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명시감상] '김현 묻던 날, 기억나지 그날? - 이성복에게' 황동규 (2021.12.24)

푸레택 2021. 12. 24. 12:28

■ 김현 묻던 날, 기억나지 그날? - 이성복에게 / 황동규

김현 묻고 돌아올 때, 그 장마 구름 잠시 꺼진 날,
우리는 과속을 했어, 60킬로 도로에서 100으로.
우리는 재빨리 도망치고 있었던 거야 추억에서.
단속하던 의경 기억나지?
의경치고도 너무 어려
우리의 복잡한 얼굴을 읽을 줄 몰랐어.
마침내 죽음의 면허를 따 영정이 되어
혼자 천천히 웃고 있는
웃고 있는 김현의 얼굴이 속절없이 아름다웠고
그 얼굴 너무 선명해서 우리는 과속을 했어.
경기도 양평의 산들이 패션쇼를 하려다 말았고,
딱지를 뗐고,
그 딱지 뗀 힘으로
우리는 한 죽음을 벗어났던 거야

- 시집『미시령 큰바람』(문학과 지성사, 1993)

[감상]

‘한글로 교육받고 사유한 첫 세대로서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일구고, 4.19의 체험으로 자유의 진정한 뜻을 찾아낸 그는 문학평론가, 불문학자, 서울대교수로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그는 살아 움직이는 상상력, 자유로운 사유, 섬세한 글쓰기로 우리의 문학과 지성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고, 고통스런 현실 속에서 행복에의 꿈을 좇는 참된 삶의 길을 보여주었다. 이제 그가 평생 정신의 고향으로 삼아온 이 고장에 삼가 비를 세워 그를 기린다.’

이는 1990년 6월 27일 49세로 세상을 떠난 김현을 기려 1995년 목포에 세워진 김현 문학비 제막 때 새겨진 글이다. 제자인 황지우 시인은 “1962년부터 1990년까지 한국문학은 김현 비평에 의해 축복받았다”면서 “선생이 돌아가신 뒤로는 문학이 재미가 없어졌다”고 심경을 피력할 만큼 김현은 한국문학의 구심점이자 이슈의 창출자였다. 김지하 시인은 “김현은 내 시를 읽어줄 유일한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25년 전 그의 죽음은 문단에 큰 충격과 슬픔을 안겼고, 문학평론가 한 개인의 죽음이 아닌 한국 문학 전체의 엄청난 손실로 받아들여졌다. 빈소에 모여든 문인들은 “우리는 이제 한국 유일의 독자를 잃었다”느니 “앞으로 백 년 동안 야만의 시대가 올 것이다”는 등의 말로 그 상실감을 표현할 정도였다. 당시 김현의 독보적인 위치를 설명해주는 말들이다. 황동규의 ‘김현 묻던 날’도 그 사로잡힌 상실감을 벗고자 신경질적으로 가속 페달을 쎄게 밟았을 것이다. 어린 의경에 의해 딱지가 떼였고, ‘그 딱지 뗀 힘으로’ ‘한 죽음’을 벗어나고자하였다.

김현 비평의 특징은 정교한 작품 분석과 함께 유려한 미문과 독창적인 문체에 있다. 대명사 '나'를 공적인 글에서 떳떳이 도입한 것도 김현에서부터이고, '놀라워라', '무서워라'와 같은 발랄한 삽입구를 유행시킨 것 역시 김현이었다. 본질적으로 비현실적인 상상과 허구의 문학은 쾌락을 주기보다는 고통스럽게 현실과 자아를 직시하게 만들고, 써먹을 수 없는 것을 써먹는 것이기에 ‘문학은 고통이고 꿈이다’라는 명제를 남겼다.

문학은 억압하지 않으며 다만 억압에 대해서 생각하게 만든다는 그의 지론은 현실참여에 소극적이라는 지적을 들어야했고, 그가 일군 ‘문지’ 또한 체제 순응적이란 비판을 받기도하지만 문학평론을 흥미로운 독자적 텍스트로 만든 것과 그의 자장 안으로 끌어들인 문학의 풍성함을 부정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김현의 모든 글들을 관통하는 그 대원칙은 지금도 ‘반포치킨’에서 유통되는 ‘말들의 풍경’이다. 5년 전 양평 가족 묘원에서 분당의 추모공원으로 유골이 옮겨졌는데, 어제 25주년 기일을 맞아 혹 그의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한 동료 후배문인들의 발길도 있었을까. (글=권순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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