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명작수필] '이명(耳鳴)' 김종완 (2021.11.03)

푸레택 2021. 11. 3. 22:34

■ 이명(耳鳴) - 김종완

   살아 계실 적에 어머님은 귀에서 무슨 소리가 난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몇 번 진찰을 받으셨으나 의사는 노화에 따른 현상이므로 특별한 치료책이 있을 수 없다는 말뿐이었다. 결국 어머님은 저승까지 그 귀찮은 소리를 갖고 가셨다.

   그런데 나에게도 얼마 전부터 이명이 찾아왔다.
 
   I.M.F 사태는 학원업을 하는 나 같은 영세 사업자에게도 직격탄을 날렸다. 형편상 직원 수를 줄일 수밖에 없었는데 그 공백을 메꾸는 일은 원장인 내 몫이 되었다. 하루 10시간이 넘은 과로가 계속되었다. 집에 돌아오면 밀린 원고와 새벽까지 씨름을 했다. 사십 중반을 넘긴 체력은 옛같지 않았다.
 
   한참 강의를 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어지러움증이 기습을 했다. 팽ㅡ. 중심이 흐트러지며 맥없이 옆으로 쓰러져가는 몸을 반사적으로 칠판을 잡음으로써 간신히 가누었다. 그러면서 순간적으로 느꼈다. 현재 나에게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이 세상에서 모든 소리가 돌연히 빠져나가 버렸다는 것을.
 
   나는 완벽한 무음(無音)의 세계 속에 내던져 있었다. 놀라 학생들을 쳐다보았다. 소리가 없는 표정 표정들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표정들은 제 각각 무슨 의미인가를 담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것들을 해석할 수 없었다. 참으로 황당스러웠다. 그런 긴박한 시간이 얼마간 흐른 후 나를 떠났던 소리가 다시 찾아왔다. 처음에는 먼 곳으로부터 여리게, 그러다가 파도가 밀려오듯이 쏴 하고 밀려들더니만 드디어는 내 귀 가득 한꺼번에 달려들어 제 각각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소리, 소리, 소리들…. 그 때 나는 이 세상이 온갖 소리로 가득 채워져 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계속 어지러웠다. 속마저 울렁거렸다. 더 이상 수업 진행은 불가능했다. 학생들에게 이 상황을 들키지 않은 채 수업 중단의 양해를 구해야만 했다.

   선생님의 몸이 갑자기 반란을 일으키네. 막 어지러워. 불현듯 지구가 돈다는 사실이 몸으로 느껴지는 거야. 지구가 막 도네. 미안하지만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만."
 
   아이들이 지르는 해방의 함성을 뒤로 한 채 문을 열고 복도로 나왔다. 복도가 흔들거렸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듯 벽을 잡고 걸었다. 원장실에 닫자마자 의자를 뒤로 길게 젖히고 눕고 말았다.
 
   누웠는데도 어지러움증은 계속되었다. 하지만 그 짧은 순간에 느꼈던 충격은 생생히 되살아났다. 모든 소리가 딱 끊겨 적막이 아닌 한가지의 소리도 없는 세계, 그러다가 밀물처럼 서서히 다가왔던 소리, 소리, 소리들.... 그 찰나에 느꼈던 것은 '귀머거리의 세계는 아마 이럴거야.'라는 낯선 세계의 경험에서 오는 신기함이었다. 그러나 그 뒤를 따르는 것은 '아, 이렇게 죽겠구나! 죽음이란 모든 소리가 배제된 이런 세계일거야.'라는 죽음의 그림자였다. 죽음의 징후가 무섭지는 않았다. 아니 낯설음이 주는 얼마간의 신선함, 호기심 같은 것, 차라리 반가움 같은 것이었다.
 
   세상에, 죽음을 반가워하다니!
 
    “어머니, 어머니…
    나는 몇 번이나 돌아가신 어머니를 부르며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이 잠이 다시는 깨어 날 수 없는 잠일지도 몰라. 영원히 깨어날 수 없는 잠이라면, 그러면 어때. 그것도 좋은 일이지. 이 세상 어떤 것에 연연해 할 시간마저 없이 죽어간다면 이 또한 축복 아니겠는가
 
   몇 시간이나 잤을까? 깨어나 보니 어지러움은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내 귀속에는 끊임없이 칭얼거리는 한 생명체가 탄생해 살고 있었다. 이명(耳鳴)이었다. 온갖 소리를 순간 잃고 나서 낯선 소리를 하나 더 얻은 것이다.
 
    어머님는 이명 때문에 괴로워하셨다. 그럴 때마다 말씀하시곤 했다.
 
   “귀에서 이 잉잉거리는 소리만 안 나면 살 것 같은디.
 
   나의 이명도 잉잉거리는 소리였다. 그 소리는 살아 있었다. 평상시에는 낡은 형광등에서 나는 잉잉거림이었다가 어쩔 때는 비오는 날 고압선 밑을 걸을 때 들었던 변압기의 잉잉거림으로 변했다.
 
   어머님은 이 소리에 얼마나 괴로워 하셨을까.
 
   소리는 참으로 내밀했다. 주변에서 사람들이 다 떠나고, 모든 발음체가 사라진 후 '이제, 나 혼자야'라고 비로소 평온을 실감하는 바로 그 때 들려 오기 시작했다. 시작은 겨우 자기의 존재를 알릴 수 있을 정도만큼 작게, 그래서 호기심을 발동시켜 자기를 찾지 않을 수 없게 만든 다음, 자기의 존재가 완전히 인식되면 볼륨을 점점 키워 드디어는 귓바퀴 가득 차 버렸다.
 
   처음에는 이 소리를 내쫓기 위해 손가락을 귀에 넣어 후벼 보기도 하고,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 보기도 하고, 뒷목을 가볍게 쳐보기도 하였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러면 그럴수록 더 깊숙이 숨어들었다가 한꺼번에 더욱 큰 소리로 울려 되는 것이었다. 그것은 어렸을 때 겪었던 가을날 참새 쫓기 같았다. 아무리 쫓아도 그때만 잠시 후루룩 날아갔다가 다시 달려드는 참새들.
 
   어느 날 퇴근 후 거실에 앉아 텔레비젼를 보고 있었다. 아이들은 하나 둘 제 방으로 가서 잠이 들었고, 옆에서 차를 끓이고 과일을 깎던 아내마저 졸음에 못 이겨 방으로 들어갔지만 나는 멍하니 텔레비젼만을 보고 있었다. 애국가가 끝나자 화면이 '지―'하며 끓기 시작했다. 리모콘으로 화면을 껐다. 주위에는 아무런 소리도 없었다. 적막감이 온 집안을 감돌았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을까. 그 때 나는 안타까이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올 때가 지났는데, 가 버렸을까? 그럴 리 없는데.
 
   기막히게도 나는 이명의 사라짐을 아쉬워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명은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그날 따라 내면 깊숙이 잠들었다가 밖으로 나오는데 시간이 좀 지체됐을 뿐이었다.
 
   잉∼. 처음에는 작게, 그러다가 소리는 점점 커져 이제는 온 몸을 제 소리로 가득 채웠다. 나는 그 소리에 침잠 되며 몇 번이나 독백조로 뇌까리고 있었다.
 
   어머니, 저에게도 이명이 찾아왔어요.
   어조는 참으로 서러움에 북받쳐 있었다. 곧 울음이 터져 버릴 것 같은. 그러나 울지 않았다. 터지면 그 서러움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서.
 
   내가 왜 이렇게 서러워하지? 삶에 너무 지쳤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돌이켜 보면 나에게 삶이란 그렇게 힘든 것만은 아니었다. 지금까지 겪었던 고통이라는 것도 감당한 만큼의 크기로 주어져 왔었다. 삶이란 결코 비장한 결심을 세워 끊어야 할 만큼 고약한 것은 아니었다. 이왕 갖게 된 생명이라면 한 세상 살아 볼 만한 것으로 여겨 왔다.
 
   잉∼. 소리는 계속해서 들려 왔다.
 
   나는 이 소리를 사랑해야 해. 이것은 외부에서 온 남의 소리가 아니라 내부에서 온 나의 소리이니까. 내 몸의 울림이고, 내 피가 흐르면서 내는 파장이니까. 나의 것을 사랑해야지. 아무리 초라할지라도 내가 내 것을 사랑하지 않으면 그 누가 있어 사랑해 줄 것인가. 초라한 내 것을 위하여 기꺼이 사랑해야지.
 
   나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소리는 점점 커져 온 집안을 제 목소리로 가득 채우는 것 같았다. 그대로 두었다. 마음껏 뛰어 놀아 보라고. 그렇게 한참을 뛰어 놀더니 소리는 점점 작아져 평상시의 모습으로 되돌아오는 듯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내가 자기에게 관심을 갖자 점점 음정을 높이더니 새로운 색의 소리를 내는 것이었다.
 
   이것이 무슨 소리이지? 이것은 여름날 기승을 부리며 암컷을 찾는 숫매미 소리 아닌가?
 
   그 소리는 비록 약간 귀를 따갑게 해도 한결 듣기에 좋았다. 변압기의 기계음에 비하면 그래도 자연의 소리이니까. 이제는 숫 매미가 암컷을 마음껏 찾아라고 내버려두었다. 한 동안 울어대던 매미도 지쳤는지 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이 놈이 보통 영악스러운 놈이 아니라는 것을. 내가 관심을 가지면 커졌다가 관심을 거두면 작아지고. 그렇다면 녀석을 훈련시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놈, 네 마음대로 해 봐. 나는 너의 주인이야. 너에게 쏟았던 지금까지의 관심도 하루아침에 걷어 버릴 수 있다고. 내 사랑은 너 하기에 달려 있어. 나는 너를 사랑하고 귀여워하며 한 평생을 더불어 살수도 있고, 아니면 미워하고 구박하면서 평생 동안 천덕꾸러기로 학대하며 살수도 있으니까. 네 마음대로 해.
 
   나는 그 놈에게 관심이 없는 척 신문을 뒤적거리며 딴청을 부리기 시작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싸움은 일방적으로 싱겁게 끝나고 말았다. 드디어 그 놈이 나에게 항복했던 것이다.
 
   어디에선가 작은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소리는 조금씩 조금씩 분명해져 갔다. 의식적으로 무시했다. 그런데 그 음색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잉잉거리는 소리도, 따가운 매미 소리도 아니었다. 부드러운 작은 목소리로, 찌르르르… 찌르르르…
 
   이것은 귀뚜라미 소리가 아닌가. 내 귀속에 귀뚜라미가 살고 있어. 바로 이거야. 이 정도면 평생 너를 데리고 살 수 있어. 그래, 너는 사랑스런 나만의 소리야. 나만이 갖고 있는 유일의 소리, 타인은 들을 수 없는 내밀한 독점의 소리.
 
   나는 눈을 감고 소리를 즐기기 시작했다. 시간이 경과되면서 장단과 리듬, 그리고 음색의 작은 변화까지도 감지되기 시작했다. 소리가 실체성을 띄며 점점 보이기 시작했다.
 
  너라는 놈은 사랑만을 먹고사는 참으로 신비한 존재로구나!

   모든 것이 떠난 후 오직 혼자인 조용한 시간만을 골라 찾아 왔을 때, 너의 예민한 감정을 알아챘어야 했어. 자기의 존재를 알리려고 점점 소리를 키우는 앙탈을 부릴 때, 너의 자존심과 독점욕을 눈치챘어야 했어. 내가 왜 너의 농염한 여성스러움을 보지 못했을까. 처음에는 거칠게 상대의 감수성을 떠보다가 드디어 상대가 제 기준에 합격을 하면 제 모습을 점점 드러내 보이는 멋쟁이. 이 놈 봐라. 연약한 듯 강하고, 앙탈부리다가 비위 맞출 줄 알고, 감출 듯 보이고, 정숙한 듯 농염하고, 이는 이미 정염의 사랑을 터득한 성숙한 여인의 모습 아닌가. 그대에게 사내의 사랑을 안을 불타는 가슴이 있다면 내 기꺼이 너의 품에 빠져 죽으리.
 
   하지만 너에게 한시도 눈을 떼서는 안되겠어. 까딱 잘못 했다가는 머리 꼭대기에 올라 평생 애인의 가슴을 시커멓게 태워 죽일 놈 아닌가.
 
   나는 이제 부자가 되었다. 사랑하는 애인을 가졌으니. 나이 사십이 넘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이것은 기적 아닌가. 사랑이란 백 번 한다 하여도 항상 끊임없이 타는 목마름인 것을. 나는 사십이 넘은 어느 날 마음의 심지까지도 태워버리는 그 불꽃을 감당할 체력이 되지 못해 사랑을 포기했었다. 남자가 사랑을 포기 할 때, 아마 그것은 갑자기 폐경기를 맞는 여자가 느낀 상실감과 같을 것이다. 삶에 대한 허무감, 박탈감. 그 가난스러움. 그러나 이제 나 같은 가난뱅이에게 마음껏 사랑해도 되는 연인이 생겼으니, 그리고 내가 쏟는 관심에 자기의 존재 여부를 매다는 여인이 생기다니, 역시 인생은 살아볼 만하지 않는가.

글=김종완 수필가

수필가. 수필평론가. 《수필과 비평》으로 등단(1995년). 한국수필문학진흥회. 수필문우회 회원. 《수필과 비평》 편집위원. 수필평론집 『수필 들여다보기』과 많은 좋은 수필과 수필평론이 있음.

/ 2021.11.03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