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만리 머나먼 길에 / 왕방연(王邦衍)
千萬里 머나먼 길에 고운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여 울어 밤길 예놋다
[뜻풀이]
*천만리(千萬里): 서울에서 영월까지는 천만리 만큼이나 멀다고 하는 뜻이다.
*고운님: 여기서는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된 어린 단종(端宗)을 가리킨다.
*여의옵고: 이별하옵고.
*내 안: 내 마음.
*예놋다: ‘예다’는 ‘가다’의 뜻, ‘~놋다’는 힘줌을 나타내는 ‘~도다’의 옛말이다. 곧 가도다, 가는구나!.
[풀이]
천리 만리 떨어져 있는 외진 곳에 어린 임금을 이별하고 돌아오니, 이 내 슬픔 붙일 데가 전혀 없기로, 이 냇가에 앉아있으니, 저 바위를 흘러가는 물도 마치 내 마음과도 같이 울며불며 가는구나!
[지은이]
왕방연(王邦衍): 생몰년 미상. 조선 초기의 문신.사육신을 중심으로 한 단종복위사건이 사전에 발각되어 강원도 영월에 유배중인 노산군(魯山君:단종)에게 1457년(세조3) 사약이 내려질 때 그 책임을 맡은 의금부도사였다. 그는 영월에 이르러 사약을 받들고 노산군앞으로 나아가려 하였으나 감히 어찌할 바 를 몰라 머뭇거렸다. 나장(羅將)이 시각이 늦어진다고 재촉하자 하는수없이 뜰가운데 엎드려 있으니, 단종이 익선관과 곤룡포를 갖추고 나와서 온 까닭을 물었을 때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이때 단종을 항상 곁에서 모시던 공생(貢生: 관가나 향교에서 심부름하던 통인과 같은 사람)이 이 일을 담당하였다.
[참고]
왕방연(王邦衍)은, 사육신을 중심으로 한 단종(端宗) 복위사건이 발각되자 단종은 강원도 영월에 유배되었고 그 뒤 단종에게 사약이 내려졌는데 그는 이때 사약을 가져간 의금부도사였다. 그는 사약을 차마 단종에게 내밀지 못하고 괴로워했다고 한다. 단종을 영월로 유배한 후 그 심정을 노래한 시조 한 수가 전하는데, 초장이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은 님 여희옵고/ 내 마음 둘데 업셔 냇가에 안자시니/ 져 물도 내 안 같아여 우러 밤길 녜놋다"이다. 그뒤 김지남(金止男)이 금강에 이르러 여자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를 듣고 한문으로 단가(短歌)를 지었다고 전한다. 《청구영언》에 이 시조가 실려있다. 왕방연은 서울에 도착한 직후 관직을 내던진뒤 봉화산 아래 중랑천변에 배나무를 심고 묵객으로 생을 마쳤다. 왕방연이 배나무를 심은 뜻은 처연하기만 하다. 한여름 땡볕 유배 길에 목이탄 上王이 물 한모금 마실 것을 청했으나 세조 御命으로 끝내 올릴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端宗이 승하한 날이면 자신이 농사지은 배를 바구니에 가득 담아 寧越을 향해놓고 고두배(叩頭拜)했다. 배 맛이 유난히 단데다 물이많고 시원했다. 이후 이일대 구리 태릉 지역에서 생산되는 배를, ‘먹골배’라 부르게 되었다. 그리고 강원도 영월의 청령포 언덕에 이 詩가 돌에 새겨져 있어 오가는 이들의 마음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 淸泠浦(청령포) 哀歌(애가) - 王邦衍(왕방연)
千里遠遠道(천리원원도): 천만리 머나먼 곳에
美人離別秋(미인이별추): 고운 님 여의옵고
此心無所着(차심무소착): 이 마음 둘데 없어
下馬臨川流(하마임천류): 말에서 내려 시냇가에 앉았네
川流亦如我(천류역여아): 흐르는 저 물도 내 안 같아야
鳴洄去不休(명회거불휴): 울어 밤길 예놋다
[출처] 《일소일빈》 송영호 Daum Blog
https://blog.daum.net/thddudgh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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