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차마설(借馬說) / 이곡(李穀)
ㅡ 소유에 대한 깨달음
내가 집이 가난하여 말이 없어서 간혹 빌려 타는데, 여위고 둔하여 걸음이 느린 말을 빌려 타면, 비록 급한 일이 있어도 감히 채찍질을 가하지 못하고 조심조심하여 곧 넘어질 것같이 여기다가, 개울이나 구렁을 만나면 바로 내려 걸어가므로 후회하는 일이 적었다.
발굽이 높고 귀가 날카로운 준마로서 잘 달리는 말을 빌려 올라타면 의기양양하게 마음대로 채찍질할 수 있고 고삐를 놓으면 언덕과 골짜기가 평지처럼 보이니 심히 장쾌(壯快)하였다. 그러나 어떤 때에는 위태로워서 떨어지는 근심을 면하지 못하였다.
아! 사람의 마음이 옮겨지고 바뀌는 것이 이와 같을까? 남의 물건을 빌려서 하루아침 소용에 대비하는 것도 이와 같거늘, 하물며 참으로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은 오죽할까.
그러나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이 어느 것이나 빌리지 아니한 것이 없다.
임금은 백성으로부터 힘을 빌려서 높고 부귀한 자리를 가졌고, 신하는 임금으로부터 권세를 빌려 은총과 귀함을 누리며, 아들은 아비로부터, 지어미는 지아비로부터, 비복(婢僕)은 상전으로부터 힘과 권세를 빌려서 가지고 있다.
그 빌린 바가 또한 깊고 많아서 대개는 자기 소유로 하고 끝내 반성할 줄 모르고 있으니, 어찌 미혹(迷惑)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다가도 혹 잠깐 사이에 그 빌린 것이 도로 돌아가게 되면, 만방(萬邦)의 임금도 외톨이가 되고, 백승(百乘)을 가졌던 집도 외로운 신하가 되니, 하물며 그보다 더 미약한 자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맹자가 일컫기를 “남의 것을 오랫동안 빌려 쓰고 있으면서 돌려주지 아니하면, 어찌 그것이 자기의 소유가 아닌 줄 알겠는가?” 하였다.
내가 여기에 느낀 바가 있어서 차마설(借馬說)을 지어 그 뜻을 넓히노라.
- 이곡, 『가정집(稼亭集)1)』 中에서
■ 借馬說(차마설) / 李穀(이곡)
ㅡ 빌린 말을 논하는 글
余家貧無馬(여가빈무마) : 나는 집이 가난해서 말이 없기 때문에
或借而乘之(혹차이승지) : 간혹 남의 말을 빌려서 타곤 한다
得駑且瘦者(득노차수자) : 그런데 노둔하고 야윈 말을 얻었을 경우에는
事雖急(사수급) : 일이 아무리 급해도
不敢加策(부감가책) : 감히 채찍을 대지 못한 채
兢兢然若將蹶躓(긍긍연약장궐지) : 전전긍긍하니 금방이라도 쓰러지고 넘어질 것 같아서
値溝塹則下(치구참즉하) : 개천이나 도랑이라도 만나면 또 말에서 내리곤 한다
故鮮有悔(고선유회) : 그래서 후회하는 일이 거의 없다
得蹄高耳銳駿且駛者(득제고이예준차사자) : 반면에 발굽이 높고 귀가 쫑긋하며 잘 달리는 준마를 얻었을 경우에는
陽陽然肆志(양양연사지) : 의기양양하여
着鞭縱靶(착편종파) : 방자하게 채찍을 갈기기도 하고 고삐를 놓기도 하면서
平視陵谷(평시릉곡) : 언덕과 골짜기를 모두 평지로 간주한 채
甚可快也(심가쾌야) : 매우 유쾌하게 질주하곤 한다
然或未免危墜之患(연혹미면위추지환) : 그러나 간혹 위험하게 말에서 떨어지는 환란을 면하지 못한다
噫(희) : 아,
人情之移易一至此邪(인정지이역일지차사) : 사람의 감정이라는 것이 어쩌면 이렇게까지 달라지고 뒤바뀔 수가 있단 말인가
借物以備一朝之用(차물이비일조지용) : 남의 물건을 빌려서 잠깐 동안 쓸 때에도
尙猶如此(상유여차) : 오히려 이와 같은데
况其眞有者乎(황기진유자호) : 하물며 진짜로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경우야 어떻겠는가
然人之所有(연인지소유) : 그렇긴 하지만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 가운데
孰爲不借者(숙위부차자) : 무엇이 남에게 빌리지 않은 것이겠는가
君借力於民以尊富(군차력어민이존부) : 임금은 백성으로부터 힘을 빌려서 존귀하고 부유하게 되는 것이요,
臣借勢於君以寵貴(신차세어군이총귀) : 신하는 임금으로부터 권세를 빌려서 총애를 받고 귀한 신분이 되는 것이다
子之於父(자지어부) : 그리고 자식은 어버이에게서,
婦之於夫(부지어부) : 지어미는 지아비에게서
婢僕之於主(비복지어주) : 비복(婢僕)은 주인에게서
其所借亦深且多(기소차역심차다) : 각각 빌리는 것이 또한 심하고도 많은데
率以爲己有(솔이위기유) : 대부분 자기가 본래 가지고 있는 것처럼 여기기만 할 뿐
而終莫之省(이종막지성) : 끝내 돌이켜 보려고 하지 않는다
豈非惑也(개비혹야) : 이 어찌 미혹된 일이 아니겠는가
苟或須臾之頃(구혹수유지경) : 그러다가 혹 잠깐 사이에
還其所借(환기소차) : 그동안 빌렸던 것을 돌려주는 일이 생기게 되면
則萬邦之君爲獨夫(즉만방지군위독부) : 만방(萬邦)의 임금도 독부(獨夫)가 되고
百乘之家爲孤臣(백승지가위고신) : 백승(百乘)의 대부(大夫)도 고신(孤臣)이 되는 법인데
况微者邪(황미자사) : 더군다나 미천한 자의 경우야 어떠하겠는가
孟子曰(맹자왈) :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久假而不歸(구가이부귀) : “오래도록 차용하고서 반환하지 않았으니
烏知其非有也(오지기비유야) : 그들이 자기의 소유가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겠는가.”라고 하였다
余於此有感焉(여어차유감언) : 내가 이 말을 접하고서 느껴지는 바가 있기에
作借馬說以廣其意云(작차마설이광기의운) : 차마설을 지어서 그 뜻을 부연해 보았다
◇ 이곡(李穀, 1298~1351):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중보(仲父), 호는 가정(稼亭). 초명은 운백(芸白). 한산 출생. 한산이씨 시조인 이윤경(李允卿)의 6대손이다. 찬성사 이자성(李自成)의 아들이며, 이색(李穡)의 아버지이다. 이곡은 1317년(충숙왕 4) 거자과(擧子科)에 합격한 뒤 예문관검열이 되었다. 원나라에 들어가 1332년 정동성(征東省) 향시에 수석으로 선발되었다. 다시 전시(殿試)에 차석으로 급제하였다. 이 때 지은 대책(對策)을 독권관(讀卷官)이 보고 감탄하였다. 재상들의 건의로 한림국사원검열관(翰林國史院檢閱官)이 되어 그때부터 원나라 문사들과 교유하였다. 이곡은 1334년 본국으로부터 학교를 진흥시키라는 조서를 받고 귀국하여 가선대부 시전의부령직보문각(嘉善大夫試典儀副令直寶文閣)이 제수되었다. 이듬해에 다시 원나라에 들어가 휘정원관구(徽政院管勾)·정동행중서성좌우사원외랑(征東行中書省左右司員外郎) 등의 벼슬을 역임하였다. 그 뒤에 본국에서 밀직부사·지밀직사사를 거쳐 정당문학(政堂文學)·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가 되고 뒤에 한산군(韓山君)에 봉해졌다. 이곡은 이제현(李齊賢) 등과 함께 민지(閔漬)가 편찬한 『편년강목(編年綱目)』을 증수하고 충렬·충선·충숙 3조(三朝)의 실록을 편수하였다. 한때는 시관이 되었으나 사정(私情)으로 선발하였다는 탄핵을 받았다. 다시 원나라에 가서 중서성감창(中書省監倉)으로 있다가 귀국하였다. 공민왕의 옹립을 주장하였으므로 충정왕이 즉위하자 신변에 불안을 느껴 관동지방으로 주유(周遊)하였다. 1350년(충정왕 2) 원나라로부터 봉의대부 정동행중서성좌우사낭중(征東行中書省左右司郎中)을 제수 받았고, 그 이듬해에 죽었다. 이곡은 일찍이 원나라에서 문명을 떨쳤다. 원나라의 조정에 고려로부터 동녀를 징발하지 말 것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그는 중소지주 출신의 신흥사대부로, 원나라의 과거에 급제하여 실력을 인정받음으로써 고려에서의 관직생활도 순탄하였다. 그는 유학의 이념으로써 현실문제에 적극적으로 대결하였다. 그러나 쇠망의 양상을 보인 고려 귀족정권에서 그의 이상은 실현되지는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그의 여러 편의 시에 잘 반영되어 있다. 『동문선』에는 100여 편에 가까운 이곡의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다. 「죽부인전(竹夫人傳)」은 가전체문학으로 대나무를 의인화하였다. 그밖에 많은 시편들은 고려 말기 중국과의 문화교류의 구체적인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한산의 문헌서원(文獻書院), 영해의 단산서원(丹山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가정집』 4책 20권이 전한다.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2021.11.22 옮겨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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