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고시조] (131) 옥하관 저문 날에 - 김천택(金天澤) (2021.12.10)

푸레택 2021. 12. 10. 09:39

■ 옥하관 저문 날에 - 김천택(金天澤)

玉河關 저문 날에 어여쁠손 三學士여
忠魂義魄이 어드러로 간 거이고
아마도 萬古綱常은 네 붙든가 하노라 

[뜻풀이]     

*옥하관(玉河關): 의주(義州)에서 심양(審陽)으로 가는 길목의 관문(關門).
*저문: ‘해가 져서 어두워 지다.
*어여쁠손: 불쌍한 것은. 현대어에서는 ‘예쁘다’를 옛스럽게 이르는 말이지만, 본래 옛말에서는 ‘어여쁘다’라는 말은 ‘불쌍히 여기다’의 뜻이 들어 있다.
*삼학사(三學士):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싸워야 한다고 주장한 주전론자(主戰論者)들로서, 호국(胡國)으로 끌려 가서도 굴복하지 않고 버티다가 끈내는 타국에서 순절한 윤집(尹集)과 오달제(吳達濟)와 홍익한(洪翼漢) 3인을 가리키는 말이다. 
*충혼의백(忠魂義魄): 충성된 영혼과 의로운 혼백.
*어드러로: ‘어드러’는 ‘어디로’의 옛말.
*간 거이고: 간 것인고.
*만고강상(萬古綱常): 언제까지나 사람이 지켜 나아가야 할 도덕률(道德律). ‘만고(萬古)는 ‘아주 오래 된 세월이란 뜻으로, ‘매우 오래 전 부터’의 뜻이며, ‘강상(綱常)’은 삼강(三綱)과 오상(五常)을 아울러 이르는 말. 곧 사람이 오래 전부터 지켜온 도리라는 뜻.
*붙든가: ‘붙들었는가. 붙들어서 부지했는가.

[풀이]

북녘 오랑캐 땅의 옥하관이 저물었는데 포로로 끌려 가는 삼학사의 모습이 가엾기도 하여라! 이제 그 충성어린 의로운 넋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아마도 만고에 빛나는 강산을 부지한 것은 오직 그대들 뿐인가 싶구나!

[지은이]

김천택(金天澤: 1690~?): 자(字)는 백함(伯涵), 또는 이숙(履叔)이며, 호(號)를 남파(南坡)라고 일컬었
다. 벼슬은 포도청(捕盜廳)의 포교(捕校)를 지냈을 뿐, 진작부터 창곡(唱曲)을 즐겨, 금객(琴客)인 김성기(金聖器)와, 가객(歌客) 김수장(金壽長)과 더불어 친교가 두터웠다.  영조(英祖) 4년(1728)에 우리나라 최초의 시조전집(詩調全集)으로 꼽히는 《청구영언》을 편찬하였으며, 그 자신도 《해동가요》에 57수(首)를 남겼다. 다만 그는 가창(歌唱)을 위한 노래를 지었기 때문에, 그의 작품은 음률적(音律的)으로만 다듬어졌을 뿐, 문학작품으로서는 여타의 작가들에게 미치지 못한다는 논평을 받고 있다. 그러나 그가 김수장과 더불어 침체되었던 단가(短歌)를 부흥시킨 공적은 높이 평가되고 있다.

[참고]

삼학사(三學士): 1637년 병자호란 때 조선이 중국 청나라에 항복을 하는 것을 반대하고 척화론 을 주장했다가 청나라에 잡혀가 참혹한 죽음을 당했던 척화파의 강경론 자 세 사람, 즉 홍익한(洪翼漢)·윤집(尹集)·오달제(吳達濟)를 일컫는 말이다. 1636년(인조14)12월 청태종(淸太宗)이 10만대군을 거느리고 조선에 침입하여 남
한산성(南漢山城)을 포위하였을 때, 조정 신하들 사이의 의견이 일치하지 못하였다. 최명길(崔鳴吉)을 중심으로 한 주화파(主和派)는, 청나라와 화친을 하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김상헌(金尙憲)을 중심으로 한 주전파(主戰派)는 결사항전을 주장하였으나 결국 주화파의 주장이 우세를 점하였다. 이에1637년 인조가 남한산성 밖으로 나와 청나라에 항복하였고, 홍익한 등 세 사람은 척화(斥和)의 주모자로 중국 선양[瀋陽]으로 끌려갔다. 이들은 선양에서 모진 고문과 회유에도 척화의 뜻을 굽히지 않음으로써, 결국 참형(斬刑)을 당하였다. 1627년(인조5) 정묘호란으로 조선과 후금(後金 뒤의 청)은 형제지국의 맹약을 맺었으나, 후금은 명을 정벌하기 위해 조선에 군량과 병선(兵船)을 요구했고, 1632년에는 형제 관계를 군신관계로 고치고 세폐(歲幣)를 늘일 것을 요구했다. 또한 후금은 내 몽골을 평정하는 등 세력이 날로 커지자 칭제건원(稱帝建元)하고 국호를 청으로 고쳤으며, 1636년2월에는 용골대(龍骨大)·마부대(馬夫大) 등을 보내어 조선을 속국시하는 조건을 제시했다.이에 최명길(崔鳴吉)과 같은 주화론자(主和論者)도 있었지만 조선의 분위기는 척화로 기울어져갔고, 윤집·오달제·홍익한 등은 소를 올려 청나라 사신들을 죽여 모독을 씻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병자호란이 일어나고 이듬해 인조가 삼전도(三田渡)에서 굴욕적인 항복을 하고 화의가 성립되자, 청나라측에서는 전쟁의 책임을 척화론자에게 돌려 이들을 찾아 처단할 것을 주장했다. 오달제와 윤집은 스스로 척화론자로 나섰고, 홍익한은 1637년 2월초 평양에서 회군하는 청군에 잡혀 선양[瀋陽]에 끌려갔다. 이들은 청나라의 회유와 협박에 굴하지 않고 척화의 대의를 끝까지 밝히다가 모두 선양성 서문(西門) 밖에서 처형당했다. 이후 조정에서는 이들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정문(旌門)을 세웠으며, 홍익한에게는 충정(忠正), 오달제에게는 충렬(忠烈), 윤집에게는 충정(忠貞)이라는 시호를 주었고 모두를 영의정으로 추증했다. 

[원문] 일소일빈 (daum.net)

 

일소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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