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명시감상] '물푸레나무 사랑' 나병춘, '그 물푸레나무 곁으로' 김명인, '옛날과 물푸레나무' 황금찬 (2021.11.03)

푸레택 2021. 11. 3. 11:33

■ 물푸레나무 사랑 / 나병춘

물푸레나무를 아는데 40년이 걸렸다
물푸레나무는 길가에 자라
누군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를
얼마나 바랬을까

중학교 생물 선생님은 허구한 날
지각을 일삼는다고 회초리를 후려쳤는데
그것이 물푸레나무라 말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늦가을 도리깨질할 때마다
콩, 녹두, 참깨를 털어내면서도
그게 물푸레나무라 얘기해주지 않았다

아버지 선생님 탓은 안 할란다
이 땅에 살면서 이 땅에서 꽃을 피우는
나무와 들꽃을 사랑한다면서도
물푸레나무를 아는데 이렇게 오래토록 지각하였다

며느리밑씻개 며느리배꼽 며느리밥풀꽃
이 땅의 시어미들은 며느릴 호되게 다그치면서도
그 풀꽃 이름들 하나 하나 이쁘게 부르면서
넌 잡초야, 구박하지 않았다

■ 그 물푸레나무 곁으로 / 김명인

그 나무가 거기 있었다
숱한 매미들이 겉옷을 걸어두고
물관부를 따라가 우듬지 개울에서 멱을 감는지
한여름 내내 그 나무에서는
물긷는 소리가 너무 환했다
물푸레나무 그늘 쪽으로 누군가 걸어간다
한낮을 내려놓고 저녁 나무가
어스름 쪽으로 기울고 있다
머리를 빗질하려고 문밖으로 나와 앉은
그윽한 바람의 여자와 나는 본다
밤의 거울을 꺼내들면
비취를 퍼 올리는 별 몇 개의 약속,
못 지킨 세월 너무 아득했지만
내 몸에서 첨벙거리는 물소리 들리는 동안
어둠 속에서도 얼비치던 그 여자의 푸른 모습,
나무가 거기 서 있었는데 어느 사이
나무를 걸어놓았던
흔적이 있던 그 자리에
나무 허공이 떠다닌다, 나는
아파트를 짓느라고 산 한 채가 온통 절개된
개활지 저 너머로 본다
유난한 거울이 거기 드리웠다
금세 흐리면서 지워진다

■ 옛날과 물푸레나무 / 황금찬

 

이제는 옛날, 그보다도 먼 내 어린시절 누리동 하늘 숲속에 외딴 초막이 내가 살던 옛집이다. 그 집 굴뚝머리에 몇십년이나, 아니 한 백년 자랐을까 큰 물푸레나무가 있었다. 바람이 불며, 비가 올 때면 나뭇잎 쓸리는 소리와 비 듣는 가락이 흡사 거문고 소리 같아서 우리는 그 나무를 풍악나무라고 했다. 늦여름이나 장마철이 되면 낮은 구름이 자주 그 나무 위에 내려앉곤 했다. 물푸레나무는 덕이 많고 그래 어진 나무다. 어린이 새끼손가락 보다도 가는 물푸레나무는 훈장 고선생님의 손에 들려 사랑의 회초리가 되기도 하고 아버지 농기구의 자루가 되어 풍년을 짓기도 했다. '화열이'가 호랑이 잡을 때 쓴 서릿발 같은 창자루도 물푸레나무였고 어머님이 땀으로 끌던 발구도 역시 그 나무였다. 물푸레나무 굳센듯 휘어지고 휘어져도 꺾이지 않고 다시 서는 어느 충신과 효도의 정신이며 성현의 사랑이다 나에게 이 물푸레나무의 이름을 다시 지으라고 한다면 나는 성현목이라고 이름하리라 물푸레나무-

/ 2021.10.03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