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명작수필] '개구리 소리' 김규련 (2021.11.01)

푸레택 2021. 11. 1. 20:48

■ 개구리 소리 / 김규련

지창에 와 부딪치는 요란한 개구리 소리에 끌려 들에 나와 서성거려 본다. 저녁 나절 몹시 불던 바람은 잠이 들고 밤은 이미 이슥하다.

모를 내기에는 아직 이르다. 물이 가득 잡힌 빈 논에는 또 하나의 밤하늘이 떠 있다. 지칠 줄 모르는 개구리소리는 연신 하늘과 땅 사이의 고요를 뒤흔들고 있다. 와글거리리는 개구리소리에 물이랑이 일 적마다 달과 별은 비에 젖은 가로등처럼 흐려지곤 한다. 첩첩한 산이며 수목樹木들은 무거운 침묵에 잠겨 있다. 그들도 이 밤에 개구리소리에 묵묵히 귀를 모으고 있는 것일까.

개골 개골 개골 가르르 가르르 걀걀걀걀

산골의 개구리는 진달래가 피었다가 지고 제비꽃이 논둑에 점점이 깔릴 무렵 갑자기 울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무더운 여름 어느 날 녹음 속에서 매미소리가 울려 퍼지면 개구리들은 이제 지친 듯 조용히 입을 다문다. 비가 올 때는 더러 울기도 하지만 개구리의 한 해는 이미 저물어 간 것이다.

개구리소리에는 가락도 없고 장단도 없다. 그저 시끄러운 울음소리의 단조로운 반복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허허로운 빈 마음으로 가만히 들어 보면 묘하게도 짜증이 나지 않고 오히려 가슴이 설레온다. 개구리소리는 춥고도 긴 겨울을 땅밑에서 견디고 다시 살아난 개구리들의 환희의 목소리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머지않아 태어날 그 숱한 작은 새생명의 창조를 노래하는 소리이기 때문일까.

개구리소리는 즐거운 소음이다. 만약 개구리의 요란한 울음소리가 없다면, 꽃이 피고 숲이 우거지고 개울물이 흐르며 산새들이 더러는 지저귄다 해도 이 산중은 얼마나 살벌하고 적막할 것인가. 어쩌면 정적이 지나쳐서 죽음의 공포 같은 것을 느낄지도 모른다.

나는 산중생활에서 고독을 달래 보려고 요즘은 밤마다 들에 나와 논둑을 오르내린다. 농가의 들창에서 새어 나온 불빛이 무논 위에 어른거리는 것을 보면 괜히 어린 시절이 생각난다. 고향집 툇마루에서 어머니 무릎에 앉아 듣던 개구리소리를 등에 찬바람을 느끼는 나이에 이 산골에서 다시 들어 보는 서글픈 감격, 불효한 청개구리 삼형제 얘기를 들려주시던 어머니의 목소리며, 감꽃 목걸이를 해 걸고 철없이 뛰놀던 옛 친구들의 목소리가 금시라도 들려 올 것만 같다.

산골에 와서 살면 맑고 은은한 자연의 목소리를 많이 듣게 된다. 메밀꽃이 피는 가을의 석양 들길에서 발바닥이 가렵도록 들려 오는 뭇 풀벌레소리, 늦가을 깊은 밤에 외양간의 소가 먹이를 되새길 때 목에 달린 요령이 흔들려서 땡그렁땡그렁 들려 오는 그윽한 요령소리, 눈보라 치는 겨울 새벽, 문득 잠에서 깼을 때 머리맡에서 가냘프게 떨리는 문풍지소리, 오뉴월 긴긴 날 진종일 앞뒷산에서 울어대는 뻐꾸기의 피울음소리, 뜨락에 거목으로 서 있는 벽오동 잎에 여름 소나기가 후드득 듣고 지나가는 소리.... 이러한 소리에는 항시 절묘한 여운이 감돌아 무한한 자연의 정취를 느끼게 한다.

그러나 개구리소리는 그윽하지도 않고 은은하지도 않다. 그런데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개구리떼들이 깊은 밤에 산천이 떠나가도록 개골개골 울어대는 소리를 듣고 섰으면 어느덧 가슴이 뭉클해지고 마침내 숙연해진다. 개구리소리에는 울고 웃는 생생한 여항閭巷의 목소리가 있다고 할까. 아니면 정한에 사무쳐 흐느끼다 간 많은 서민의 목소리가 깔려 있다고 할까. 개구리소리는 남의 불행과 고통 뿐만 아니라 심지어 원한까지도 더불어 슬퍼하고 아파하는 공감 같은 것을 느끼게 한다.

나는 젊은 시절 한때 몹시 가슴을 앓으며 수없이 각혈을 했다. 그리고 오랫동안의 안정과 약물요법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그러나 그때 무슨 인연으로 얻은 크나큰 마음의 상처는 약물복용으로는 도저히 가시게 할 수가 없었다. 그럴 때 세월과 신앙과 음악은 구원의 신이었다. 나는 그 당시 베토벤이나 브람스의 심혼心魂에 열광했으며, 드뷔시와 사라사테의 분위기에 감동했었다. 음악이 주는 환희의 파도와 감격의 눈물은 마음의 상흔像痕을 서서히 씻어 주었다.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어쩌면 현실의 울타리 밖에서 즐기는 환상과의 대화일지도 모른다. 음악의 소리에는 자기 망각의 묘한 선율이 있다. 그 선율은 모래 위에 깔린 많은 발자국을 지워주는 잔잔한 물결과 같다.

개구리소리는 들떠 있는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힌다. 무엇인가를 생각케 하고 자꾸만 깊은 곳으로 그 생각을 유도해 간다. 음악소리는 사람의 마음을 허공 속으로 증발시킨다면 개구리소리는 자기의 참모습을 찾아 스스로 마음의 골짜기를 헤매게 한다.

불가拂家에서는 최고의 이상경을 열반이라고 한다. 열반이라 함은 번뇌의 불길을 불어서 끈다는 취소取消: nirvana의 뜻이 아닌가. 개구리소리를 밤이 이슥하도록 혼자 듣고 섰으면 드디어 열반의 경지에서 불사선 불사악不思善 不思惡을 느끼는 순간을 맛보게 된다. 개구리소리를 들으며 이러한 순간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는 동양의 진수를 아다고 할 수 없으리라.

인류의 역사는 시간의 선 위에 굴러가는 소리와 모습의 함수관계라고 할까. 세상이 달라지면 소리도 변하고, 소리가 달라지면 세상도 변해 갔다. 이제 이 지상에서 자연의 소리는 차츰 문명의 소리에 밀려나고 있다. 개구리소리는 더욱 그렇다. 문명의 소리와 자연의 소리가 조화를 잃을 때 인간 세상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문명의 소리가 동動이라면 자연의 소리는 정靜이다. 그리고 개구리소리는 선禪일지도 모른다. 개골 개골 개골 가르르 걀걀 걀걀. 개구리떼들이 연신 울고 있다. 나는 먼 훗날 애환을 모르는 한 개 바위가 되어 해마다 제비꽃 필 무렵이 되면 개구리소리에 부딪히며 무거운 침묵에 잠기고 싶다.

/ 2021.11.01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