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시 읽어주는 남자] '참음은' 김수영 (2021.09.30)

푸레택 2021. 9. 30. 15:33

■ 참음은 / 김수영

참음은 어제를 생각하게 하고
어제의 얼음을 생각하게 하고
새로 확장된 서울특별시 동남단 논두렁에
어는 막막한 얼음을 생각하게 하고
그리로 전근을 한 국민학교 선생을 생각하게 하고
그들이 돌아오는 길에 주막거리에서 쉬는 十분동안의
지루한 정차를 생각하게 하고
그 주막거리의 이름이 말죽거리라는 것까지도
무료하게 생각하게 하고
기적(奇蹟)을 기적으로 울리게 한다
죽은 기적을 산 기적으로 울리게 한다

《김수영 전집》, 민음사, 1981

프랑스의 대학입학 자격시험 바칼로레아(Baccalaureate)는 8개 분야로 나뉘어 치러지는데 특히 철학시험 논제는 사회적 이슈가 되어 수험생은 물론 각계각층의 열띤 토론을 불러일으킨다고 한다. 철학시험 논제 중에 유난히 기억에 남는 출제가 있는데, “참을 수 없는 것은 참아야 할까?”라는 것이다. 예상되는 답안은 참거나 참지 말아야 한다는 두 방향으로 전개될 것이 분명해 보인다. 어쨌든, 어느 쪽을 택하든 ‘왜’라는 장벽을 뚫고 가야만 한다. ‘왜’ 참아야 하고, ‘왜’ 참지 말아야 하는가에 대해 각각의 논거를 내세우겠지만 ‘참을 수 없는 상황’을 개선하려는 노력들의 일환이라는 차원에서 본다면 두 논지의 주장은 동일한 목적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개선에 대한 희망이 없이 인내(忍耐)만 강요하는 주장은 초라하고 무기력하다. “힘없는 내가 참아야지”, “그래도 예전보다 좋아졌으니까 참아야지”라는 식의 말들로 참을 수 없는 상황을 비껴가는 것은 옳지 않다. 그래서 김수영 시인의 〈참음은〉이라는 시는 참을 수 없는 상황이 만연한 이 시대의 현실을 여러 측면에서 돌아보게 만든다.

모(某) 소설가가 〈참음은〉에 대해 이렇게 풀이를 했다. “그래도 당시 상황은 6.25 전쟁으로 어려웠던 ‘어제’보다는 훨씬 나았다. 그래서 ‘참음은 어제를 생각하게’ 한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죽은 기적을 산 기적으로 울리게 한’ 것이었다.”라고. 여기에 덧붙여 “가난은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나 있었다. 부와 가난이 본질적으로 상대적 개념이므로, 앞으로 사회가 발전하고 부유해져도, 여전히 가난한 사람들은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 잘라 말하자면, 그의 해석은 온당치 않다. 어제보다 덜 가난하다는 이유로 오늘의 가난을 참아야한다거나, 모든 것이 상대적이어서 가난한 사람은 늘 있을 것이라는 그의 주장은 매우 위험해 보인다. 세상이란 다 그런 것이니 분노하지 말고 그냥 참고 살라는 것은 얼룩진 벽에 종이를 붙여놓고 얼룩이 사라졌다고 말하는 것과 진배없다. 김수영이 강조한 것은 ‘생각하게 하고’라는 반복적 표현에 있다. 성찰을 통해 ‘막막한 얼음’과 ‘지루한 정차’와 어떤 연유인지는 모르지만 그 얼음의 땅으로 ‘전근’을 간 초등학교 선생님의 애절한 사연을 찬찬히 들여다봄으로써 우리들의 ‘기적’이 살아날 수 있다는 것이 김수영시인의 생각일 것이다. 무조건 참는 것이 아니라 ‘왜’ 참아야하는 지를 분명히 인지할 때 ‘참음’은 비로소 희망이 될 수 있고, ‘산 기적’이 될 수 있다. 생각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희망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생각해보고 또 생각해봐야 한다.

글=신종호 시인

/ 2021.09.30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