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울음이 타는 가을江 / 박재삼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 햇볕으로나 동무 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나고나.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江을 보겠네.
저것 봐, 저것 봐,
너보다도 나보다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가 사라지고
그 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 와 가는
소리 죽은 가을江을 처음 보겠네.
- 《울음이 타는 가을江》 (미래사, 1991.)
우리가 흔히 인용하는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본 적이 없는 사람과 인생을 논하지 마라.”는 격언의 출처는 독일의 대문호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에 나오는 시 ‘하프 타는 노인의 노래 2’인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인생을 논하지 마라.”는 표현은 나오지 않는다. 괴테의 소설에는 “눈물에 젖은 빵을 먹어보지 못하고/근심에 찬 여러 밤을/울면서 지새워 보지 못한 사람은/그대들을 알지 못하리./그대 천상의 힘들이여!”라고 되어있다.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본 적이 없는 사람은 ‘천상의 힘’으로 비유된 가난한 삶의 숭고한 가치를 모른다는 것이 문맥의 지시내용이다. 그렇기에 그들과 인생을 논하지 마라는 격언의 말미는 적이 과장된 면이 있어 보인다.
일본 도쿄에서 태어나 어머니의 고향인 삼천포에서 유년을 보내고 고려대 국문과를 중퇴한 박재삼 시인의 삶은 ‘가난’이라는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말년에는 병마에 시달렸었다. 그의 삶은 가난했지만 비루하지 않았고, 힘들고 아팠지만 고결했다. 그래서 그의 시는 슬프면서도 아름답고, 아름다우면서 깊다. ‘울음이 타는 가을江’을 처음 읽었을 때의 울컥한 감동은 괴테의 소설에 실린 시의 “그대들은 알지 못하리./그대 천상의 힘이여!”라는 구절처럼 내가 알지 못할 어떤 지점에서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江”처럼 내 가슴의 빈곳을 사정없이 파고 들어 늘 아련했다. “마음도 한자리 못 앉는 마음”은 무엇이며,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는 무엇일까? “첫사랑 산골 물소리”와 “소리 죽은 가을江”의 이미지에서 뿜어지는 슬픔의 긴긴 사연이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닿는 가을 저녁의 풍경은 ‘눈물’의 사연이 없는 사람에게는 어떻게 비쳐질까? 이런 물음으로 읽고 또 읽었던 이 시는 매년 가을이 올 때마다 떠나 온 고향의 언덕처럼 “저것 봐, 저것 봐”하면서 내게로 다가왔다. 빈곤한 해석보다 눈물겨운 다독(多讀)으로 읽어야할 아름다운 시다.
서정이 사라진 세계는 척박하다. 그 척박의 벽을 넘어 설움까지 다 녹여 바다로 흘러가는 시인의 ‘가을江’을 찾아가 나도 소리 없이, 까닭 없이 밤새 울어 보고 싶은 그런 계절이다.
글=신종호 시인
/ 2021.09.30 옮겨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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