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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경희의 '힐링의 미술관'] 적들과 '창의적으로' 싸우는 법.. 미켈란젤로의 재치 넘치는 복수 (2022.03.16)

푸레택 2022. 3. 16. 21:41

[유경희의 '힐링의 미술관'] 적들과 '창의적으로' 싸우는 법..미켈란젤로의 재치 넘치는 복수 (daum.net)

 

[유경희의 '힐링의 미술관'] 적들과 '창의적으로' 싸우는 법..미켈란젤로의 재치 넘치는 복수

당대의 내로라하는 비평가이자 파워블로거가 당신 작품(상품, 서비스)은 물론 인격에 대해서도 혹평을 하고 다닌다. 게다가 그 비평가는 정권의 비호를 받는 엄청난 권세가다. 부와 명예를 거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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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심판’ 중 중앙 부분. 1536~1542년, 프레스코 벽화, 미켈란젤로. 미켈란젤로는 60대 중반에 필생의 역작으로 이 그림을 그리면서 그림에 간섭하는 사람은 교황이라도 뻣뻣하게 굴며 자신의 예술 세계를 고집했다.

 

[유경희의 '힐링의 미술관'] 적들과 '창의적으로' 싸우는 법.. 미켈란젤로의 재치 넘치는 복수

당대의 내로라하는 비평가이자 파워블로거가 당신 작품(상품, 서비스)은 물론 인격에 대해서도 혹평을 하고 다닌다. 게다가 그 비평가는 정권의 비호를 받는 엄청난 권세가다. 부와 명예를 거머쥐었지만, 시건방지고 오만함이 하늘을 찌르니 적들도 많다. 이런 사람이 있어 자꾸 당신을 험담하고 일을 그르치려 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대가가 된 미켈란젤로는 주문자나 후원인 혹은 비평가에게 할 말을 다 하고 뻣뻣하게 굴며, 필요하다면 언제나 싸울 준비가 돼 있었던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니 얼마나 주변에 중상모략가들이 많았을까.

30대 중반 ‘천지창조’에 온갖 진을 다 빼버렸던 미켈란젤로는 60대 중반에 또 한 번 크나큰 과업을 주문받는다. 바로 ‘최후의 심판’이다. 1533년 피렌체에서 메디치 묘의 작업을 하고 있던 미켈란젤로에게 교황 클레멘스 7세가 작품 의뢰를 해온 것. 클레멘스 7세가 세상을 떠나자 1535년 파울루스 3세가 다시 이 작업에 대한 명령을 내려, 1536년 ‘최후의 심판’ 작업이 시작됐고, 엄청난 노력으로 1542년에 완성됐다.

시스티나 예배당의 ‘최후의 심판’은 높이 18m, 폭 10m, 전체 면적 180.21㎡, 420명의 등장인물, 5년에 걸친 역작으로 통한다. 미켈란젤로는 ‘최후의 심판’이 완성되기까지 참으로 혹독한 고난을 많이 겪었다. 벽화를 제작하던 중 비계에서 추락하는 사고를 당했고, 다리가 부러졌는지 뼈에 금이 갔는지 상태를 알 수 없을 만큼 심각했음에도 불구하고 의사의 진찰을 거부하며 스스로 치료하기를 고집했다. 사고 났을 당시만 잠깐 쉬었던 그는 직접 만든 목발을 짚고 한쪽 다리가 불편한 상태로 일했고, 그 상태로 23년을 더 살았다. 그때 미켈란젤로는 조각가가 그림을 그리고 있다며 엄청나게 불평했다. 그러나 가족을 평생 부양해야 했던 그에게 어마어마한 연봉 계약은 꿀과 같은 유혹이었을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작품을 제작할 때 간섭과 비평을 유난히 싫어했기에 교황과 수행자들이 방문하는 걸 극도로 꺼렸다. 특히 쓸데없는 지적과 엉성한 예술적 충고를 참아내기 힘들어했다. 교황은 자주 들러 작업이 언제 끝나느냐고 물었다. 미켈란젤로는 “완성되는 날에 끝난다”고 건방지게 대답했다. 이에 교황이 “무슨 대답이 그러냐”고 화를 내자, 미켈란젤로는 즉시 로마로 떠날 차비를 했다. 아차 싶었던 율리시스 2세는 급히 사자를 보내 돈을 챙겨주며 사과했고, 미켈란젤로는 못 이기는 척 사과를 받아들였다. 이런 일은 자주 반복됐다.

사실 미술의 역사상 ‘최후의 심판’만큼 파란과 수난을 많이 겪은 작품이 없다. 이 작품의 애초 완성된 상태는 거의 벌거벗은 누드들의 향연이었다. 교황이 바뀔 때마다 벌거벗은 육체를 문제 삼아 결국 중요 부분이 베일로 가려지기에 이른다. 따라서 현재의 벽화는 미켈란젤로가 그렸던 당시의 오리지널리티가 상당히 퇴색됐다고 봐야 옳다.

‘최후의 심판’ 중 일부. 미켈란젤로는 아레티노가 그림에 끊임없이 간섭하자 그를 예수의 제자인 성 바르톨로메오에 대입하고 그의 껍질에는 자신의 얼굴을 그려넣어 아레티노에 대한 복수와 자신의 신앙심을 중의적으로 표현해냈다.

 

‘최후의 심판’ 초기 작업 시절, 교황 파울루스 3세와 의전장관인 비아조 다 체세나가 방문했다. 교황은 감동한 후 성호를 그었지만, 비아조는 “이 성스러운 장소에 모든 사람이 보도록 나체를 그렸다”며 망측하고 부도덕하다고 비난했다. 그러면서 “언젠가는 이 신성모독의 벽이 없어질 거요”라고 말하자, 교황은 격분하며 “내가 살아 있는 한 절대 안 돼. 작품에 손대는 자는 누구든 파문시키겠다”고 대응한다. 그들이 예배당을 떠나자 미켈란젤로는 벽화의 맨 오른쪽 제일 아래 구석에 비아조를 지옥의 심판관인 미노스로 그린다. 그것도 귀가 당나귀처럼 길고, 괴상한 얼굴에 허리를 감싼 뱀이 성기를 집어삼키려 하고 있는 모습으로. 이를 다시 보게 된 비아조는 교황에게 항의했지만, 교황은 “그가 자네를 연옥에 넣었다면 어떻게 해보겠네만, 자네는 지옥에 있지 않나? 그러니 나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네”라고 말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최후의 심판’에는 이보다 더 치기 어리며 귀여운 복수와 조롱의 에피소드가 또 담겨 있다.

당시 ‘최후의 심판’을 둘러싼 음모가 매우 빠른 속도로 확산되고 있었는데, 그 음모의 핵심에 피에트로 아레티노(1492~1556년)가 있었다. 아레티노는 시인이자 저술가였다. 로마, 피렌체, 만토바, 베네치아 등 각지를 전전하며 여러 곳의 궁전에 출입하면서 대담한 필치로 거리낌 없이 성직자와 왕후, 귀족 등 권력자를 풍자·비평했던 당대의 권세가였다. 이처럼 독설과 기행으로 자자한 그는 포르노 서적을 최초로 출판한 성도착자이자 도색문학가요, 베스트셀러 작가로도 유명했다. 아레티노는 돈을 벌 욕심으로 음란한 책들을 쓰는 한편, 제후와 명사들에게 협박조의 편지를 보내 이간질하고 서로를 비방하게 만들었다. 그는 협박으로 먹고사는 파렴치한 악한이자 유머와 위트를 기막히게 사용할 줄 아는 재주꾼 작가였다. 당시 군주와 귀족들은 아레티노의 신랄한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돈과 금품을 보냈고, 그는 깜짝 놀랄 만한 특혜와 목돈을 두둑이 챙기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최후의 심판’ 제작 당시 전 이탈리아에서 대단한 관심의 편지들이 속속 날아들었다. 이 편지들 중 가장 괴이한 편지가 아레티노에게서 왔다. 아레티노는 수차례 편지를 보냈는데, 그 내용은 미켈란젤로를 치켜세우는 동시에 그림에 자기의 의견을 수렴하라는 충고였다. 작업이라면 누구보다 자신만만했던 미켈란젤로에게 그의 교만한 충고는 ‘구역질이 날 만큼 지나친 간섭’으로 느껴졌다. 더 이상 훼방 놓지 못하게 하겠다는 생각으로 약간은 비꼬아서 “감사하나 지금은 완성된 상태라 받아들일 수 없다”는 답장을 보냈다. 그럼에도 아레티노는 그림과 모델에 대해 집적거리는 편지를 써댔다. 그뿐 아니라 아레티노는 “내가 이렇게 헌신적인 관심을 기울이는데도 조각과 회화의 왕인 당신이 불쏘시개로 쓰려고 쌓아둔 밑그림 한 장도 받아볼 자격이 없나요?”라며 계속 치근덕댔다. 미켈란젤로는 결국 그의 무례함을 완전히 무시해버렸다. 그런데 이는 엄청난 실수(?)였다.

아레티노는 ‘최후의 심판’이 완성될 때까지 독을 품고 지냈다. 그는 공개적으로 미켈란젤로를 향해 “껍질을 벗겨버리겠다”며 떠들고 다녔다. 이태리 속어로 ‘가만두지 않겠다’는 뜻이다. 익살스럽게도 미켈란젤로는 그의 험담을 그대로 가시화했다. 바로 예수 오른쪽 아래에 칼을 들고 있는 성 바르톨로메오와 그가 들고 있는 몸 껍질을 보라. 성 바르톨로메오는 예수의 제자 중 가장 심각한 형벌인 생피박리형으로 순교를 당한 사람이다. 미켈란젤로는 그 바르톨로메오의 얼굴에 아레티노의 얼굴을 오버랩시켰다. 그리고 그 껍질에 아레티노의 소원대로 미켈란젤로 자신의 얼굴을 새겨 넣었다. 언제 봐도 고뇌에 찬 인상의, 추한 자기 얼굴을.

물론 진짜 이런 그림을 그린 더 숭고한 의미가 따로 있기는 하다. 첫째는 아침저녁을 기도로 시작하고 끝낼 정도로 신심이 아주 강했던 자신이 예수를 위해서라면 가장 잔인한 형벌로 순교할 수 있다는 의미일 것이고, 둘째는 자신도 최후의 심판에서 자유롭지 못한 불쌍한 중생이라는 뜻이자, 자기가 지은 죗값이 이 정도쯤 될 거라는 겸손과 두려움의 표현이기도 할 것이다. 어쨌거나 미켈란젤로의 익살과 유머는 얼마나 창의적이고 천재적인가. 이중적으로 자신의 과업을 달성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에게도 이런 색다른 인내심과 창조성이 필요하지 않을까!

글=유경희 미술평론가ㅣ매경이코노미 2015.09.07

/ 2022.03.16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