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씨팔! / 배한봉
수업시간 담임선생님의 숙제 질문에 병채는
“씨팔!”이라고 대답했다 하네
아이들은 책상을 두드리며 웃었으나
“씨팔! 확실한 기라예!”
병채는 다시 한 번 씩씩하게 답했다 하네
처녀인 담임선생님은 순간 몹시 당황했겠지
그러다 녀석의 공책을 보고는 배꼽을 잡았겠지
어제 초등학교 1학년 병채의 숙제는
봉숭아 씨방을 살펴보고 씨앗수를 알아가는 것
착실하게 자연공부를 하고
공책에 “씨8”이라 적어간 답을 녀석은
자랑스럽게 큰 소리로 말한 것뿐이라 하네
세상의 물음에 나는 언제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답을 외쳐본 적 있나
울퉁불퉁 비포장도로 같은
삶이 나를 보고 씨팔! 씨팔! 지나가네
- 시집 『잠을 두드리는 물의 노래』 (문학의 전당, 2006)
[감상]
‘우리 집엔 강아지가 3마리가 있어요’와 ‘우리 집은 3층이에요’라고 할 때의 수를 읽는 방법은 다르다. 각각 ‘세 마리’와 ‘삼 층’이라고 해야 옳은데, 초등 1학년에겐 이 개념의 구분이 좀 어려울 수도 있겠다. 영어에서도 기수와 서수가 있듯이 우리도 수를 읽는 방법에 두 가지가 있다. 영어의 경우 기수는 기록을 나타낼 때 사용되고 서수는 순서를 표현할 때 사용된다. 말하자면 기수는 원투쓰리이고 서수는 first second third...로 나간다. 하지만 우리의 일 이 삼으로 셈하는 것과 하나 둘 셋으로 읽는 것은 그 방법이 영어와는 좀 다르다.
이 두 방식은 우리 사회에서 널리 쓰이는 관행과 일정한 상황 원칙에 따라 달리 사용된다. ‘떡집은 1층, 학원은 2층’처럼 차례와 번호를 나타내거나 길이 무게 등의 측정단위가 붙은 수는 ‘일 이 삼’으로 읽고, ‘인절미 5개 주세요’와 같이 개수와 횟수를 나타낼 때는 ‘하나 둘 셋’으로 읽는다. 그런데 딱 부러진 원칙이 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닌 것 같다. 시간을 읽을 때 ‘일곱 시 다섯 분’하면 틀린 표현이 되고 ‘일곱 시 오 분’ 해야 옳다. 시를 읽을 때와 분초를 읽을 때의 기준이 또 달라지기 때문이다.
테이블 넘버를 적어놓은 식당에서 종업원이 다른 테이블은 다 십 일번, 십 이번 이런 식으로 말하는데 18번 테이블은 ‘열여덟 번’이라고 호명한다. 여기에 무슨 구멍이라도 있다는 말인가. 이런 지경이니 초등 1학년 아이가 ‘씨8’을 ‘씨팔’이라 읽었다 해서 그리 잘못되고 우스운 일인가. 굳이 하자를 들먹이자면 저 ‘씨팔’을 그 ‘씨팔’로 듣고 상상하고 키득거리는 무리들의 관념 아닌가. 여기서 그 ‘씨팔’의 어원까지 들추어내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 처녀 담임 선생님이 순간 몹시 당황했던 것은 사전에도 없는 발칙한 단어를 상상했던 탓이다.
시인마저도 재밌어 하고 맞장구를 쳤기 때문에 이런 시도 써진 것 아닌가. 요즘은 온갖 외래어와 축약어, 파생어와 은어들이 뒤섞여 현란하게 사용되고 있어 발음만 듣고는 그 말뜻을 바로 알아듣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 과정의 오해와 진실 사이에서 웃지 못할 해프닝도 비일비재하다. 79년도 직장 초년생 시절, 사무실에 막 여상을 나온 여직원이 한명 배속되었다. 착하기로 소문난 대리가 신문을 보다가 “아니, 사람이 타고난 대로 살면 되지. 꼭 ‘이쁜이수술’까지 해야 돼?” “안 그래 미스 송? 미스 송은 예뻐서 이런 고민할 일은 없겠네!”
신문 광고를 보고 한 마디 한 것인데, 둘레 사람들은 모두 킥킥거리며 웃고, 그 미스 송도 얼굴이 시뻘게졌다. 지금도 그 박 대리의 어안이 벙벙하던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정치인의 흥망성쇠는 말 속에 있다는 말도 오래전부터 회자되어왔다. ‘꼬리 자르기’는 뭐고 ‘머리 자르기‘는 또 무언가. 이 말을 한 사람의 잘못인지, 이 말에 발끈한 사람의 잘못인지도 잘 가늠되지 않는다. 병채만이 ‘세상의 물음에’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답을 외칠’ 자격이 있고, 그걸 욕으로 알아듣는 자 모두 ‘씨팔! 씨팔!’소리를 들어도 싸다.
글=권순진 시인
/ 2021.11.20 옮겨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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