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명작수필] '해학송' 최태호 (2021.11.01)

푸레택 2021. 11. 1. 20:52

■ 해학송 / 최태호

우스갯소리를 잘 하는 사람이 친구 집에 찾아가니, 주인이 차려온 술상에 안주라고는 채소뿐이었다. 주인이 미리 말막음으로 “집안이 구차해서 고기 한 점 안 놓여 미안하네.” 하였다. 시쳇말로 green field였던 모양이다. 그 때 마침 마당에 닭 여러 마리가 나와서 모이를 쪼고 있었다. 우스개 잘 하는 친구 말하기를, “대장부가 친구를 만나 어찌 천금을 아끼겠나? 내 당나귀 잡아 안주를 장만하게나.” 하였다. 주인이 깜짝 놀라 “나귀를 잡아먹으면 자넨 무엇을 타고 돌아가겠나?” 그 친구 대답이 태연하였다. “닭을 타고 가지.” 주인은 크게 웃고 닭을 잡아 대접하였다.

서거정(徐居正)의 《태평한화(太平閑話)》 속의 한 토막이다. 대문장가로서 《동국통감(東國通鑑)》, 《동문선(東文選)》 , 《사가정집(四佳亭集)》 등을 남긴 분의 글 속에서 왜 하필이면 이런 것이 나의 흥미를 돋우는 것일까?

공자왈(孔子曰) 맹자왈(孟子曰)로 굳어버리고, 삼강 오륜(三綱五倫)만으로 굴레를 씌워 놓은 것 같은 옛날 선비들, 벼슬이 높다거나 문장으로 이름난 분이 남긴 글 속에는 보한(補閑)이니 잡기(雜記)니 야화(夜話)니 만필(漫筆)이니 해서 오히려 그 시대의 인정과 풍속을 남김 없이 나타내고, 글쓴 분의 인간미를 그대로 풍기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청화(淸話)가 있는가 하면 기문(奇聞)이 있고, 연담(軟談)이 있고, 야록(野錄)이 있다. 그 중에서도 나의 흥미를 돋우는 것은 밑바닥에 흐르는 일관된 해학(諧謔)이다.

옛날에 강릉 부사가 도임하는데, 한양 벼슬아치를 곯려 먹으려고 지방 사람들이 한 꾀를 냈다. 대관령 넘어가는 길목 산신당의 무당을 시켜 길잡이 치성을 들여 맞이하게 하였다. 무당이 말하기를 고갯길이 두 갈래 있는데, 포경(包莖)이거든 아랫길로 가야지 산신이 노하신다 하였다. 아랫길로 내려간 부사는 그 고장에서 고개를 바로 들지 못하였다.

이런 등속의 이야기들을 민속 연구가들이 수록한 책이 《고금소총(古今笑叢)》이란 이름으로 해방 직후에 퍼졌다. 호사가(好事家) 모씨의 출판으로 《제어수록(制禦睡錄)》이 나온 것도 그 무렵이다. 순한문으로 원작을 그대로 베낀 것인데, 사람들이 잘못 생각하여 그 가운데의 연담(軟談)만을 골라서 번역하여 마치 시쳇말로 《와이당 전집》인 양 오해하고 있는 것은 불행한 사실이다. 더욱 불쾌한 것은 몇 편씩 골라서 에로틱하게 각색하여 한글로 번역 출판한 것도 있다. 경세제민(經世濟民)과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를 줏대로 삼는 선비들의 여운(餘韻)을 모독하는 불손까지도 느끼는 것이다.

한국 해학의 멋은 때로는 이솝 우화처럼 신랄하기도 하고, 모리엘의 연극처럼 시속적(時俗的)이기도 하며, 데카메론의 염정(艶情)과 선미(禪味) 풍기는 쇄탈(洒脫)도 있다.

한국인이 공통적으로 허허 웃는 김삿갓, 봉이 김선달, 정수동, 황진이의 행동까지도 이것이 아닌가 한다. 양반을 조롱하는 서민의 감정 표현이라 하는 가면극의 사설도 해학(諧謔) 섞인 선비들의 글 속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닌가 한다.

이상재(李商在) 선생이 일제(日帝)의 손에 잡혀 감옥살이를 하시다가 출옥하니, 그 제자들이 위문 와서 얼마나 고생하셨느냐 하였다. 그 때 이상재 선생 말씀이 “그래, 자네들은 얼마나 호강을 했는가.”는 반문이었다.

말 속에 뼈가 있어 삼천리 강산이 온통 감옥인데, 너희들 무슨 말을 하느냐는 따끔한 질책이 아니고 무엇이었겠는가?

우스갯소리는 여유와 뼈대 없이 나올 수는 없다. 신음과 저주에는 독설이 있을 수 있으나, 해학(諧謔)에 미치지 못한다.

옛날 노론(老論)이 득세하여 판을 치는데, 남산골 소론(少論)의 샌님이 벼슬은 고사하고 끼니도 때우지 못했다. 그를 아끼는 선비가 보다 못해 충고하기를 노론(老論)에 들면 벼슬길에 나아가 지식과 덕행을 펼 수 있고, 우선 의식주로 선비의 체면을 세울 수 있지 않느냐고 하였다. 남산골 샌님 대답하기를, “좋은 말씀이오. 노론이 되겠소마는, 나야 이왕 늦었으니 자식에게나 시켜 노론 애비가 될까 하오.” 하였다 한다. 그냥 웃어 넘길 수 없는 이야기이다.

조태흘(趙太仡)은 근엄한 성격에 백성을 괴롭히지 않아 이제까지 청백한 선비라 전해지고 있다. 강릉 부사로 있을 때, 하루는 부의 기생들이 좌석에서 서로 히히덕거리고 있기에 공이 그 까닭을 물었다. 한 기생이 “제가 간밤 꿈에 영감을 모시고 잤습니다. 그래서 지금 해몽하는 중입니다.” 하고 대답했다. 공은 곧 붓을 들고 시 한 수를 썼는데, 마지막 귀가 이러했다.

막언태수풍정박(莫言太守風情薄)
선입가아길몽중(先入佳兒吉夢中)

(태수가 풍정이 박하여 야속히 생각마라. 먼저 미인의 좋은 꿈 속에 들어갔는데...)

조태흘(趙太仡)은 항상 관세음보살을 염하였다 한다. 하루는 그 하인이 ‘조태흘, 조태흘.’하고 중얼거리는 것을 듣고 그게 무슨 짓이냐 하였다. 하인이 되묻기를 영감은 왜 관세음보살을 찾으십니까 하였다. 불도를 닦아 부처님 같은 사람 되기를 원한다는 부사의 대답에 하인의 대꾸가 걸작이다. “저야 아무리 관세음보살을 외운들 부처님 될 수야 없으니, 영감님처럼만 되었으면 해서 성함 석자만 외웁니다.”

주종(主從)의 관계가 엄한 그 시대의 이야기가 이만큼 부드럽게 전하는 것도 필경은 조태흘의 너그러운 인격에도 있겠지만, 멋에 넘치는 해학(諧謔)이 몸에 배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근래에 외국 영화를 보면 능란한 회화에 감탄할 때가 많다. 낯빛을 고치지 않고, 또 상대의 감정을 상하지 않게 위급한 장면을 부드럽게 넘기는 장면에서 왜 한국 사람들은 조그만 일에 성급히 화풀이를 하고, 심각해 하는지 딱하다고 생각한다. 팽기치듯 내뱉듯 ‘거리의 자식이라 욕하지 말라’,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 ‘좋은 자리에 있을 때 좀 봐 주슈’,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다우’식의 노골적인 조소와 야유가 아니면 죽도록 사랑하느니, 터지는 분노니, 개새끼니, 극하적인 말투가 너무나 범람하는 것 같다. 좀더 여유있는 말로 생활할 수는 없을까?

서울에 가면, 시청 광장 한귀퉁이에 오두마니 서 있는 대한문(大漢門)이 애처로워 보인다. 문화재니까 애호해야 한대서 담장은 근대화해서 물러가고, 슬픈 역사만 지닌 문만이 조화를 잃고 서 있는 꼴이 을씨년스럽기만 한 것이다. 나는 거기서 옛날에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만 찾던 스승의 후예들이 스승의 날에만 거룩하다고 칭송을 받으며, 시대에 뒤떨어져 가는 그런 모습을 보는 것같이 느낀다. 그리고 요새 무형 문화재로 뽑히는 인물들이 모두 그런 꼴로 남아 있는 것을 슬프게 생각한다.

해학은 한국의 생활 문화 가운데 버릴 수 없는 유산이 아닐 수 없다. 문화재 발굴이 성행되는 요사이 이것 하나만 붙잡아 연구하더라도, 흔한 문화상이나 박사감 하나쯤은 무난하지 않는가 막연하게 생각하여 서론적으로 ‘송(頌)’을 덧붙여 보는 것이다.

* 보한 : 한가로움을 도움
* 잡기 : 일정한 주제 없이 이것저것을 되는대로 적은 글
* 야화 : 밤에 모여 앉아 하는 이야기
* 만필 : 일정한 형식에 사로잡히지 않고 부드러운 문체로 사물의 특징을 과장하여 즉흥적이고 풍자적으로 가볍게 쓴 글
* 청화 : 맑고 깨끗한 사실적 이야기
* 기문 : 기이한 소문
* 연담 : 조용히 주고 받는 말, 성적인 내용이 중심
* 야록 : 세상에 떠돌아 다니는 이야기를 적은 것
* 길잡이 치성 : 운이 좋은 길을 잡기 위하여 산신이나 부처에게 드리는 정성
* 와이당 : 음담패설을 즐기는 사람들을 일컫는 비속어
* 선미 : 세속을 떠나 담담한 맛
* 쇄탈 : 속기를 벗어나 시원하다.
* 풍정 : 멋스럽게 세상을 즐기는 마음
* 오두마니 : 오도카니

/ 2021.11.01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