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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부부가 예술가에게 보내는 편지] (7) 슬픔의 왕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에게
당신은 예술과 가난 사이, 숭고함과 비참함의 사이 어디쯤에 닻을 내리고 살았습니다.
당신 삶의 안쪽을 보면 거기엔 불행과 불운, 가난과 고독이 만든 누추한 얼룩들로 가득하겠지요.
장석주
저는 당신의 ‘정신’을 사랑했어요. 위대한 정신이죠.
제가 좋아한 건 당신 인생의 극적인 부분도, 유명세나 특별한 이력 따위가 아니었습니다.
오로지 정신, 태도, 성실, 노력, 그림에 대한 미친 열정을 좋아했습니다.
박연준
장석주 | 불행을 묵묵히 견디는 성스러움
1890년 7월 29일 화요일 새벽 1시 30분, 오베르주 라부의 다락방에서 한 화가가 제 가슴팍에 총을 쐈습니다. 네덜란드에서 개신교 목사의 6남매 중 맏아들로 태어난 그 사내, 사이프러스 나무를 녹색 불꽃처럼 그렸던 37세의 떠돌이 청년 화가. 빈센트 반 고흐(1853~1890),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당신이었지요. 이웃의 목수 레베르가 짠 관에 시신은 안치됐고, 당신과 가까웠던 의사, 가셰 박사가 가져온 달리아와 해바라기 같은 노란색 꽃들로 장식됐습니다. 당신의 장례가 치러진 날의 일기예보는 어땠나요? 당신의 사망 신고 같은 행정 처리는 누가 했을까요? 알 수가 없습니다.
내가 아는 건 당신이 37년의 생애 중 불과 10년만 그림에 정진했다는 사실입니다. 그 10년 동안 세상에서 가장 성실한 농부처럼 숱한 그림을 그렸지요. 당신은 가난한 이웃들을 좋아했습니다. 〈감자를 먹는 사람들〉에서 감자로 끼니를 때우는 가난한 이웃에 대한 연민을 읽을 수가 있어요. 당신은 광부, 방직공, 우체부, 의사, 평범한 여인들, 방과 주변의 풍경을 그렸고, 자화상은 40여 점이나 남겼습니다. 자화상은 돈 주고 모델을 쓸 형편이 못 되었던 탓이겠지요.
당신의 자화상에서 일에 몰두하는 광인 고흐, 늙고 지친 슬픔의 왕 고흐, 불행을 묵묵히 품고 견디는 성스러운 고흐, 동생 테오에게 편지를 쓰는 다정한 고흐, 세상에 버림받고 방탕에 빠져 유랑하는 고흐, 오랜 고독에 내면이 헐벗고 너덜너덜해진 고흐를 만날 수 있어요. 당신은 붓으로 불규칙한 점과 소용돌이치는 빗금이나 횡선을 그으며 캔버스를 채웠는데, 이 색채의 분출은 내면의 불안정한 에너지를 반영하는 것이겠지요.
당신은, 원숭이는 원숭이로 꽥꽥거리고 사람은 사람의 말을 하고, 밤과 대낮의 구분이 엄연하며, 가지에 열린 사과는 기어코 땅으로 추락하는 중력이 작용하는 세상에 와서, 하필이면 그림을 그렸습니다. 왜 그림에 매달렸을까요? 그림을 그리는 게 미의 창조라고 믿었기 때문일까요? 그렇다면 아름다움의 창조가 불행에 빠진 인간에게 구원이 될 수 있을까요? 당신과는 인간의 불행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우리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최선을 다해 불행을 회피하며 살지요.
당신은 예술과 가난 사이, 숭고함과 비참함의 사이 어디쯤에 닻을 내리고 살았습니다. 당신 삶의 안쪽을 보면 거기엔 불행과 불운, 가난과 고독이 만든 누추한 얼룩들로 가득하겠지요. 당신은 벨기에의 안트베르펜 미술학교에 등록해서 1885년에서 1886년으로 이어지는 겨울에 소묘 수업을 들은 적이 있지만 불운과 싸우며 독학으로 화가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숙부가 일하는 화랑의 수습사원, 책방 점원, 전도사 등으로 떠돌며 목사가 되고자 했으나 실패하고, 대신 화가의 길을 꿋꿋하게 걸었지요.
어른이 된 후 당신은 가난을 짊어지고 여인숙을 유랑하며 혼자 살았습니다.
“어느 여인숙에 가든 사람들이 나를 대할 때 가난한 행상을 대하듯 불신하리라고 예상해야 한다.”
그런 까닭에 당신은 밥값과 방값을 선불로 지불하는 걸 당연하게 여겼지요.
당신은 딱 한 번 ‘가족’을 이룬 적이 있습니다. 1882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동생 테오의 도움으로 신축한 집 한 채를 빌려 ‘자기만의 작업실’을 마련했을 때였지요. “나는 선장이 자기 배를 사랑하듯 이 작업실을 사랑한다”라고 말한 당신은 그 집에서 시엔 후르니크라는 모델이자 창녀인 여성과 동거를 했어요. 시엔은 임신 중이고, 딸이 하나, 여동생과 엄마가 있었는데, 당신은 그들과 한 ‘가족’을 이뤄 살았습니다. 가족의 활기로 북적대는 삶에서 당신은 모처럼 평화와 기쁨을 느꼈을 테지요. 동생 테오에게 “술집에서 혼자 사는 총각 신세보다야 훨씬 낫겠지?”라고 만족감을 드러냈는데, 결국 시엔은 당신을 떠났어요. 당신이 사랑한 시엔 가족이 떠나고, 당신은 다시 혼자가 됐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당신 그림은 〈밤의 카페 테라스〉(아를, 1888)입니다. 화폭의 좌측 중간에 레몬빛 노란 불빛을 받은 안온한 카페 풍경이 자리하고, 화폭 상단 한가운데에는 밤의 푸른 궁륭에서 빛나는 별들이 인생의 유쾌함에 대한 은유로 보여요. 이 그림을 볼 때마다 마음에 평안과 기쁨이 차오릅니다. 당신은 카페나 여인숙, 서민들이 자주 찾는 식당을 소재로 삼아 여러 작품을 그렸는데, 마지막 작품인 이 〈밤의 카페 테라스〉가 꽤나 마음에 들었나 봅니다. 당신은 동생에게 쓴 편지에서 이 그림에 대해 자세히 묘사했지요.
“커다란 노란색 등불이 테라스와 건물의 정면과 보도를 비춘다. 이 불빛으로 포장로는 분홍빛이 도는 연보라색을 띠지. 반짝반짝 빛나는 별하늘 아래 어둠 속으로 멀어져가는 집들은 짙은 파란색이거나 보라색이야. 그리고 한쪽에는 초록색 나무가 있지. 검은색 물감은 전혀 쓰지 않았어. 파란색과 보라색과 초록색으로 이루어진 배경 속에서 불이 켜진 테라스는 옅은 유황색과 초록색이 도는 레몬빛 노란색을 띤다. 밤에 현장에서 그림을 그리는 것도 아주 재미난 일이구나.”
당신의 그림 중 농부가 신던 낡은 구두를 그린 한 켤레의 〈구두〉 작품을 처음 봤을 때 전율(戰慄)했어요. 구두 앞창은 벌어지고, 왼쪽 구두의 목은 접히고, 오른쪽 구두의 끈은 함부로 풀려 있었지요. 닳아빠진 구두와 그 어두운 틈새를 봅니다. “대지의 부름”과 “대지의 조용한 선물인 다 익은 곡식의 부름”에 응답하는 이 낡은 구두에서 철학자 하이데거는 농부의 고단한 삶, 들판을 가로지르는 길의 고독, 바람이 불어가는 들의 황량함, 가을 저녁의 덧없음, “임박한 아기의 출산에 대한 전전긍긍과 죽음의 위협 앞에서의 전율”을 읽었지요. ‘농부의 구두’에 부친 철학자의 글을 좋아합니다. 후박나무의 커다란 나뭇잎이 뚝, 뚝 지는 가을의 쓸쓸한 저녁에 읽는 철학자 하이데거의 글은 찬란하게 아름답지요.
가난과 고독을 회피할 수 없었던 건 당신이 게을렀던 탓이 아니에요. 누구보다 부지런히 그림을 그렸고, 또 많은 작품을 남겼지만 당신 그림은 당대에 외면을 당했지요. 평생 겨우 두 작품만 돈을 받고 팔았으니까요. 화상(畫商)인 동생 테오의 생계비 후원으로 그림에만 몰두한 건 생애 내내 불운과 싸운 당신이 누린 유일한 행운이 아니었을까요? 술과 여자와 담배에 기대어 인생의 희로애락을 고스란히 끌어안고 견딘 당신의 슬픔을, 당신의 고독을 누가 감히 알 수 있을까요? 1888년 크리스마스이브에 왼쪽 귀를 잘라 카페 여급에게 주는 광태를 보였던 당신은 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제 심장에 총을 쏘고, 이틀 뒤 절명했습니다. 제 목숨을 끊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은 당신과 당신 그림에 대해 유독 냉대한 이 세상을 향한 예술가의 고독한 복수극이었겠지요.
지금 이곳은 한여름입니다. 머리 꼭대기에서 정오의 해가 타오르는 한낮엔 하늘에서 불볕이 쏟아집니다. 하얀 일광 속을 뚫고 나가 편의점에서 얼음과자를 사서 씹어 먹으며 세계의 우울을 견디기도 합니다.
당신이 머무는 그곳에도 여름이 오나요?
그곳에서 내내 안녕하시길.
장석주
전업 작가. 파주에 살며, 음악과 산책을 좋아한다. 주로 글을 쓰거나 인문학 강연을 한다. 197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철학자의 사물들》 《이상과 모던뽀이들》 《마흔의 서재》 《일상의 인문학》 《호젓한 시간의 만에서》 등과, 아내인 박연준 시인과 함께 《우리는 서로 조심하라고 말하며 걸었다》 《내 아침 인사 대신 읽어 보오》를 썼다
박연준 | 많은 것을 원하면서, 모든 것을 잃는 자!
빈센트.
밤입니다. 스탠드의 작은 불빛에 의지해 앉아, 혼자 와인을 홀짝이고 있자니, 슬픔에 대해 얘기하고 싶네요. 아침부터 손에 쥔 책은 하필 롤랑 바르트의 《애도일기》였습니다. 어머니를 잃고 슬픔을 표현한 짧은 글들로 이뤄진 책입니다. 얇지만 무거운 책이지요. 수시로 이 책의 아무 데나 펼쳐 옛 그림을 보듯 들여다보곤 합니다. 제겐 그림처럼, 보는 책이지요. 누구라도 이 책을 몇 페이지 이상 읽다 보면 슬픔이 내면에 그득 고이는 걸 느끼게 될 거예요.
살다 보면 슬픔은 거추장스러운 감정으로 취급되어, 무시하거나 극복해야 할 가벼운 병 정도로 다뤄지기도 하잖아요? 그렇지만 빈센트, 당신도 알다시피 창작하는 이에게 적당한 슬픔은 질 좋은 원료라서 시를 쓰게도, 노래를 짓거나 그림을 그리게도, 춤을 추고 싶게 만들기도 하지요. 슬픔이 그득 찬 눈빛이 되고 나면 내면은 단순해집니다. 하나로 응집되지요. 슬픔은 힘이 세고 무엇도 슬픔을 쉽게 이길 수 없으니까요.
당신의 작품 〈Sorrow〉와 〈영원의 문〉을 특히 좋아합니다. 하나는 무릎에 얼굴을 묻은 여성의 누드이고, 다른 하나는 두 손에 얼굴을 묻고 의자에 앉아 있는 노인을 그린 그림입니다. 보고 있으면 슬픔은 몸에 내려앉는 것, 그중 얼굴에, 그중 두 눈에 더 무겁게 내려앉는 거라는 확신이 들어요.
슬픔에 빠진 자는 웅크리게 됩니다. 얼굴을 어딘가에 묻고 흐느끼게 되지요. 고개를 높이 드는 자세, 그것은 보여줄 게 있는 자가 지니는 거예요. 내부의 빛, 상승하는 기운을 보여주고 싶은 자의 태도겠지요. 반면 슬픔에 빠진 자는 웅덩이에 빠진 자와 같습니다. 내부에서 온갖 것들이 우수수 빠져나가는데, 흘러내리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놓치고 있을 수밖에 없는 사람. 얼굴을, 눈빛을, 영혼을 가릴 수밖에 없는 사람이지요. 당신은 누구보다 슬픔에 대해 잘 아는 사람입니다. 얼굴에서 빛을 거두는 자의 영혼을 잘 담아내는 화가였어요. 그렇지 않나요?
“늙고 가난한 사람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들을 묘사하기에 적합한 말을 찾을 수가 없다.” 1)
늙고 가난한 사람들. 그들의 아름다움, 쓸쓸한 빛, 가난한 미래! 당신은 동생 테오에게 쓴 편지에서 말하지요. 세상에는 “더 많은 것을 원하면서 모든 것을 잃는 자들”이 있기 마련이라고요. 당신 역시 많은 것을 원하면서 모든 것을 잃는 자 중 하나였어요. 그렇지 않나요? 저는 당신이 ‘잃는 자’이기에 마음이 갑니다. 텅 빈 호주머니로 터덜터덜 저녁 거리를 걷는 사람이라서요. 애초에 야망이 없던 자가 아니라 열망으로 넘치던 아침과 오후를 보내고 난 뒤 텅 빈 항아리가 되는 사람이요. 저는 당신이 쓴 이 문장을 사랑했습니다.
“내가 정말로 하고 싶은 것, 그리고 할 수 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황야의 오솔길에 서 있는 아버지를 그리는 일이다.” 2)
빈센트, 당신만큼은 아니겠지만 20대의 제 내면 역시 꽤나 어두웠어요. 얼굴에 늘 그늘 한두 겹을 드리우고 지냈던 것 같습니다. ‘나이가 미모’라고 하던 시절을 어둑한 방에서 고통에 가득 찬 시나 쓰며 보냈지요. 그때 제 방 책장 한 면을 빼곡하게 차지한 시집들이 있었는데요, 그 시집들 사이에 시집이 아닌 책이 딱 한 권 유일하게 꽂혀 있었지요. 시를 숭배하다시피 여기던 시절이기에 시집들 사이에 자리한 ‘시집 아닌 책 한 권’은 대단히 특별한 대우를 받은 셈이었지요.
그 특별한 책은 바로 당신의 서간문이 담긴 《반 고흐, 영혼의 편지》랍니다. 줄을 긋고, 반복해서 읽고, 울고 공감하고 매달리며… 당신의 ‘정신’을 사랑했어요. 위대한 정신이죠. 제가 좋아한 건 당신 인생의 극적인 부분도, 유명세나 특별한 이력 따위가 아니었습니다. 오로지 정신, 태도, 성실, 노력, 그림에 대한 미친 열정을 좋아했습니다. 이런 문장을 기도하듯 읽었습니다.
“예술은 질투가 심하다. 가벼운 병 따위에 밀려 두 번째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건 좋아하지 않는다. 이제부터 예술의 비위를 맞추겠다.” (63쪽)
“훌륭하고 유용한 일을 해내려는 사람은 대중의 승인이나 평가를 기대하거나 추구해서는 안 되며, 열정적인 가슴을 가진 몇 안 되는 사람들의 공감과 동참만을 기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118쪽)
“진정한 화가는 캔버스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캔버스가 그를 두려워한다.” (134쪽)
“아무런 예술적 편견 없이 마치 구두를 만드는 것처럼 그림을 그린다면, 항상 그림을 잘 그리지는 못하겠지만 기대하지도 않았던 때에 뜻밖의 성과를 거두게 될 거라고 생각한다.” (276쪽)
당신의 문장은 제게 고스란히 이양됐습니다. 그림에 대한 당신의 열정과 자세를 제가 글 쓸 때 가져야 할 태도라고 믿었습니다. 아마 당신의 글을 지금 나이에 읽었다면, 그때만큼 강렬하게 받아들이지 못했을 수도 있어요. 그러나 20대엔 불붙은 나무 곁을 지나는 바람처럼, 제게 당신이 강렬하게 불어왔지요. 〈빈센트〉란 제목으로 시를 쓰기도 했어요. “미쳐 죽게 해주세요/ 날뛰다가 모가지가 뒤틀려/ 죽음이 꾸역꾸역 밀려오게 해주세요/ 온몸 구석구석에서 펌프처럼/ 피의 줄기가 터져나오게,/ 내 모든 시간과 기록이 소진되도록/ 하염없이 죄를 지으며,/ 죄에 깔려 죽을지라도/ 뱀을, 보내주세요” 이렇게 시작하는 시예요. 그땐 대체로 위독했어요.
빈센트, 존 버거가 당신을 위해 쓴 미술평이 있는데, 당신에게 꼭 들려주고 싶어요. 그는 당신의 드로잉이 “일종의 글쓰기를 닮았다”고 했지요.
“유럽의 화가들 중에 일상적인 대상을, 어떤 식으로든 그 대상이 상징하고 있는 혹은 봉사하고 있는 이상의 단계로 격상시키지 않고, 그러한 구원에 대한 언급 없이 날것 그대로 존경해준 화가는 없었다. (중략) 의자는 의자일 뿐, 왕좌가 아니었다. 부츠는 신고 다니면서 낡은 부츠였다. 해바라기는 식물이지, 별자리가 아니었다. 우체부는 편지를 배달한다. 붓꽃은 언젠가 시들 것이다. 그리고 그런 벌거벗은 상태, 그의 동시대인들이 순진함 혹은 광기라고 불렀던 그 상태에서 자신이 눈앞에 보고 있는 대상을 갑자기, 그 어떤 순간에든,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나왔다.” 3)
당신의 능력! 그 어떤 순간에든 대상을, 갑자기,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 있는 능력. 당신의 “압도적인 감정이입”(존 버거), 생각이나 이념을 섣불리 드로잉에 데려오지 않는 자세. 당신의 솔직함과 열렬함을 세상은 두려워했어요. 불편해했지요. 그게 당신을 외롭게 했을까요?
당신이 죽고 130년이 지난 지금, 당신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가 되어 있습니다. 이 사실이 당신을 기쁘게 할 거라 생각하진 않아요. 당신은 돌아서서,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라고 말하겠지요. 중요한 건 “온 힘을 다해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내버려”두는 일이라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 영혼에 깊은 경의와 사랑을 보냅니다.
평안하시길.
박연준
파주에 살며, 일주일에 세 번 발레를 배운다. 창문, 숲, 기러기를 좋아한다. 2004년 ‘중앙신인문학상’을 통해 등단했다. 시집으로 《속눈썹이 지르는 비명》 《아버지는 나를 처제, 하고 불렀다》 《베누스 푸디카》 《밤, 비, 뱀》이 있고, 산문집 《소란》 《밤은 길고 괴롭습니다》 《인생은 이상하게 흐른다》 등을 썼다.
1) 《반 고흐, 영혼의 편지》, 빈센트 반 고흐, 예담, 95쪽.
2) 《반 고흐, 영혼의 편지》, 빈센트 반 고흐, 예담, 96쪽.
3) 《초상들》(존 버거의 예술가론), 톰 오버턴 엮음, 열화당, 672쪽.
/ 2022.03.05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