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山水間 바위 아래 - 윤선도(尹善道)
山水間 바위 아래 띠집을 짓노라 하니
그 모른 남들은 웃는다 한다마는
어리고 鄕闇의 뜻에는 내 分인가 하노라
《산중신곡(山中新曲)》 만흥일(漫興一)
[뜻풀이]
*산수간(山水間): 산과 물 사이, 자연풍경 속.
*띠집: 지붕을 띠로 이은 집, 초가집.
*그 모른: 그 뜻을 모르는.
*어리고: 어리석고. ‘어리다’는 ‘어리석다’의 옛말이다.
*향암(鄕闇): 시골에 사는 우매한 사람. 농촌에 살면서 별로 아는 것이 없는 사람.
*분(分): 분수. 자기 신분에 알맞는 분한(分限).
[풀이]
산수 사이로 경치가 좋은 곳을 가려서, 바위 아래에다 띠풀로 이은 집을 짓고 살려고 했더니, 그 뜻을 모르는 남들은 비웃고들 있다마는, 나같이 어리석고 이런 시골에서 별로 아는 바 없는 사람의 마음에는, 이만하면 내 분에 맞는 일인가 여겨진다.
[지은이]
윤선도(尹善道: 1587~1671): 이조(李祖) 시조작가(詩調作家)로서, 자(字)는 약이(約而), 호(號)는 고산(孤山) 이라 불렀다. 정철·박인로와 더불어 조선 3대 시가인(詩歌人)의 한 사람으로, 서인(西人) 송시열에게 정치적으로 패해 유배생활을 했다. 자는 약이(約而), 호는 고산(孤山)·해옹(海翁). 부정공(副正公) 유심(唯深)의 둘째 아들이었는데, 8세 때 백부인 관찰공(觀察公) 유기(唯幾)의 양자로 가서 해남윤씨의 대종(大宗)을 이었다. 11세부터 절에 들어가 학문연구에 몰두하여 26세 때 진사에 급제했다. 1616년(광해군 8) 이이첨의 난정(亂政)과 박승종·유희분의 망군(忘君)의 죄를 탄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유배를 당해, 경원(慶源)·기장(機張)등지에서 유배생활을 하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 풀려났다. 고향인 해남에서 조용히 지내던 중 1628년(인조 6) 봉림(鳳林)·인평(麟坪) 두 대군의 사부가 되면서, 인조의 신임을 얻어 호조좌랑에서부터 세자시강원문학(世子侍講院文學)에 이르기까지 주요요직을 맡았다. 그러나 조정 내 노론파의 질시가 심해져 1635년 고향에 돌아와 은거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 나자 가복(家僕) 수백 명을 배에 태워 강화로 떠났으나, 이미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남한산성을 향해 가다가 이번에는 환도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세상을 등질결심을 하고 뱃머리를 돌려 제주도로 향해가던 중 보길도의 경치를 보고 반해, 부용동(芙蓉洞)이라 이름하고, 여생을 마칠 곳으로 삼았다. 1638년 인조의 부름에 응하지 않은 죄로 영덕(盈德)으로 유배를 당해 다음해 풀려 났다. 보길도로 돌아와 정자를 짓고 시(詩)·가(歌)·무(舞)를 즐기며 살았으며, 효종이 즉위한 이래 여러 차례 부름이 있었으나,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무민거(無憫居)·정성당(靜成堂) 등 집을 짓고, 정자를 증축하며, 큰못을 파는 등 호화로운 생활을 즐기면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1659년 효종이 승하하자 산릉(山陵) 문제와 조대비복제(趙大妃服制) 문제가 대두되었다. 남인파인 윤선도는 송시열·송준길 등 노론파에 맞서 상소로써 항쟁했으나 과격하다고 하여 삼수(三水)로 유배를 당했다. 1667년(현종 9) 그의 나이 81세에 이르러, 겨우 석방된 뒤 여생을 한적히 보내다가 1671년(현종12) 낙서재(樂書齋)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는 성품이 강직하고 시비를 가림에 타협이 없어 자주 유배를 당했다. 한편 그는 음악을 좋아하는 풍류인이기도 했다. 특히 그가 남긴 시조 75수는 국문학사상 시조의 최고봉이라 일컬어진다. 그의 시문집으로는 정조 15년에 왕의 특명으로 발간된 〈고산유고〉가 있다. 이 시문집의 하별집(下別集)에 시조 및 단가 75수가, 〈산중신곡 山中新曲〉 18수, 〈산중속신곡 山中續新曲〉 2수, 기타 6수,〈어부사시사 漁父四時詞〉 40수, 〈몽천요 夢天謠〉 5수, 〈우후요 雨後謠〉 1수 순서로 실려 전한다. 〈산중신곡〉 18수 가운데, 〈오우가 五友歌〉는 물·돌·소나무·대나무·달을 읊은 시조로 널리 애송되었다. 〈어부사시사〉는 효종 때 부용동에 들어가 은거할 무렵에 지은 것으로, 봄·여름·가을·겨울을 각각 10수씩 읊었다. 그의 시조는 시조의 일반적 주제인 자연과의 화합을 주제로 담았다. 우리말을 쉽고 간소하며 자연스럽게 구사하여 한국어의 예술적 가치를 발현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숙종 때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 되었다. 시호는 충헌(忠憲)이다.
[참고1]
이 시조는 병자호란 때 왕을 호종하지 않았다 하여 영덕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나 금쇄동에 은거하고 있을 때에 지은 것이다. 혼란한 정계에서 물러나 산 속에다 띠집을 짓고 자연과 벗하는 생활을 하려고 하니 세속적인 사람들은 나의 참뜻을 모르고 비웃고들 있지만 우직한 나는 이것으로 만족한다는 것이다. 자연 속에서 명리를 잊고 정신적인 평화를 누리려는 작가의 초탈한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참고2]
산중신곡(山中新曲): 산중신곡은 1642년(인조20)에 윤선도(尹善道)가 지은 연시조(聯詩調) 18수를 묶은 일종의 시조 모음집에 해당한다. 이 시조는 윤선도가 성산현감(星山縣監)에서 파직되어 고향으로 돌아와 있다가 병자호란 때 의병으로 출정하였으나, 화의가 되고 임금이 환도한 즉시 문안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다시 경상북도 영덕으로 귀양갔다가 풀려나와 심정을 피력한 것이다. 고향인 해남의 금쇄동(金鎖洞)에 은거하면서 지은 노래이다. <산중신곡>이란 제목 아래 18수의 시조가 있는데, <만흥(漫興)> 6수, <조무요(早霧謠)> 1수, <하우요(夏雨謠)> 2수, <일모요(日暮謠)>·<야심요(夜深謠)>·<기세탄(饑世嘆)> 각 1수, <오우가>(五友歌)> 6수가 차례로 실려 있다.
[출처] 원문보기
https://blog.daum.net/thddudgh7
일소일빈
한자는 우리글이다
blog.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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