특유의 역동적인 화면과 티치아노에게 배운 살결의 표현이 아주 섬세하고 드라마틱하다.
먼저 화면 중심에는 벨벳을 두른 헤라가 서 있는데 얼굴 모습의 거의 3분이 1지점만 보여준다. 헤라는 자신의 신조인 공작새를 곁에 두고 있다. 가운데는 화려한 머리 장식을 한 아프로디테가 옆모습을 드러내고 있는데, 아들인 에로스는 먼발치에서 어머니의 옷을 만지작거리고 있다. 가장 왼쪽 여인은 지혜와 전쟁의 여신인 아테나로 투구와 메두사 장식을 한 방패, 올빼미 등의 상징물이 보인다. 이처럼 루벤스는 어떤 여신인지 한눈에 봐도 알 수 있도록 묘사했다. 눈 밝은 사람들은 파리스가 이미 결정을 내렸다는 사실을 살짝 눈치챌 수 있다. 이미 파리스의 시선과 황금사과를 쥔 손이 아프로디테에게로 향해 있지 않은가? 아프로디테 역시 시선과 발걸음이 파리스에게로 향해 있음을 알 수 있다.
루벤스의 파리스의 심판(1635~1638년경)은 그의 나이 53세에 첫 번째 부인과 사별한 후 만난 16살의 어린 신부였던 헬레나 푸르망의 20대 때 모습을 그린 것이다. 사실 그림 속 세 여신이 모두 헬레나 푸르망이다. 게다가 우연의 일치치고는 기막힐 정도로 똑같은 이름 ‘헬레나’가 아닌가. 남들은 할배가 된 나이에 다시 회춘해 5명의 자녀를 낳고 왕성한 창작활동을 했다니, 루벤스 역시 파리스처럼 젊은 미인을 백번이고 선택했을 것만 같다.
이제부터 파리스의 심판이 당신에게도 주어졌다고 생각해보자. 세 미녀가 나타나 각각 어마어마한 재물과 권력, 지혜와 용기, 아름다운 여자를 주겠다고 한다. 당신이라면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당신이 파리스처럼 20대였다면 단박에 시각을 마비시키는 미녀에게 홀렸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중년이 된 당신에게 다시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모르긴 해도 당신은 아마 이제는 좀 스스로를 지혜로워졌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아마 인문학을 공부한 중년 남자들은 지혜와 용기를 가지면, 재물과 권력을 갖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아름다운 여자 정도는 그냥 줄줄이 엮일 것으로 생각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적어도 그렇게 배웠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자꾸 요즘 남자들이 헤라를 선택할 것 같은 예감이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필자가 너무 유물론적이고 속물적인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누구를 탓하랴! 내 탓이오!
글=유경희 미술평론가ㅣ매경이코노미 2015.09.21
/ 2022.03.16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