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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부부가 예술가에게 보내는 편지] (9) 시인 페소아(Fernando Pessoa)에게! 당신은 왜 그토록 많은 이명(異名)이 필요했나요? (2022.03.05)

푸레택 2022. 3. 5.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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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페소아(Fernando Pessoa)에게

당신은 왜 그토록 많은 이명(異名)이 필요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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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부부가 예술가에게 보내는 편지] (9) 시인 페소아(Fernando Pessoa)에게!

당신은 왜 그토록 많은 이명(異名)이 필요했나요?

70여 개도 넘는 이명(異名) 속에 숨어 활동한 당신은 늘 자아의 다중성 속에서 사유하고 상상했겠지요.
이명은 자기 얼굴(정체성)을 가리는 일종의 ‘가면’입니다.
당신은 이명이란 가면을 쓰고 ‘광대극’을 벌인 것이지요.
장석주

당신의 모든 문장에는 시가 박혀 있어요.
빠지지도, 녹지도, 흘러내리지도 않는 시의 파편이 박혀 있습니다.
저는 당신이 발굴해낸 문장을 숭배합니다.
당신이 쓴 - 엄밀히 말하면 당신의 이명(異名)인 베르나르두 소아르스가 쓴 - 《불안의 책》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무릎이 꺾입니다.
박연준

장석주 | 지나가라, 새여! 그리고 내게 지나가는 법을 가르쳐다오!

이름은 곧 우리 존재의 거푸집이자 요람, 본질을 육화한 가면! 우리는 늘 이름으로 호명되며, 이름으로 살아가지요. 한 이름으로 살면서 이름에 얹힌 운명을 수납합니다. 이름이란 존재의 형질이 굳어진 하나의 주문(呪文)이자 불가피한 운명일 겁니다. 삶이란 그 이름 안에서 치르는 수많은 전쟁! 어쩌면 ‘나’를 빚은 것은 그 이름 안에서 치른 무수한 전쟁들이겠지요. 우리 영욕(榮辱)은 늘 그 이름과 함께할 테니까요.

“나는 얼마나 많은 영혼을 가졌는지 몰라”라고 말하는 리스본의 영혼, 그건 페르난도 페소아(Fernando Pessoa, 1888~1935), “숨을 거둘 때까지 하루도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다는 당신을 수식하는 표현이지요. 70여 개도 넘는 이명(異名) 속에 숨어 활동한 당신은 늘 자아의 다중성 속에서 사유하고 상상했겠지요. 왜 그토록 많은 이명이 필요했을까요?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라는 노래가 있고, 셰익스피어의 희곡 대사 중에 “내가 누구인지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라는 말도 있지요.

내 안의 ‘나’, 흔히 자아라고 부르는 것은 복잡성을 품고 있기에 그만큼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자아의 복잡성은 이 자아가 자주 모습을 바꾸기 때문이지요. ‘나’는 타인과 구별되는 단일한 경험의 주체, 과거의 경험을 통해 빚어진 성격과 정체성의 주체, 자기 진로를 결정하는 자아실현의 주체를 가리켜요. 당신은 자기 안에 낯선 자아들이 들끓고 있음을 예민하게 인지했습니다. 당신의 자아는 분열 속에서 새롭게 나타나는 “예상치 못한 불청객”이었지요.

《불안의 책》으로 널리 알려진 당신은 1888년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태어났습니다. 다섯 살 때 아버지가 죽은 뒤 어머니가 더반 주재의 영사와 재혼하자 당신은 가족과 함께 리스본을 떠나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성장했어요. 18세 때까지 문학청년으로 성장해 영어 교육을 받으며 포르투갈어보다 영어로 글을 쓰는 일에 적응했지요. 1905년 포르투갈로 돌아와 리스본대학에 입학하지만 곧 그만두고 도서관 등지에서 영미문학을 포함한 다양한 독서를 하며 지냈지요.

1907년 미국인 회사에 인턴으로 입사하고, 1911년 세계문학전집 번역에 참여했습니다. 당신은 출판사 편집자의 초청으로 영국으로 건너가 번역 작업을 계속해달라는 요청을 받지만 거절한 뒤 1912년 포르투갈의 《아기아》라는 문학잡지에 비평을 기고하면서 작가로서 첫발을 내딛지요. 1915년 동료들과 함께 포르투갈 문학의 모더니즘 흐름을 이끈 잡지 《오르페우》를 창간하지만, 이 잡지는 단 2호만을 발간하고 3호를 준비하다가 돈줄이 막혀 단명하고 말았어요.

당신은 무역회사에서 무역 서신을 번역하는 일로 생계비를 버는 한편 시, 소설, 희곡, 평론, 산문 등을 가리지 않고 썼습니다. 당신은 포르투갈어로 출간한 시집 《메시지》(1934, 리스본)를 남기고, 1935년 불과 47세의 나이에 간경화로 세상을 떠났지요. 당신의 트렁크에는 모국어인 포르투갈어와 영어 그리고 프랑스어로 쓴 시 원고들이 가득 들어 있었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가면을 쓰고 살까요? 이름은 우리 영혼이 쓰고 있는 가면입니다. 세상에 없는, 혹은 미지의 존재에게 이름을 주고 호명할 때 또 다른 존재의 세계가 열리겠지요. 세상에 없는 존재에게 이름을 부여할 때 그 이름으로 부를 수 있는 존재를 중심으로 한 가상의 세계가 펼쳐집니다. 하나의 이름에 갇힌 채 사는 것의 권태나 환멸 때문일까요?

어렸을 때 이명을 지어 노트에 뭔가를 잔뜩 끼적인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이되 나 아닌 자의 삶을 살아보려는, 내 안에 숨은 다중의 삶에 대한 희망, 상상으로 무한 확장된 삶에 대한 욕망이 불거진 것이었을까요. 이명은 다중인격의 페소아, 자아 확장을 꾀하는 페소아, 수많은 자아의 환영들, 복수(複數)의 페소아를 가리키는 기호겠지요. 이명을 차용해 시를 쓴 것은 타자의 삶을 살고 싶다는 무의식의 욕망이 부추긴 것, 또한 ‘나’에게서 벗어나 또 다른 도주선을 타려는 욕망이었겠지요.

내 안에서 낯선 영혼들이 출몰할 때마다 스스로가 낯설어지는 경험은 누구나 겪습니다. 우리 자아는 끊임없이 변하고, 자아는 단일한 의미의 존재로 포획되지 않지요. 이 낯선 이방인들, 자아 안에 있지만 분열하는 이것으로 인해 우리는 정체성의 혼란과 위기에 직면해요. 페소아, 당신은 이명뿐만 아니라 그 이명에 맞는 전력(前歷), 직업, 문체, 특징, 별자리까지 가공해냈어요. 당신에게서 나왔으되 당신과는 다른 인물인 이명 시인은 가상의 세계를 사는 새로운 존재의 발명이겠지요. 페소아의 페소아의 페소아의 페소아의… 분신들이라니! 당신에게 이명의 기원은 어린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신은 왜 그토록 많은 이명이 필요했을까요? 당신은 어린 시절부터 이명을 만들어 쓰는 놀이에 빠지곤 했지요. 이명은 자기 얼굴(정체성)을 가리는 일종의 ‘가면’입니다. 당신은 이명이란 가면을 쓰고 ‘광대극’을 벌인 것이지요. 1914년 3월 8일 알베르투 카에이루라는 이명 시인을 발명하고, 그 이름으로 서른 몇 편의 시를 단숨에 써낸 뒤 그 심경을 “말로는 형언할 수 없는 일종의 황홀경”이라고 했어요. 양을 쳐본 적이 없음에도 “내 영혼은 목동과 같아서,/바람과 태양을 알고/계절들과 손을 잡고 다닌다”라고 노래하는 목가적인 시인을 자기 안에서 불러낸 것이지요. 자연이건 사물이건 눈을 뜨고 보는 게 중요합니다. 본질은 심연에 숨어 있는 게 아니라 차라리 표면에 있기 때문이지요. 당신은 안 보이는 신은 믿지 않지만, 신이 꽃이고 나무고 언덕이고 태양이고 달이라면, 당신은 분명 신을 믿는다고 말했지요.

또 다른 이명 시인 알바루 드 캄푸스는 “기술 전성시대를 시적으로 해석할 임무를 부여받은 도취된 모더니스트”였지요. 그는 산업화 시대의 총아인 기계에 주목하며 “전깃불과 기계들”에 인간 영혼을 겹쳐보며 상상력의 날개를 펼쳤어요. “아, 엔진이 하는 것처럼, 내 전부를 표현할 수 있다면!/기계처럼 완전해질 수 있다면!” 캄푸스란 이름은 가장 오랫동안 당신과 함께하면서 “미친 쌍둥이 형제”라고 불렸지요. 당신은 “이따금 상상 속에서,/내가 어린 양이 되기를 소망”하고, 언덕배기에 흩어져 있는 양 떼와 더불어 행복해지기를 갈망한 목가적인 시인 알베르투 카에이루와 기계 문명에서 황홀경을 느끼는 알바루 드 캄푸스 사이에서 분열하고 분화했습니다. 이명들은 당신 내부에서 태어나 자아의 완결성, 통합성, 일관성을 부정하며 저마다 다른 생각, 다른 삶을 꿈꾸는 시인들이지요. 당신은 말합니다. “그들은 내 안을 지나간다. 그들은 내 생각들이 아니라, 내 속을 지나가는 생각들이다”라고!

장석주
전업 작가. 파주에 살며, 음악과 산책을 좋아한다. 주로 글을 쓰거나 인문학 강연을 한다. 197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철학자의 사물들》 《이상과 모던뽀이들》 《마흔의 서재》 《일상의 인문학》 《호젓한 시간의 만에서》 등과, 아내인 박연준 시인과 함께 《우리는 서로 조심하라고 말하며 걸었다》 《내 아침 인사 대신 읽어 보오》를 썼다.


박연준 | 생각을 넘어 감각하기, 날아가기

페소아, 한국에는 ‘장마’라는 게 있습니다. 여름철 몇 날 동안 줄곧 내리는 비, 혹은 비 내리는 기간을 뜻합니다. 사계절이 뚜렷한 우리나라에선 유일한 ‘우기(雨期)’가 되는 셈이지요. 올해 장마는 유난하네요. 길고 거세요. 매달리는 사람처럼 집요하고, 멈출 줄을 모르네요. 당신은 내리는 비를 앞에 두고 이렇게 쓴 적이 있지요.

“나는 모든 것에 기대듯이 유리창에 기대서서 깨어 있는 채로 자는 중이다.”1)

저 또한 비를 보며 종일, 깨어 있는 채로 자고 또 잤습니다. 위에서 아래로 쏟아지는 빗줄기, 있으면서 없(어지)는, 흐르면서 허공에 멈춰 있는, 길고 축축한 환영….

페소아, 저는 지금 비를 핑계 삼아 당신에게 ‘권태’를 얘기하는 거예요. 이따금 무기력하게 있는 저를 발견하거든요. 한가하거나 심심하단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지요. 할 일은 많고, 시간에 쫓기고, 마음은 불안한데 그 와중에 권태를 느낍니다. 당신은 권태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죠?

“권태…… 그것은 생각 없이 생각하는데 생각하는 일의 피곤함이 따르는 것이다. 느낌 없이 느끼는데 느끼는 일의 괴로움이 따르는 것이다. 원하지 않으면서 원하는 것인데 원하게 만드는 일에 수반되는 구역질이 같이 오는 것이다. (중략) 권태…… 어쩌면 이것은 우리가 영혼을 신뢰하지 않았기에 영혼이 느끼는, 아주 깊은 곳에 있는 불만, 우리 내면에 있는 슬픈 어린아이가 갖고 싶은 신성한 장난감을 사주지 않았다고 느끼는 절망일 것이다.” - 《불안의 책》, 341쪽

권태에 대한 당신의 표현이 정확해서, 입을 다물 수가 없습니다. 생각 속에 생각이 없고, 느낌 속에 느낌이 없는데, 그 일들을 수행할 때의 고통만은 자명한 것! 권태! 우리가 영혼을 신뢰하지 않아서 영혼이 느끼는 깊은 불만이라니, “나 자신이 지겨워”지는 일이 권태가 아니고 무엇이겠어요? 그건 당신이 말한 ‘감정의 과식’ 행위를 한 때의 증상과도 비슷할까요? 무엇도 하기 싫고 감각은 둔해지며 피로해서 자고 싶은데, 잠 속에서도 잠들고 싶은 상태.

“나는 누구의 소유도 아닌 농원의 나무 아래에 누운 모든 거지들의 모든 낮잠이다.” - 《불안의 책》, 342쪽

이 놀라운 문장 앞에서 저는 납작 엎드립니다. 당신의 모든 문장에는 시가 박혀 있어요. 빠지지도, 녹지도, 흘러내리지도 않는 시의 파편이 박혀 있습니다. 그때의 지리멸렬한 감정, 환멸에 빠진 자신을 “모든 거지들의 모든 낮잠”이라고 표현하다니! 저는 당신이 아니라, 당신이 발굴해낸 저 문장을 숭배합니다. 당신이 쓴―엄밀히 말하면 당신의 이명(異名)인 베르나르두 소아르스가 쓴―《불안의 책》 페이지를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무릎이 꺾입니다. 페이지에 적힌 시, 진실을 알아채는 능력 때문이기도 하고 그 때문만은 아니기도 합니다. 그보다 당신의 글에 ‘정확한’ 발견과 ‘깨끗한’ 선언이 조화롭게 담겨 있어서죠.

당신의 문장을 읽을 때면, 이런 풍경이 떠오릅니다. 아주 커다란 실험실이 있습니다. 그곳엔 백 개가 넘는 창문이 있습니다. 빛이 충분히 들어오는 곳이지요. 공기와 빛, 책상과 의자, 연필과 종이가 실험도구의 전부인 곳입니다. 흰 가운을 입은 당신과 당신들―당신에게서 쪼개져 나온 수많은 당신의 분신들(당신은 평생 일흔 명이 넘는 이명(異名)의 작가들을 만들어내고, 그들에게 각기 다른 인격을 부여해 글을 쓰게 했지요)―이 그곳에 서거나 앉아 있습니다. 몇몇은 걷고, 몇몇은 웅크려 있습니다. 누군가 무언가를 발견하면 종이에 발견한 걸 적습니다. 다른 누군가가 무언가를 발견하면 역시 종이에 적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이 단순한 일이 반복되고, 당신들의 문장은 계속 쌓여갑니다. 매일, 느린 속도로, 퀼트처럼.

제가 하는 상상에서 당신의 공간이 ‘실험실’인 까닭은 무엇일까요? 어쩌면 당신이 구할 수 없는 답, 정답이 없는 문제에 골몰하는 사람이기 때문인지도 모르지요. 당신의 글은 명확하고 아름다워 이견을 내세우고 싶지 않게 합니다. 읽는 순간 다른 생각은 순식간에 잊힙니다. 맞아요, 페소아. 당신의 문장은 생각을 사라지게 해요. 감각만 남깁니다. 사랑만 남겨두지요.

“내겐 철학이 없다, 감각만 있을 뿐……
내가 자연에 대해 얘기한다면 그건, 그게 뭔지 알아서가 아니라,
그걸 사랑해서, 그래서 사랑하는 것,
왜냐하면 사랑을 하는 이는 절대 자기가 뭘 사랑하는지 모르고
왜 사랑하는지, 사랑이 뭔지도 모르는 법이니까……

사랑한다는 것은 순진함이요,
모든 순진함은 생각하지 않는 것……”
- 《양 떼를 지키는 사람》 중

이 시를 처음 읽었을 때 잠시 얼어붙었습니다. 전적으로 동의하기에요. 당신이 ‘알베르투 카에이루’라는 이명으로 쓴 시지요. 당신은 카에이루를 존재의 이상향으로 생각했다지요? “내 안에서 태어난 나의 스승”이라고 칭한 전원시인 카에이루. 그가 쓴 〈양 떼를 지키는 사람〉을 “내가 쓴 것 중 최고”라고 자평했다는데, 저 또한 당신의 시 중 가장 좋아하는 시입니다.

시는 일의 원인과 결과를 찾아내고, 논리를 세우는 데서 벗어나 있지요. 시는 논리를 가뿐히 뛰어넘어, 다른 차원으로 가버리니까요. 당신의 말대로 생각은 순진함을 배반하는 행위예요. “사랑한다는 것은 순진함이요, 모든 순진함은 생각하지 않는 것”, 물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게 바보 천치가 되어야 한다는 뜻은 아닐 거예요. 그보다 감각을 억압하고 행동을 배제한 채, 존재의 굴레로 작용하는 생각을 벗어나자는 거지요. 생각을 넘어 감각하기, 날아가기!

페소아, 종종 무력할 때, 비에 발이 묶여 있을 때, 스스로가 지겨워질 때 공책에 적어보는 문장이 있습니다.

“몸을 씻듯 운명도 씻어주고, 옷을 갈아입듯 삶도 갈아줘야 한다.” - 《불안의 책》, 59쪽

어린아이처럼 이 문장을 곱씹어 읽어봅니다. 속에 고인 구정물을 버리고, 영혼을 깨우고, 새로 말간 운명을 해 입은 것처럼 개운해지거든요. (고백하건대 당신은 제 영혼의 청소부입니다.)

안녕.

박연준
파주에 살며, 일주일에 세 번 발레를 배운다. 창문, 숲, 기러기를 좋아한다. 2004년 ‘중앙신인문학상’을 통해 등단했다.
시집으로 《속눈썹이 지르는 비명》 《아버지는 나를 처제, 하고 불렀다》 《베누스 푸디카》 《밤, 비, 뱀》이 있고, 산문집 《소란》 《밤은 길고 괴롭습니다》 《인생은 이상하게 흐른다》 등을 썼다.

1) 《불안의 책》, 페르난도 페소아, 문학동네, 57쪽

/ 2022.03.05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