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적군 묘지 앞에서 / 구상
오호, 여기 줄지어 누워 있는 넋들은
눈도 감지 못하였겠구나
어제까지 너희의 목숨을 겨눠
방아쇠를 당기던 우리의 그 손으로
썩어 문들어진 살덩이와 뼈를 추려
그래도 양지바른 두메를 골라
고이 파묻어 떼마저 입혔거니,
죽음은 이렇듯 미움보다도, 사랑보다도
더 너그러운 것이로다
이곳서 나와 너희의 넋들이
돌아가야 할 고향 땅은 삼십 리면
가로막히고, 무주공산(無主空山)의 적막만이
천만 근 나의 가슴을 억누르는데,
살아서는 너희가 나와
미움으로 맺혔건만,
이제는 오히려 너희의
풀지 못한 원한이
나의 바램 속에 깃들여 있도다
손에 닿을 듯한 봄 하늘에
구름은 무심히도
북(北)으로 흘러가고,
어디서 울려오는 포성(砲聲) 몇 발,
나는 그만 이 은원(恩怨)의 무덤 앞에
목놓아 버린다
- 시집 『초토의 시』 (청구문화사, 1956)
[감상]
이 시는 한국전쟁 당시 종군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연작시「초토의 시」15편 가운데 8번 째 작품이다. 시인은 동족상잔의 비극적 전쟁으로 생겨난 ‘적군 묘지’ 앞에서 이데올로기의 허울 아래 희생된 그들의 죽음을 애도하는 한편, 가톨릭 시인으로서 기독교적 윤리관에서 우러나온 사랑과 화해의 정신으로 민족 동질성의 회복과 평화통일에의 염원을 노래하였다. 특히 시에는 시인의 분단에 대한 비극적 인식이 극명하게 드러나 있다.
생존의 극한 상황인 전쟁 중에는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싸우던 원수 사이었지만, 가로막힌 휴전선으로 인해 넋조차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그들에게서 저주와 원한의 적이 아니라 동족으로서 연민의 정이 느껴질 뿐이다. 적에 대한 적대 의식이나 증오보다는 동포애와 인간애로부터 우러나오는 관용과 연민이 짙게 깔려있다. 인간의 생명은 무엇보다도 존엄한 것이기에 적군의 시체를 양지 바른 곳에 묻는 인도주의적 인간애가 발휘된 것이다.
적군 묘지에 묻힌 그들과 마찬가지로 북쪽 땅이 고향인 시인은 분단의 상징인 휴전선을 바라보면서 민족 분단의 고통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적군 병사들의 ‘풀지 못한 원한’을 그들만이 아닌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여 동일시하고 있다. 분단으로 인해 돌아가지 못하는 그들의 죽음 앞에서 그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기 위해서는 진정한 화해와 평화를 통해 하루빨리 통일이 이뤄져야 한다는 시인의 뜨거운 열망이 담겨 있다.
그리고 시인이 시를 쓸 당시의 '적군 묘지'는 전쟁 직후 전국토에 산재하고 있었으나, 사망한 적군이라도 정중히 매장해 분묘로 존중해야 한다는 제네바 협정에 따라 1996년 7월 우리 정부가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답곡리 산55 현재의 위치에 모아져 '북한, 중국군 묘지'로 조성하였다. 무덤 앞에는 비석 대신 1미터 높이의 흰색 각목으로 된 묘비가 세워져 있으며, 계급과 이름이 적힌 것은 20여기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모두 '무명인'으로 적혀있다.
연작시 ‘초토의 시’에서 ‘초토(焦土)’란 불타서 없어진 자리란 뜻으로, 여기서는 민족의 비극인 6.25동란의 흔적을 말한다. 구상 시인의 시는 전쟁의 비극과 참회, 형제애와 인류애를 내포하면서 분단의 아픔과 통일염원을 주요 테마로 하고 있다. 그 배경엔 크리스트교 신앙이 바탕 되어 늘 자기 참회로 귀결되는 특징이 있다. 그러나 그는 교회 안에 안주하기보다는 교회 현실에 고뇌하고 때로는 부조리한 현실에 노여워했던 번뇌의 시인이었다. (글=권순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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