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명시감상] '명함' 김희정 (2021.12.11)

푸레택 2021. 12. 11. 10:30

명함 / 김희정

수십 년 만에 초등학교 동창 모임 갔더니
안부보다 먼저 명함을 주고받는다
받은 것이 있으면 주는 것도 있어야 하는데...
받기만 하다 보니 슬슬 눈치가 보인다
술잔이 돌고 집 이야기 차 이야기 투자 이야기에
추억은 어느새 구석으로 밀리고 만다

집에 돌아와 명함을 보니
어릴 적 친구들 모습 떠올랐다
찌질이었던 성철이는
부동산 투자로 이름만 대면 아는 외제차를 타고 왔다
제대로 말도 꺼내지 못한 순자는
아들 둘을 서울대에 보내 교육전문가를 자처했다
친구들이 라면땅을 빼앗아 먹어
눈물 콧물 짜며 선생님께 일러 바쳤던 인수는
증권으로 크게 재미를 봤다며
애널리스트 뺨치는 말솜씨를 자랑했다

30년이 지난 지금
변한 것 없이 사는 것은 나뿐이었다
변변한 명함 한 장 장만 못한 삶
인사동 골목을 걷다
누군가 김 시인하며 부를 때
나 말고도 돌아보는 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 장면 생각하면
내가 시인입네 하는 마음 들킨 것 같아
아직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 시집 『아들아, 딸아 아빠는 말이야』(화남, 2012)

[감상]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수많은 사람과 접촉하며 자신의 이름과 신분을 알리고 기억할 수 있도록 소통 보조수단으로 명함을 사용한다. 사람을 처음 만나 인사 나누며 명함을 주고받을 때 상대방을 빠르게 분석하고 이해한다. 관계 유지의 활로가 되기도 하지만 형식적일 경우도 많다. 명함은 중국에서 유래되었으며 춘추시대의 공자도 명함을 썼다고 한다. 서양에선 16세기부터 지금 형태의 명함을 주고받았다. 우리나라에 서양식 명함의 효시는 구한말 개화파 지식인들에 의해서다. 미국의 한 박물관 한국 민속품 컬렉션에는 한자 이름과 영문 이름이 병기된 김옥균, 서광범 등 개화파 핵심 인물들의 명함이 진열돼 있다.

지금은 명함을 주고받을 일이 별로 없는데도 서랍 한 칸에는 정리하지 못한 명함들로 빼곡하다. 누군지 도통 기억나지 않는 명함이 태반이다. 요즘은 사진만 찍으면 알아서 정리해 주는 편리한 애플리케이션도 있다고 들었으나 이제 와서 그걸 써먹기에는 너무 늦은 연식이 되어버렸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받은 수천 장의 명함을 구겨서 쓰레기통에 던져 넣을 것이고 또 그 이상의 내 명함이 누군가의 의해 폐기처분되었을 것이다. 이따금 수많은 직함이 앞뒤로 빼곡히 나열된 명함을 보게 된다. 그럴 때 나는 늘 탄복하며 다른 의미의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황금빛 찬란한 명함, 유난히 두껍고 빳빳한 명함도 있다.

대구에 비뇨기과 의사인 남재만 시인의 <명함> 시가 있다. “언제 어디서 받았는지 기억도 없는 명함들이 내 서랍에 수두룩하다. 그걸 준 사람의 얼굴마저 떠오르지 않는다. 그래서 버려야겠다며 찢어버리려니 그 중 하나가 도무지 찢겨지질 않는다. 하는 수 없이 난 그 명함을 호주머니에 소중히 넣고 다닌다. 질기고 매끄러워 구두주걱으로 쓰기 안성맞춤이기에.” 나도 버리려다가 무척 비싸게 치인 것 같아 아까워서 버리지 못한 명함이 있다. 명함이 요긴한 직종도 많이 있겠으나 시인은 명함이 별로 필요 없다. 낯선 일반인들에게 시인은 자칫 ‘별종’ 취급을 받을 수 있다. 오래 전 나도 초등 동창모임에서 받았던 뜨악한 시선을 기억한다.

멀쩡한 직장 때려치우고 뽕에 빠지듯 시에 빠져든 건 아닐까 의심하는 이도 있었으리라. 게다가 타고 다니는 차라도 양호하면 좀 나은데 이게 신통찮으면 ‘찌질이’ 취급당하기 십상이다. 요즘은 명함을 대신하는 대표적인 물건이 승용차 아닌가. 車格이란 말이 회자된 지도 오래다. 나는 87년 ‘르망’을 시작으로 7번이나 차를 갈아탔지만 한 번도 ‘카니발’이나 ‘소나타’를 넘어본 적이 없다. 지금은 작은애가 물려준 ‘아반테’다. 고재종의 시 「골프군 러브호텔면 가든리의 화훼농 김씨의 꿈」에서 “그래! 나도 이참에 꽃농사 거두면 아반떼 하나 뽑겠다던, 그 차에 읍내 태양다방 화자년 태우고 한바탕 씽씽 밟겠다던,” 무려 그 아반테가 아닌가.

그럼에도 영 안 먹어준다. 실은 나도 쪽팔리고 당당하지 못할 때가 여러 번 있었다. 나라고 왜 좋은 차를 모를까만 막상 현실에서는 ‘내가 무슨’ 그면서 허세를 거두고 만다. 외제차를 굴리는 친구들의 이유는 다양하다. 안전이나 연비에서부터 위신과 체면, 국산차 회사의 강성 노조 파업을 핑계로 대는 이도 있다. 그리고 드러내진 않았으나 외제차를 타는 남자가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다는 것도 이유 중의 하나다. 은연중 돈과 힘으로 자신을 지켜줄 것이라 여성들은 믿는다고 한다. 나와는 모두 상관없는 일들이다. 다만 낡은 아반테를 끌고 다닌다고 얼굴이 화끈거리지는 않을 작정이다. 나에게도 세상에게도 져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좀 낑낑거리기는 하지만 가다가 확 불타버릴 것 같지도 않고. (글=권순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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