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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부부가 예술가에게 보내는 편지] (5) 존 버거! 늘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보는 당신에게 (2022.03.05)

푸레택 2022. 3. 5. 2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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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버거!

늘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보는 당신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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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부부가 예술가에게 보내는 편지] (5) 존 버거

늘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보는 당신에게!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요? 당신의 정체성은 어디에 있나요?

비행기 여행을 두려워하면서도 모터사이클을 몰고 구릉 지대를 빠른 속도로 빠져나가는 당신, 현대 미술을 꿰뚫어보고 시대정신에 잇대어 비평을 쓰는 당신, 봄엔 씨앗을 뿌리고 가을엔 건초를 만드는 농사꾼으로 사는 당신은 한 사람입니다.
장석주

저는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작가 중, 당신을 가장 좋아한다는 말을 해야겠어요. 좀 감동적이지 않은가요?
당신이 머무는 곳(사후 세계가 있다면)이 잠시 환해지지 않았나요?
매우 지적인 동시에 매우 따뜻할 수 있는 사람은 당신이 유일해요.
박연준

장석주 | 노동을 향해 전진하는 단단한 인격

존 버거 선생님,

지금 이 순간에도 우주는 팽창 중인데, 우주가 팽창 가능한 최대 한계는 250억 광년이라지요. 그 우주 어디에선가 이 초록별에 당도한 우리는 슬픔을 채집하고 돈으로 만든 지옥에서 그것을 흩뿌리며 살아갑니다. 기다림을 아는 5리터 안팎의 피와 총 70킬로그램 안팎의 하중을 견디도록 설계된 206개의 뼈를 가진 인간들! 우리는 저녁 때 가장 커지는 발로 직립보행을 하고, 매우 민감한 수용 감각 세포를 가진 손을 쓰며 살지요. 산다는 건 양말 몇 켤레의 따스함, 커피 한 잔의 기쁨과 위로, 맨땅에 이마를 박는 둔중한 아픔, 그리고 악과 수고의 무두질 속에서 가끔 아름다움에 대한 시를 읽고 음악의 경이를 경험하는 것이지요.

“고통은, 까마득히 먼 옛날로부터
통찰의 형제였고, 시의 길잡이였다”

라고 쓰신, 존 버거(John Peter Berger, 1926~2017) 선생님. 삶이 고독한 1인극이 아니라고 말하는 당신에게 존경심을 담아 편지를 적습니다. 사르트르만큼이나 박식가였던 당신은 늘 무언가를 쓰는 자, 즉 비평가, 논객, 이론가, 협업자, 소설가, 시인으로 살았지요. 당신이 삶의 이력에 새긴 건 지식인, 농부, 화가, 소설가, 미술비평가, 마르크스주의 사상가이고, 다른 한편으로 박식가, 여행하는 모더니스트, 이야기꾼이었지요. 당신은 ‘경험이 언어보다 앞선다’는 사실을 실천했는데, 내가 상상과 언어의 거푸집에 갇혀 살았다면 당신은 그 거푸집을 깨고 현실로 나아갔어요. 당신은 투철한 지성, 예술적 감수성, 세상을 다르게 보는 방식, 그리고 노동을 향해 직진하는 단단한 인격으로 뭉친 사람이었지요.

지금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장 모르(Jean Mohr, 1925~2018)가 찍은 사진을 들여다보는 중입니다. 《존 버거의 초상》이란 책인데요. ‘장 모르가 찍은 오십 년 우정의 풍경’이라는 부제가 달린 이 흑백 사진집에는 젖소 농장에서 외양간을 청소하는 당신, 건초를 만들고 창고에 쌓는 당신, 건초더미에 파묻혀 쉬는 당신, 어린 아들과 시간을 보내는 당신, 아들 결혼식에 참석한 당신, 석유램프의 불빛을 받으며 정원에서 느긋한 저녁을 보내는 당신… 등등 당신 생을 스쳐간 찰나가 담겨 있어요. 인상적인 것은 세월에 따라 변화하는 당신 얼굴들입니다. 주름이 깊어진 당신 얼굴은 시간이 존재하는 방식이 새겨진 흔적이겠지요. 누구나 얼굴이란 세월이 경작하는 대지입니다. 백발과 함께 얼굴에 새겨진 주름은 얼굴이란 대지를 할퀴고 지나간 여러 계절과 불순한 기후를 묵묵히 견디고 살아낸 연대기가 드러납니다.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요? 당신의 정체성은 어디에 있나요? 당신은 비행기 여행을 두려워하면서도 모터사이클을 몰고 질주하기를 즐겼지요. 모터사이클을 몰고 구릉 지대를 빠른 속도로 빠져나가는 당신, 현대 미술을 꿰뚫어보고 시대정신에 잇대어 비평을 쓰는 당신, 봄엔 씨앗을 뿌리고 가을엔 건초를 만드는 농사꾼으로 사는 당신은 한 사람입니다. 당신은 젊은 마르크스주의 선동가로 성장해서 라디오 원고나 미술 비평을 써서 생계비를 벌고, 1960년대 혁명의 소용돌이를 통과하는 동안 당신은 늘 제가 투자한 땀과 노고보다 더 많은 소득을 챙기는 기득권자보다는 이주노동자나 농사꾼 같은 사회적 약자의 권리를 옹호했지요. 거기에는 단 한 점의 공명심이나 위선이 없었습니다.

당신은 사회 모순과 평범한 악에 맞서는 날선 글과 행동으로 세상을 바꾸려고 했지요. 당신은 매우 정치적 인간이었어요. 마흔 살 무렵 다섯 해 동안이나 매달려 완성한 소설 《G》를 떠올립니다. 19세기 말 유럽인 상인과 미국인 정부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 자아가 없고, 다만 욕망하고 여행하고 유혹하는 기계인 사생아! 그 변변한 이름조차 없는 사생아에게 당신의 자아가 투사됐겠지요. 당신은 ‘지적 포르노’라는 혹평을 받은 《G》로 1972년 저 유명한 맨부커상을 받는데, 당신은 상을 준 자본가들을 모욕합니다. 상금 절반을 좌파 조직인 블랙팬더당(Black Panther Party)에 기부하고, 나머지 절반은 이주노동자 연구 작업에 쓰기로 하지요. 당신이 정치 투쟁이라고 했던 이 엉뚱한 사건으로 영국 사회는 소동을 겪었어요. “버거는 왜 자신에게 돈을 주는 손을 물었을까?”라는 제목의 기사들이 신문을 장식했습니다.

지적 노동과 척박한 대지에 뿌리를 박는 농업 노동 사이에 서 있는 당신! 1970년대 중반 모국인 영국을 떠나 프랑스 오트사부아주 마을에 정착해서 땅을 일궈 감자를 심고, 가을엔 건초를 만들어 헛간에 쌓는 일을 했지요. 도시 문명이 주는 안락함과 편의성에 오랫동안 길들여진 사람은 그 고되고 단순한 노동을 감히 감당하지 못합니다. 물론 나도 월트 휘트먼의 시를 사랑하고, 가끔 깊은 침묵 속에 펼쳐진 밤하늘의 별자리를 올려다보며 우주적 경이로움에 빠지긴 합니다만, 당신과 견주자면 우유부단하고 게으르며 회색의 영혼과 무른 의지를 가진 사람이지요.

당신은 어디선가 우리 삶이 어떤 합의된 규칙성에 의존한다고 썼어요. 출생과 죽음, 과거와 미래 사이엔 사회적으로 합의된 예측 가능한 규칙성과 예측할 수 없이 갑작스럽게 끼어드는 규칙성이 뒤섞입니다. 연애와 결혼, 병역 의무, 혹은 여러 우연의 일들, 갑작스런 질병이나 사건들이 모여서 하나의 생을 이루지요. 당신은 그 규칙성에 대해 이렇게 덧붙였지요.

“매일 시장에 신선한 과일이 들어오고, 밤이면 가로등에 불이 켜지고, 편지를 앞문 밑으로 밀어 넣고, 성냥갑 속의 성냥은 모두 같은 방향으로 넣고, 라디오에선 음악이 흐르고, 낯선 사람들끼리 미소를 주고받는 것들이, 모두 그런 습관으로 설명이 되죠.”

그 합의된 규칙성을 삶의 리듬이라고 말해도 될까요? 그래요. 우리를 끌고 나가는 것은 죽은 이들과 아직 태어나지 않은 태아 사이에서 여러 기념일들과 잠든 아이의 고요한 얼굴 같은 삶의 맥동을 품고 흐르는 일상의 리듬입니다. 당신은 낮밤을 응시하고 사람들 사이에서 웃고 일하면서 체험의 전 영역을 일상의 리듬으로 받아내며 책을 썼겠지요. 당신이 쓴 책들을 읽으며 얼마나 많은 이들이 새로운 깨달음을 얻고 생을 바로 세웠을까요!

지금 여기 시간은 당신이 살아보지 못한 미래입니다.

밤하늘 가득한 별자리 아래서 쓴 이 편지는 미래가 과거에게 보내는 것이지요.
부디 평안하시길 빕니다.

장석주
전업 작가. 파주에 살며, 음악과 산책을 좋아한다. 주로 글을 쓰거나 인문학 강연을 한다. 197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철학자의 사물들》 《이상과 모던뽀이들》 《마흔의 서재》 《일상의 인문학》 《호젓한 시간의 만에서》 등과, 아내인 박연준 시인과 함께 《우리는 서로 조심하라고 말하며 걸었다》 《내 아침 인사 대신 읽어 보오》를 썼다.


박연준 | 결국, 이야기꾼으로 사는 일

일요일 오전, 좋아하는 카페 2층 자리에 앉았습니다. 아무도 없네요. 속치마처럼 얇은 커튼이 창문을 반쯤 가린 풍경, 창밖으론 목련이 헤픈 웃음처럼 벌어져 있고요. 벌어진 목련은 누군가의 입속 같아서 골똘히 바라볼 수 없게 하지요. (당신이 어느 소설에서 사랑을 나누는 연인의 몸짓을 벌어진 튤립에 빗대 묘사한 대목이 생각나요. 정확해서 놀라운 묘사였어요. ‘정확함’은 문학의 필수 조건이죠.) 가끔 골목으로 들어서는 사람이 보이고, 피아졸라의 선율이 흘러요. 창가에 앉아 이 편지를 씁니다. 시작하기 어렵더군요. 오래 애정해온 이에게 새삼 편지를 쓰기에 이 공간(종이)은 너무 작다는 생각, 무슨 말을 하든 모자라리란 생각, 말을 늘어놓는 일이 부질없다는 생각…. 그저 죽은 당신이 잠깐 이리로 와 제 옆에 앉아, 고요한 카페 안 분위기를 같이 나눈다면 좋겠단 생각이 들었어요.

존, 지구에 작가가 몇 명이나 될 것 같아요? 이미 작가이면서 정체성을 의심하는 자도 있고, 정식 작가는 아니지만 매일 쓰는 삶을 살고 있는 이도 있을 테니, 답하기 어렵겠죠. 제 생각에 의지를 갖고 지속적으로 무언가를 쓰는 사람은 모두 작가인 것 같아요. 각설하고, 저는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작가 중, 당신을 가장 좋아한다는 말을 해야겠어요. 좀 감동적이지 않은가요? 당신이 머무는 곳(사후 세계가 있다면)이 잠시 환해지지 않았나요? 매우 지적인 동시에 매우 따뜻할 수 있는 사람은 당신이 유일해요.

편지를 쓰는 동안 당신이 곁에 있다고 상상해 봅니다. 《여기, 우리가 만나는 곳》 서문에 당신이 이렇게 썼잖아요.

“죽은 이들이 결코 우리 곁을 떠나지 않는다는 건 여러분도 나만큼―아니 어쩌면 더―잘 알고 계십니다.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는다면 망자들은 어떻게든 우리를 도와주려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마땅히 귀를 기울여야 하죠. 그렇지 않은가요?(겉으로야 아닌 척하더라도 말이죠.)”

단순히 떠도는 영혼으로서 죽은 이들을 말하는 게 아니란 걸 알아요. 당신이 제게 그렇듯, 죽은 사람은 영영 사라진 사람이 아니죠. 종종 그들의 이야기가 들려요. 그들이 우리를 돕죠. 저는 당신이 써놓은 이야기에 둘러싸여 시간을 보내는 걸 좋아합니다. 당신은 시, 소설, 그림, 에세이, 미술평론, 사회평론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지만 스스로를 ‘이야기꾼’이라 칭하고, 그렇게 불리길 바란 사람이지요. 당신이 어떤 글을 쓰든 그건 그저 ‘이야기’예요. 어렵고 까다로운 이야기를 쓸 때조차, 당신은 그저 이야기하는 사람이죠. 이쪽을 향해 이야기를 내미는 사람. 말로 건너오려는 사람. 목소리와 어조를 얼굴로 삼으면서요.

“이야기에는 두 가지 범주가 있다. 보이지 않는 것과 숨은 것을 다루는 이야기와, 드러난 것을 노출시키고 보여 주는 이야기. 나는 그 둘을―나만의 특별하고 물리적인 의미로―내향적 범주와 외향적 범주라고 부른다. 둘 중 오늘날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좀 더 예리하게 다룰 수 있는 범주는 어느 쪽일까? 나는 첫 번째라고 믿는다.” - 《벤투의 스케치북》

당신이 나누어놓은 이야기의 범주에서, 저는 어느 쪽 작가인가를 생각해보았어요. 맞아요. 저는 확실히 “보이지 않는 것과 숨은 것을 다루는 이야기”를 쓰는 사람이에요. 당신이 언젠가 이런 말을 한 적 있잖아요? 당신은 말해지지 않으면 끝내 드러나지 않을 위험이 있는 이야기, 보이지 않는 ‘틈’에 관해 쓰는 작가라고요. 그러니까 보려고 애쓰지 않으면 볼 수 없는 것, 그늘처럼 어두운 것, 가려져 있는 것, 빛과 빛 사이에 고인 어둠 같은 것을 당신은 보는 사람인 거죠. 당신의 글엔 자본주의 잣대에서 약자로 불리는 사람들이 주로 등장해요. 이민자, 노인, 동물, 여성, 가난하고 순박한 자들, 예술가들이요.

존, 어떤 작가가 되느냐는 무엇을 ‘겨냥’해 보느냐에 의해 판가름 나는 걸까요? 어디에 시선을 두고, 어떻게 그리는지가 중요하겠죠? 당신은 이야기에 그림을 불러오고, 시를 걷게 하고, 손가락으로 풍경을 더듬듯 묘사하죠. 느리고 꼼꼼하게. 마치 손에 눈이 달려 있다는 듯이. 당신은 몸으로 듣고 손으로 보는 사람 같아요. 그때 저는 당신의 글에서 사랑을 느낍니다. 대상을 향한 사랑, 보이는 것만 보지 않는 자의 투시력, 안과 뒤를 주시하는 시선, 낮고 정확한 목소리, 말과 침묵 사이 아슬아슬한 균형. 때문에 당신이 쓴 소설은 빨리 읽을 수가 없어요. 누군가는 밀도를 견디지 못하고 튕겨져 나올 수도 있겠죠. 작품에서 서술자인 당신은 이야기의 주도자가 아니기 때문이에요. 당신은 바닥의 풀 한 포기처럼, 풀의 입장에서 풍경을 그려요. 주장하지 않지요. 밖에서 안으로 찬찬히 시선을 옮길 뿐이에요. 어느 곳에선 너무 느리고, 어느 곳에선 아예 움직이지 않아요. 반복도 자주 사용하죠. 저는 당신이 한 번 쓴 문장을 뒤에서 다시 쓸 때 좋아요. 당신이 같은 작품에서 여러 번 사용한 문장을 볼까요?

“우리 같은 드로잉을 하는 사람들은, 관찰된 무언가를 다른 이에게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계산할 수 없는 목적지에 이를 때까지 그것과 동행하기 위해 그림을 그린다.” _《벤투의 스케치북》

당신도 분명히 그럴 때가 있으리라 생각하는데, 작가도 쓰기 싫을 때가 있잖아요. 한마디도 하고 싶지 않을 때. 너무 많은 말을 해온 것 같아 거북할 때, 혹은 피로할 때. 제 경우 시를 쓰고 싶은데 산문을 써야 할 때가 있고, 몸이 산만한데 정신을 붙들고 억지로 글을 써야 할 때가 있어요. 우리는 아마추어가 아니니까, 그럴 때도 그냥 쓰죠. 닥치고 써요. 약속이 돼 있으니까요. 그럴 때 저는 위의 문장을 여러 번 읽고 시작해요. 규칙처럼. 드로잉할 때 당신의 마음과 자세를 빌려와요. 관찰된 무언가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은 카메라가 잘하겠죠. 그보다 정확할 수 없으니까요. 그러나 존, 당신의 말처럼. 창작자는 관찰된 무언가를 그대로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계산할 수 없는 목적지에 이를 때까지 그것과 동행하기 위해” 움직이는 자예요. 만약 제가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 엄마와 아이에 대해 써야 한다면, 저는 두 사람을 둘러싼,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보려고 애쓸 거예요. 그게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더듬더듬 만져보며, 목적지(글의 완성)에 다다를 때까지 “동행”할 거예요. 작가는 자기가 전하는 이야기와 끝까지 동행하는 자여야겠죠. 당신의 말대로 이야기꾼은 “듣는 사람”이어야 하고요.

세상에서 제가 어떤 위치에 서야 할지 모를 때가 있어요. 아니, 모른다는 건 솔직하지 못하네요. 두려울 때가 있다고 정정할게요. 그때 당신이라면, 뭐라고 말해줄까 상상해요. 그리고 용기를 내죠. 당신이 ‘한국 독자를 위해 그린 파슬리’ 그림을 자주 들여다봐요. 저는 당신이 제 가장 친한 친구라고 느껴요. 부디 제가 무언가를 쓸 때 곁에 머물러주세요. 지금처럼요.

마음속 깊은 곳에서 사랑을 전합니다.

안녕.

박연준

파주에 살며, 일주일에 세 번 발레를 배운다. 창문, 숲, 기러기를 좋아한다. 2004년 ‘중앙신인문학상’을 통해 등단했다. 시집으로 《속눈썹이 지르는 비명》 《아버지는 나를 처제, 하고 불렀다》 《베누스 푸디카》 《밤, 비, 뱀》이 있고, 산문집 《소란》 《밤은 길고 괴롭습니다》 《인생은 이상하게 흐른다》 등을 썼다.


/ 2022.03.05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