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숲] 삶의 지혜

[이지현의 티 테이블] 더 이상 성장할 수 없었습니다 (2022.02.26)

푸레택 2022. 2. 26. 15:26

[이지현의 티 테이블] 더 이상 성장할 수 없었습니다

두 남녀의 현실은 “결혼식을 올리고 그 후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고 끝나는 동화와는 달랐다. ‘세기의 이혼’으로 불리는 빌 게이츠와 멀린다 게이츠의 파경 소식은 그들을 롤 모델로 삼은 많은 이들을 적잖이 실망하게 했다. 부부의 이름을 딴 재단을 만들어 세계 빈곤 퇴치에 공헌하면서 세계적인 모범 부부로 불렸기에 더욱 그랬다. 무엇이 결혼 생활 27년의 종지부를 찍게 했을까.

이혼 원인에 관한 이야기들이 여러 매체에서 쏟아지고 있지만, 모든 것을 떠나 이들이 공동성명에서 밝힌 “더 이상 부부로서 함께 성장할 수 없다”란 문장에 밑줄을 그어 본다. 말하기 껄끄러운 여러 가지 문제를 포장한 한 줄이지만 ‘부부 사랑의 본질’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사람들은 가정을 베이스캠프에 비유하곤 한다. 등산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좋은 베이스캠프가 필요하다. 그곳에 머물며 양식을 공급받고 다시 다른 정상을 찾아 나선다. 등산에 성공하는 사람들은 적어도 실제로 산에 오르는 시간만큼 베이스캠프에서 준비하는 시간을 보낸다. 그들의 생존은 견고하고 잘 정비된 베이스캠프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정신과 의사이자 작가인 스콧 펙은 저서 ‘아직도 가야 할 길’에서 가정을 이루는데 남녀 모두 전형적인 문제를 갖고 있다고 말한다. 남성의 문제는 모든 에너지를 산에 올라가는 데 쓰고 베이스캠프인 가정은 돌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휴식과 기분 전환을 위해 돌아왔을 때 가정이 완벽한 상태로 있기를 바라지만, 돌보지 않아 황폐해진 베이스캠프뿐이란 것. 반면 여성은 베이스캠프를 산 정상 그 자체로 본다. 남편의 성취욕이나 갈망, 가정생활 밖의 경험 등을 공감하지 못한다. 스콧 펙은 이런 남녀의 갈등이 부부 사이를 숨 막히게 하고 어리석은 관계로 만든다고 말했다.

행복한 가정은 개인의 삶에 가장 많은 영향을 준다. 개인의 자존감을 높여주고,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학문적 수행이 더 우수하고 심리적으로 잘 적응하며, 실패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적다. 따라서 행복한 부부가 갖는 경쟁력은 말할 수 없이 크다. 부부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돈, 성공, 건강, 아름다움, 지능, 권력 등의 주관적인 행복과는 별로 관계가 없는 듯하다. 부부 사이에 어느 쪽은 옳고 어느 쪽은 그른 것이 아니고 단지 서로 다를 뿐이라는 말은 이제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이다. 둘이 하나가 되려고 노력하지 말고, 각자가 돼 우리가 돼야 한다. 부부의 연합은 서로 분리된 개체라는 것을 깨달을 때 더 풍요로워진다.

진정한 사랑은 항상 상대를 나와 다른 정체성을 가진 사람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개별성을 존중하지 못할 때 불필요한 갈등을 겪기도 한다. 시인이자 철학자인 칼릴 지브란은 현악기의 줄들이 같은 음악을 울려도 서로 떨어져 있듯이, 부부 역시 서로의 세계를 침범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또 떡갈나무와 사이프러스 나무가 서로의 그늘 속에서 자랄 수 없듯, 부부는 너무 가까이 서지 말라고 당부한다.

“당신 부부 사이에 빈 공간을 만들어서/ 그대들 사이에서 하늘의 바람이 춤추게 하라/ 서로 사랑하라! 그러나 서로 구속하지는 마라… 각자의 빵을 주어라. 그러나 같은 덩어리의 빵은 먹지 마라… 현악기의 줄들이 같은 음악을 울릴지라도 서로 떨어져 홀로 있듯이/ 마음을 주어라 그러나 상대방의 세계는 침범해 들어가지 마라… 함께 서라. 그러나 너무 가까이 붙어 서지는 마라./ 사원의 기둥들은 떨어져 있어야 하며/ 떡갈나무와 사이프러스 나무는/ 서로의 그늘 속에서는 자랄 수 없기 때문이다.”(칼릴 지브란의 시 ‘결혼에 대하여’ 중)

흔히 그렇듯 외로움에 겁먹어 서로 하나가 되는 결혼을 추구한다면 훌륭한 결혼생활을 끌어내기 어렵다. 진정한 사랑은 서로의 개별성을 존중할 뿐만 아니라 서로 상실의 위험에 직면하면서까지 독립성을 길러주려고 애쓴다.

가정은 부부가 인생의 정상을 향해 걸어가는 데 힘이 되기 위해 존재한다. 남성과 여성 둘 다 가정을 돌봐야 하고, 둘 다 각자의 생에 도전해 나가야 한다. 진정한 사랑의 본질은 함께 성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사랑으로 영적인 성장도 이뤄야 한다. 산 정상에 오르는 고독한 여행은 혼자 해야 하는 일이며,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은 개인의 영적 성장이다. 그래서 “더 이상 함께 성장할 수 없다”는 말은 안타까운 고백이다.

이지현 종교부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출처 : 국민일보 2021.05.22

/ 2022.02.26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