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따뜻한 소음 / 전향
잘나가는 대기업에서 근무하다
40대 초반에 명퇴하고는
고향에 내려와 살고 있는 그,
처자식 모두 서울에 두고
홀로 쇠약한 부모님과 함께 살아가는
그의 집을 찾아가 문을 여는데
삐걱거리는 소리가 요란하다
문에 기름 좀 쳐야겠다는 내 말에
밤늦도록 술 마시느라
들어오지 않은 아들 기다리다
그 문소리에 돌아왔구나 하고
마음 놓으실 텐데
그러면 되겠느냐고 한다
정갈했던 옛 모습 사라지고
검게 그을린 덥수룩한 얼굴에
마음 아팠는데
삐걱거리는 소리 속에
깊고 넓은 강물 한줄기
믿음직하게 흐르고 있었다
- 시집 『그 빛을 찾아간 적 있다』 (한국문연, 2012)
[감상]
‘소음’은 소리를 말하되 시끄럽고 불쾌한 부정의 소리를 일컫는 말이다. 아파트 층간 소음 때문에 멱살잡이가 오가고 살인까지 저지르는 세상이다. 이웃 간 살벌한 다툼이 사회문제로 대두된 지 오래다. 경기도는 최근 층간소음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전국에서 처음으로 아파트 층간소음관리위원회가 자율적으로 벌과금을 부과할 수 있도록 ‘공동주택관리규약 준칙’을 개정했다. 그러나 어떤 종류의 소리가 소음이고, 같은 종류의 소리라 해도 음의 양과 높이에서 어느 정도를 벗어나야 객관적으로 소음이라 규정지을 수 있는지는 참으로 난해하고 미묘한 문제가 아닐 수 없어 실행과정에서 또 다른 논란이 예상된다.
일반적으로 항공기에서 발생하는 모든 소리는 소음으로 간주한다. 두 차례 전쟁을 겪고 원폭투하까지 당한 일본인은 특히 항공기 소음에 질색이다. 일본은 자국 영토로 들어오는 모든 항공기에 대하여 소음 정도에 따라 거액의 ‘특별착륙료’를 부과하는 조치를 취했는데, 이후 항공기 소음부과금은 세계적 추세가 되어버렸다. 프랑스가 자랑했던 초음속 여객기 콩코드가 퇴출된 것도 바로 이 소음이 주원인이었다. 그런데 가령 콩코드 엔진의 설계자 입장에서는 그 굉음이 대단한 자부심일 수 있고, 멀리 갈 것 없이 오토바이 폭주족들에겐 시동 걸 때와 발차시의 부릉부릉 소리 자체가 쾌감일 것이다.
소음은 우리 생활과 환경에서 중요한 과제 가운데 하나임은 사실이지만 민감성 귀로 인해 너무 쉽게 세상의 모든 소리를 소음으로 규정짓고서 그 울타리에 스스로 갇혀 사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피아노, 강아지, 아기 울음, 엿장수 가위소리, 엄마의 훈계, 반복되는 꽃노래까지 소음이 된지 오래다. 이러다가 개골개골 개구리, 가을밤 귀뚜라미 소리, 메밀묵 사려, 봄비 소리, 파도치는 소리도 소음으로 전락하는 건 아닐지, 어디 냄새 안 나는 방귀 한 방 맘 놓고 뀔 수나 있을지 적이 염려된다. 저 세상 아닌 이 세상을 살아가는 건 어쩌면 수많은 생명의 소리들과의 동거를 의미할진데, 모든 소리의 각들과 시시때때로 각을 세우며 살아가는 게 과연 온당한지, 그 자체로 피곤은 아니겠는지 생각해 볼일이다.
시인도 잠시 민감한 귀를 열었으나, 시인의 평소 품성이 그렇듯 얼른 규정된 소음 하나를 귓바퀴에서 지운다. 그리고 문고리에 기름을 치는 대신 달팽이관에 기름칠을 하고서 따뜻이 품안으로 이를 받아들인다. 마침내 마음과 마음을 이어주는 품질 좋은 문소리 하나가 삐걱댄다. 온기 가득한 시인이 건져낸 소리가 참 믿음직하고 따뜻하다. (글-권순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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