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명작수필] '월부 도둑' 이응백(李應百) (2021.11.22)

푸레택 2021. 11. 22. 12:37

■ 월부 도둑 / 이응백(李應百)

우리 나라에도 작년 세모에 텔레비전의 대량 월부(月賦)가 있었다. 텔레비전을 놓으면 주부가 일손을 쉬게 되고, 애들의 공부에 지장이 많다는 통폐론에도 불구하고 이에 감연히 한몫 끼인 것은 무엇보다도 어린것이 아직 학령 전이요, 월부라는 편리점에서였다. 방의 크기로 보아 14인치라도 그리 작은 감이 없이 잘 조화가 되고, 더구나 화면이 일그러지거나 흔들리지 않으며 농담(淺淡)도 고르고 음향도 깨끗하여, 이 진귀한 문명(文明)의 산물이 내방객의 호기심을 끌기에 족했다. 그리하여 밤마다 저녁을 끝내고는 찾아오는 도 생기게 되었다. 꼬마도 물론 훌륭한 팬 노릇을 했다.

이렇게 몇 달을 지내는 동안에 이 이채로운 텔레비전도 그리 변변치 못한 우리 살림의 다른 가구들과 제법 어울리게 되어 그대로 자리가 딱 잡히게 되었다. 언제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는 그 싱싱한 디자인은 방안이 한결 신선한 분위기를 불러일으켰다. 그리하여 텔레비전은 우리 가정에 의젓한 필수품(必需品)이 되고, 그 시청은 하나의 생리화(生理化)로 되고 말았다.

그런데 이를 어쩌라? 그 애지중지(愛之重之)하던 텔레비전이 어느 비 오는 새벽, 지붕을 타고 들어온 도둑에게 감쪽같이 도난을 당하고 말았다. 흙발로 들어온 그들에게 이끌려 나가며, 그 텔레비전이 우리를 얼마나 원망했으랴? 그리 간단하지 않은 절차 동안, 같은 방에서 자면서도 전혀 낌새도 못챘던 것은 마취제의 살포 때문일 것이라고 우리는 아직까지 그렇게 자위하고 있다. 텔레비전이 앉았던 자리는 보기 흉하리만큼 쓸쓸해 보였다.

더구나 물건은 없어졌어도 월부는 꼬박꼬박 물어야 한다. 말하자면 도둑을 월부로 맞은 셈이다. 하기야 한꺼번에 맞은 것보다는 이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상물 없는 빈 월부를 부어 나가기란 아물려던 상처를 건드리는 것 같아 마음이 아리다.

비노니 이훌랑 월부 물건은 월부장까지 가져가는 에티켓을 잊지 말아 주기를 그들 밤손님에게 바라는 바이다.

이응백(李應百, 19232010):
국어학자ㆍ문학박사. 경기도(京畿道) 파주시(坡州市) 파평면(坡平面) 덕천리(德泉里) 출생. 호 난대(蘭臺). 1949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2회 졸업. 《
한국국어교육연구회》를 설립, 국어 교육의 이론과 실제 및 국어 문법에 대한 연구를 하였다. 이화여자대학 교수를 거쳐 1957년 서울대 사범대 교수로 부임, 1988년 정년 퇴임, 한양대 국어교육과 전임 대우 교수 부임. 한국 수필문학 진흥회 회장. 시조의 생활화를 위한 《전통문화협의회》 창립.

/ 2021.11.22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