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숲] 삶의 지혜

[김세원 칼럼] 여성 주례 도전기 (2022.02.26)

푸레택 2022. 2. 26. 15:21

[김세원 칼럼] 여성 주례 도전기

8월초 고등학교 친구로부터 아들 결혼식에 주례를 서달라는 제의를 받았다. 여자가 주례라니 말도 안된다고 몇 번이나 손사래를 쳤지만 친구 언니들까지 주례를 맡기는게 좋겠다고 했다는 말을 들으니 더 이상 사양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남편없이 온갖 역경을 딛고 외아들을 늠름한 청년으로 키워 결혼까지 시키게 된 자랑스런 친구를 도와주고 싶었다.

주례를 맡겠다고 하고 나니 당장 주례사가 걱정이었다. 여기저기 주례사 귀동냥을 하기 시작했다. 주례 경험이 있는 선배와 대학 동기들로부터 핵심이 될만한 대목들을 모았다. 본인이 했던 주례사 샘플을 보내준 선배도 있었다. 신랑신부와 미리 만나 얘기를 나눴다.

결혼식 1주일전 열린 대학친구 딸의 결혼식에 참석했을 때는 메모까지 하면서 주례사를 열심히 경청했다. 대략 7~8개의 주례사를 모으는데 성공했다. 다양한듯 하면서도 비슷비슷한 주례사들 가운데 여성 주례를 위한 내용은 없었다. 며칠 밤을 고민한 끝에 나만의 주례사를 작성했다.

예식장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컸다. 단상에 올라서니 의외로 떨렸다. 주례사만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혼인서약, 성혼선언문 낭독 같은 순서도 있었다. 두 사람의 앞날에 대한 무거운 책임감이 몰려왔다. 여성으로서 주례를 맡게 된 데에 대한 배경설명으로 주례사를 시작했다. 처음에 주례를 사양한 이유와 열흘간의 공백기를 거쳐 다시 맡게 된 이유를 설명했다. 여성이어서 상식에서 벗어나고 늘 가정보다 일을 앞세우는, 현모양처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왔기에 주례의 자격에 크게 미달돼 사양했지만 친구에게 진심어린 축하를 해주고 싶어서 이 자리에 서게 됐다고 말했다.

다음은 신랑신부가 처음 만나 결혼에 이르기까지 그간의 경위와 두 사람이 꿈꾸는 결혼생활의 비전을 하객들에게 전해주었다. 그리고 본격적인 주례사, 인생의 선배로서 해주고 싶은 세 가지를 말했다. 첫째는 결혼이란 60억 인구 중에서 잃어버린 나의 반쪽을 찾아내 평생을 함께 하기로 가족 친지 앞에서 공약하는 것인데 상대방이 모자라고 부족한 나를 채워 완전하게 만들어주는 나보다 나은 나의 반쪽이라는 사실이다. 인간은 원래 자웅동체였는데 갈수록 힘이 커지면서 오만해져 신의 자리까지 넘보게 되자 분노한 신이 절반을 갈라버리는 바람에 자신의 반쪽을 찾아 헤맨다는 그리스 신화 얘기를 덧붙였다.

두 번째는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라는 책 제목처럼 남자와 여자의 차이, 상황을 바라보는 방식과 반응, 문제해결 방식이 서로 다름을 말했다. 가령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 남자는 자신만의 동굴 속으로 깊이 숨어버리지만 여자는 자신이 느끼는 문제를 주위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한다. 남자는 혼자 동굴 안에서 스트레스의 원인을 찾아내고 해법을 찾고 나면 기분이 좋아지지만 여자는 누군가에게 자신의 문제를 솔직하게 터놓고 이야기해 상대방이 이를 공감해 주면 기분이 좋아진다.

마지막으로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중 ‘결혼에 대하여’의 마지막 구절을 낭독했다.

"서로의 마음을 주라. 그러나 서로의 마음속에 묶어 두지는 말라. (...) 함께 서 있으라. 그러나 너무 가까이 서 있지는 말라. 사원의 기둥들도 적당한 거리를 두고 서 있는 것 처럼, 참나무와 삼나무도 서로의 그늘 속에선 자랄 수 없으니..."

주례사를 하는 도중에 위기도 있었다. 신랑 어머니인 친구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 저도 모르게 울컥 눈물이 나왔다. 잠시 하던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준비해 간 주례사는 마쳤지만 다음 순서를 잊어버리고 말았다. 눈치 빠른 사회자가 ‘신랑신부는 신부댁 부모님을 향해 경례’ 대목을 대신해줘 무사히 식을 끝낼 수 있었다.

주례를 선 사실을 SNS에 올렸더니 주변의 반응이 뜨거웠다. 다른데서 요청이 들어오면 앞으로 계속할거냐는 질문이 많았다. 이왕이면 영어 주례사를 개발해서 국 영문 동시 주례에 도전하겠다고 큰 소리를 쳤다. 누가 알겠는가. 혹시 그리스 재벌 2세를 사위로 맞는 가정에서 ‘맘마미아’를 촬영한 섬에서 성대한 결혼식을 여는데 초대를 해줄지.

글=김세원 건국대 초빙교수, 에너지경제신문 2018.10.01

/ 2022.02.26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