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명시감상] '폐교' 전홍준 (2021.12.15)

푸레택 2021. 12. 15. 19:09

■ 폐교 / 전홍준

이제 약도 소용없는 치매 걸린 교사에서
삼십여 년 만에 초등학교 동창회가 열렸다

볼을 차다 날아간 내 고무신에 뺨을 맞고도
선생님에게 고자질 하지 않았던 이순신장군이
화단에서 손을 흔든다

숨어서 완두콩을 따먹던 운동장 옆 논에는
노란염색을 한 보리가 여태 자라고

타작마당 같이 반질반질했던 운동장에는
민들레, 엉겅퀴, 망초들의 봉두난발!

인생은 화려한 한 컷의 장면을 기다리다
끝없이 필름을 소진하다 마는 것은 아닐까

장엄하게 이미자를 열창하는 동창생 등 뒤로
봄날은 간다.

- 시집 『당신은 행복합니까』 (전망, 2004)

[감상]

자신이 나온 초등학교에서 30여년 만에 열린 동창회라니 말을 덧붙이나 마나 감개무량했겠다. 시인의 고향이 경남 의령 어디쯤이라고 들었는데, 그 초등학교도 그곳 어딘가에 위치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불행히도 폐교된 처지라, ‘타작마당 같이 반질반질했던 운동장’은 ‘민들레, 엉겅퀴, 망초들의 봉두난발’이 되어있어 쭉정이처럼 여겼던 스스로의 지난 삶이 더욱 신산스러워졌다. ‘볼을 차다 날아간 내 고무신에 뺨을 맞고도 선생님에게 고자질 하지 않았던 이순신장군이 화단에서 손을 흔’들고 있었지만, 그 위엄과 늠름함은 온데간데없고 자애로운 온기마저 사라진지 오래다.

그리고 ‘장엄하게 이미자를 열창하는 동창생 등 뒤로 봄날은 간다.’ 노래의 가락과 가락사이, 돌아가는 필름과 필름 사이, 나도 모르고 너도 모르는 사이에 봄날은 간다. 노랗게 파도로 넘실대는 보리밭 사이 길로 저만치 봄날은 줄행랑치고 있었다. 나눠 마신 낮술 탓이 아니다. 꽃 진 자리에서 뜨는 오두방정도 아니다. 연분홍 졸음 속, 새가 날면 따라 웃고, 새가 울면 따라 울던 얄궂은 그 노래에 봄날은 낭창하게 일 없이 가고 있었다. 기형도의 시에서처럼 ‘햇빛은 분가루처럼 흩날리고’ ‘밤마다 숱한 나무젓가락들은 두 쪽으로 갈라지고’ 있는데, ‘화려한 한 컷의 장면을 기다리’는 너는 누구이며 나는 무엇이냐.

필름은 소진되어가고 날은 곧 어두워질 것이다. 세상의 학교도 머지않아 문이 닫힐 전망이며, 눈은 흐릿해져 보이는 것만 보일 뿐이다. 내게도 가는 봄날은 좀 거시기하다. 뜯어보고 싶지 않은 고지서 봉투만 수북하게 남긴 채 봄날은 간다. 난데없이 마빡에 솟은 뾰루찌며 편두통과 치주질환도 고스란히 두고 봄날은 간다. 늦은 새벽 귀가한 작은아들 놈의 술 취해 비틀거리는 가랑이 사이로 봄날은 간다. 새로 만난 여자와 혼인에 관한 협의차 다음 주 다녀가시겠다는 큰아들 녀석의 유선통보, 끊긴 전화에 이어지는 뚜뚜뚜뚜 몹쓸 기계음 뒤로 봄날은 간다. 그러나 이건 천만 다행이지 싶은데, 부식된 시간들을 잠시 붙들어 매고서 지금 비가 내린다. 봄날이 가면 그뿐, 별이 뜨면 서로 웃고 별이 지면 서로 울면 되는 것을. (글=권순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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