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고시조] (44) '지당에 비 뿌리고' 조헌(趙憲) (2021.11.18)

푸레택 2021. 11. 18. 18:39

■ 지당에 비 뿌리고 - 조헌(趙憲)

池塘에 비 뿌리고 楊柳에 내 끼인제
沙工은 어디 가고 빈 배만 매였는고
夕陽에 짝 잃은 갈매기는 오락가락 하노매

[뜻풀이]

*지당(池塘): 연못.
*양류(楊柳): 수양버들.
*내: 연기. 여기서는 안개로 보아도 좋을 듯하다.
*끼인제: 끼었는데
*사공(沙工): 배를 부리는 사람.
*석양(夕陽): 해질 무렵.
*하노매: ‘하노매라’에서 ‘라’가 생략된 말. ~하도다, ~하는구나와 같다.

[풀이]

연못에는 비가 내리며 버들가지에는 물안개가 서리었는데, 뱃사공은 어디를 갔기에 빈 배만 매여 있느냐? 해질 무렵에 짝을 잃은 갈매기는 오락가락 하는구나!

[지은이]

조헌(趙憲: 1544~1592): 자는 여식(汝式), 호는 중봉(重峯)·도원(陶原)·후율(後栗), 시호는 문열(文烈), 본관은 배천(白川), 아버지는 조응지(趙應祉)이다.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문인이며, 조광조(趙光祖)와 이황(李滉)을 사숙했고, 김황(金滉)·이지함(李之菡)에게도 배웠다. 1565년(명종 20) 성균관에 입학했다. 1567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교서관부정자가 되었다. 1571년(선조4) 홍주목교수(洪州牧敎授)에 임명되었는데, 이시절부터 이지함과 교유하고 그의 권유에 따라 성혼과 이이를 스승으로 섬겨 가르침을 받았다. 그는 절의와 도학을 겸비한 학자로서, 평생을 강의(强毅)와 직언(直言)으로 일관했다. 학문에 있어서는 이론보다도 실행(實行)과 실공(實功)을 지향했다. 1591년 조선에 온 현소(玄蘇) 등의 일본사신이 명나라를 칠 길을 빌리자고 청하여 조선침략의 속셈을 드러내자, 일본사신의 목을 베라는 상소를 하고 영·호남의 왜적 방비책을 올렸으나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5월에 격문을 띄우고 의병을 모아 차령(車嶺)에서 문인 김절(金節) 등과 함께 왜군을 물리쳤다. 그후 다시 문인 이우(李瑀)·김경백(金敬伯)·전승업(全承業) 등과 함께 의병을 모아, 8월 1일 영규(靈圭)의 승군과 같이 청주성을 수복했다. 이어 왜적이 충청도와 전라도를 빼앗으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금산으로 향했으나, 충청도순찰사 윤국형(尹國馨)과의 의견대립과 전공을 시기하는 관군의 방해로 의병이 흩어지고 700여 명만이 남게 되었다. 이들을 이끌고 금산으로 가서 8월 18일 왜장 고바야가와[小早川隆景]의 군대와 전투를 벌였으나, 인원과 무기의 열세로 모두 전사했다.

[참고]

한가하고 아늑한 농촌의 풍경을 그린 한폭의 그림이다. 연못이 있으면 버드나무가 있고, 고기잡이를 하거나 연못을 건너기 위한 조각배가 있기 마련이다. 우리 나라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지만, 요즈음은 근대화에 밀려 사라져가고 있다. 그런데 이 시조는 한가하다못해 외롭게까지 느껴진다. 사공이 없는 배, 짝을 잃은 갈매기,그것이 하루가 끝나려는 석양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불의를 보고는 참을수 없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직간을 하다가 벼슬에서 파직되었으며, 임진란을 예견하고는 일본에서 온 사신을 목베든지, 그렇지 않으면 자기의 목을 잘라달라고 복합상소를 하기도 하였다. 마침내 임진란이 터지자, 의병장으로 왜적과 싸우다가 죽은 사람이다. 의인의 길은 외로움의 길이기에 이런 외로운 노래를 지었는지도 모른다.

 

/ 2021.11.18 옮겨 적음

 

[출처] 원문보기

https://blog.daum.net/thddudgh7

 

일소일빈

한자는 우리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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