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버지의 팔자 / 김나영
‘야들아, 나는 가만히 앉아서 먹고 자고 테레비나 보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 팔자가 상팔자다’ 던 아버지
그 좋은 팔자 2년도 지긋지긋했던 모양이네
온 식구들 불러 모아 놓고
사돈에 육촌아재까지 불러놓고
그것도 부족해서 내 친구들까지 죄다 불러놓고
큰 홀 빌려서 사흘 밤낮 잔치를 베푸시네
배포 큰 우리 아버지
우리에게 새 옷도 한 벌씩 척척 사주고
아버지도 백만 원이 넘는 비싼 옷으로 쫘-악 빼 입으시고
한 번도 타보지 못했던 리무진까지 타시고
온 식구들 대절버스에 줄줄이 태우고
수원 찍고 이천으로 꽃구경까지 시켜주시네
간도 크셔라 우리 아버지
이천 만원이 넘는 큰돈을
삼일 만에 펑펑 다 써버리고
우리들 볼 낯이 없었던지
돌아오시질 않네
잔치는 끝났는데…
아마도 우리 아버지 팔자 다시 고쳤나 보네
- 「계간 문예」 2011년 여름호
[감상]
현재 우리나라에 거주하고 있는 100세 이상 고령자는 1만5천 명으로 5년 전에 비해 6배 이상 늘었다. 그러니까 5년 전만 해도 2천 명 수준이었는데 이런 추세라면 이 수치는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날 전망이다. 특히 전북 장수군은 2만 명이 조금 넘는 인구 가운데 백세 이상의 어르신이 80명 가까이나 된다니 그 이름값을 톡톡히 하고 있다. 장수 비결로는 가장 먼저 절제된 식생활 습관을 꼽았고, 다음으로 낙천적인 성격과 규칙적인 생활 등을 내세웠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욕망을 줄여 안빈낙도하는 삶이장수에는 최고라는 말씀이다.
‘가만히 앉아서 먹고 자고 테레비나 보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 팔자가 상팔자’란 생각을 가진 ‘아버지’ 역시 낙천적인 성격만큼은 분명하신 듯한데, 왜 그렇게 서둘러 가셨을까. 시에 드러난 정보만으론 연세는 물론 다른 어떤 사정도 소상히 파악되지 않지만 정황으로 보아 외로움은 좀 타신 것 같다. 사실 나이 들면 외로움과 쓸쓸함만큼 고약한 건 없다. 고독을 잘근잘근 씹기엔 치아가 너무 허술하고 세상은 빡세게 돌아가고 있다.
외로움이 치매와 혈압 등 많은 질병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즉 외로움이 인체의 면역기능을 떨어뜨린다는 뜻이다. 특히 타인으로부터 소외되었다고 느낄 때의 뇌의 반응은 몽둥이로 두들겨 맞는 육체적인 고통과 버금간다고 한다. 외로움이 질병을 불러올 수 있다는 연구결과는 그동안 꽤 보고되었다. 중년 이후 외로움을 느끼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 보다 혈압도 높고 심혈관 질환으로 발전할 가능성도 높다고 한다.
‘그 좋은 팔자 2년도 지긋지긋했던 모양’이라는 시인의 진술로 미뤄봐서, ‘아버지’는 그리 쪼달리지 않은 경제 형편임에도 평균수명 100세 시대를 오히려 두렵게 생각하셨던 분 같다. '테레비'만 갖고는 그 외로움이 극복되지 않아, ‘사돈에 육촌아재까지 불러놓고, 그것도 부족해서 내 친구들까지 죄다 불러놓고’ 잔치 한판 거시게 벌였던 게다. 골골하고 외롭게 너무 오래 사느니 차라리 팔자를 고쳐 살고 싶으셨던 게다. 요즘엔 환갑은 물론 칠순잔치를 하는 이도 더물다. 그렇다고 팔순을 챙기는 경우도 잘 보지 못했으니 어느 집 할 것 없이 백세 아니면 세상 떠날 때나 이렇게 잔치상을 받는가 보다. (글=권순진 시인)
詩하늘 통신
시의 좁은 구멍으로 삶을 들여다 보고 세상과 넓게 사겨보기
blog.daum.net
'[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명시감상] '적군 묘지 앞에서' 구상 (2021.12.24) (0) | 2021.12.24 |
---|---|
[명시감상] '김현 묻던 날, 기억나지 그날? - 이성복에게' 황동규 (2021.12.24) (0) | 2021.12.24 |
[명시감상] '내 생에 복수하는 유일한 방법처럼' 이성복 (2021.12.21) (0) | 2021.12.21 |
[명시감상] '아버지의 등을 밀며' 손택수 (2021.12.21) (0) | 2021.12.21 |
[명시감상] '가재미' 문태준 (2021.12.21) (0) | 2021.12.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