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명시감상] '내 생에 복수하는 유일한 방법처럼' 이성복 (2021.12.21)

푸레택 2021. 12. 21. 14:35

■ 내 생에 복수하는 유일한 방법처럼 / 이성복

진해에서 훈련병 시절 외곽초소 옆 개울물에 흰 밥알이 떠내려 왔다 나는 엠원 소총을 내려놓고 옹달샘 물을 마시는 노루처럼 밥알을 건져 먹었다 물론 배도 고팠겠지만 밥알을 건져 먹는 내 모습을 보고 싶어서였다 나는 나를 비참하게 만들어 생에 복수하고 싶었다

매점 앞에서 보초 설 때는, 단팥빵 맛이 조금만 이상해도 바닥에 던지고 가는 녀석들이 있었다 달려드는 중대장의 셰퍼드를 개머리판으로 위협하고, 나는 흙 묻은 빵을 오래 씹었다 비참하고 싶었다 비참하고 싶은 나를 바라보고 싶었다 내 생에 복수하는 유일한 방법처럼

또 일병 달고 구축함 탈 때, 내게 친형처럼 잘해주던 서울 출신 중사가 자기 군화에 미역국을 쏟았다고, 비오는 비행갑판에 끌고 올라가 발길질을 했다 처음엔 왜 때리느냐고 대들다가 하늘색 작업복이 피로 물들 때까지 죽도록 얻어맞았다 나는 더 때려달라고, 아예 패 죽여달라고 매달렸고 중사는 혀를 차며 뒤도 안 돌아보고 내려갔다 나는 행복했고 내 생에 복수하는 것이 그렇게 흐뭇할 수 없었다

그리고 제대한 지 삼십 년, 정년퇴직 가까운 여선생님 집에서 그 집 발바리 얘기를 들었다 며칠 바깥을 싸돌아다니다 온 암캐가 갑자기 젖꼭지 부풀고 배가 불러와 동물병원에 갔더니 가상 임신이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내 얘기가 아니었던가 지금까지 세상에서 내가 훔쳐낸 행복은 비참의 가상 임신 아니었던가 비참하고 싶은 비참보다 더 정교한 복수의 기술은 없다는 것을, 나는 동물병원 안 가보고도 알게 되었다

- 시집 『아, 입이 없는 것들』 (문학과 지성사, 2003)

[감상]

50사단 훈련병 시절 집단으로 발가벗겨져 연병장에서 한 시간 내내 모기에게 쥐어뜯겼던 몸서리쳐지는 기억, 식사태도 불량으로 중간에 불려나간 전우의 남겨진 식판을 눈독 들였던 일, 상병 달고 헌병대 군기과 근무할 때 ‘우리 병과는 전쟁이 터져야 끗발을 날리는데 말이야!’ 과장의 말에 사병들은 화사하게 웃었지만 혼자 찡그렸다고 촛대뼈를 왕복으로 네 차례 까였던 일, 깨지면서 입술물고 째려봤다고 두 차례 더 걷어차인 기억 따위가 시인의 ‘비참’에는 미흡하지만 내게도 ‘아예 패 죽여달라’ 매달리고 싶었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나는 나를 비참하게 만들어 생에 복수’할 의사는 없었으며 따라서 흐뭇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제대한 지 삼십 칠년, 더 내려갈 바닥이 없다는 게 때때로 위안이었다. 내가 얼마나 무지한지, 가진 게 없는지. 더 잃을 게 없는지. 그래서 더는 추락할 곳 없는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무섭다는 것을 안다. 막다른 길을 등지고 사금파리로 자기 몸을 그을 때 세상이 자신을 더 이상 비참하게 만들지 않으리란 믿음. 뒤늦게 숨겨진 상처와 광기를 끄집어내고서야 생에 대한 복수를 시작할 수 있었다. 광기는 일종의 예지적인 재능이라고 한 '미셀 푸코'의 말에도 힘입은 바 컸다. 황체호르몬이 분비되면서 창자가 붓고 헛구역질이 나왔다. 삶이 힘들수록 ‘비참하고 싶은 비참’으로 존재의 증명을 위해 시를 읽고 시를 쓴다. 아니 쓸 것이다. 하지만 이 병이 다 나으면 시도 사라지리라. (글=권순진 시인, 2015)

◇ 이성복 시인(1952~ )

경북 상주 출생

나이 70세 (만 69세)
문학과지성 정든 유곽에서 등단(1977)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 학사(1978)
서울대학교 대학원 불어불문학 석사(1982)
서울대학교 대학원 불어불문학 박사(1990)
계명대학교 인문대학 문예창작과 교수

계명대학교 인문대학 문예창작과 명예교수
김수영문학상(1982)
소월문학상(1990)
제12회 대산문학상(2004)
제53회 현대문학상(2007)

이육사시문학상(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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