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귀(回歸)―어느 저녁에 / 백인덕
초저녁 술을 마시다가 오래된 책을
읽다가 행간(行間)에 내리는 빗소리를 듣다가
비처럼 서늘한 꿈을 꾸다가
뼈가 부러졌다는 느낌,
아픈 길로만 달려온 것이 아니라
모든 길을 부러진 뼈로 달려왔다는
생각에
너는 멀리서 웃고 있는데
아무래도 그 웃음, 울음인듯 들려
가만히 앉아 있어도 뼈가 시린, 어느
저녁, 쓸쓸한 술을 마시다가 잠깐
- 《끝을 찾아서》 (하늘연못, 2000)
[감상]
‘회귀’의 두려움과 자기성찰의 흔적
강에서 태어난 연어들이 다시 강으로 되돌아오는 회귀의 긴 행렬은 웅장하고 엄숙하다. 모천(母川)에 가까워질수록 매끈하고 탄탄했던 몸은 등이 휘고, 턱이 구부러져 험상궂게 변한다. 혼인색으로 붉어진 그들의 모습은 지치고 위태로워 보인다. 곰과 인간의 집요한 포획망을 뚫고 고향에 다다른 암수의 연어들은 마지막 사랑의 힘으로 온몸을 떨며 아름다운 산란을 한다. 그 짧은 알 낳기의 시간이 끝나면, 나뭇잎처럼 가볍게 죽어 강 아래로 떠내려간다. 연어들의 일생처럼, 인간의 삶도 태어난 곳으로 다시 되돌아가는 ‘회귀’의 불가피한 시간일 것이다. 회귀의 길에는 역경의 순간들이 복병처럼 곳곳에 잠복해 있다. 그래서 회귀는 짐짓 두렵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숭고함의 여운도 짙게 남긴다.
백인덕 시인의 시 〈회귀〉는 회귀의 두려움과 지기성찰의 힘겨운 흔적이 감지된다. 그 두려움은 시인만이 느끼는 개별의 감정이 아닌 모든 이들의 심정에 도사린 공통의 감정으로 읽혀지기에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사람들은 연어들처럼 강인하게 살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안다. 그래서 실패와 좌절을 숨기고 일부러 강한 척을 하거나 아니면 강해져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주문을 건다. 그런 자기최면의 허세가 삶의 주변에 빈번하게 드러난다. 나 또한 그런 세태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런데 백인덕 시인은 “뼈가 부러졌다는 느낌”을 서슴없이 드러내 말한다. 그 솔직함이 읽는 이의 마음을 찌른다. 초저녁에 술을 마시고, 오래된 책을 읽고, 빗소리를 들으며 자신만의 꿈을 꾸는 ‘회귀’의 애잔한 시간이 남들에겐 ‘실패의 시간’으로 보일 수 있을 것이다. 시인의 그런 염려가 결국엔 “모든 길을 부러진 뼈로 달려왔다”는 엄청난 고통의 생각으로 드러난다. 그래서 멀리 있는 ‘너’의 ‘웃음’이 ‘울음’으로 들리는 “뼈가 시린, 어느 저녁”의 솔직한 시간은 두렵고 쓸쓸해 보인다. 다행인 것은, 그러한 시인의 쓸쓸함과 괴로움이 ‘잠깐’의 시간 안에 있다는 것이다.
‘잠깐’은 여기에서 저기로 건너가는 짧고 강한 도약의 시간이다. 생의 모든 시간은 ‘잠깐’의 연쇄일 것이다. 실패와 두려움과 고통을 ‘잠깐’이라는 주머니 속에 가둬둘 때 삶은 강물을 거스르는 연어들처럼 강인해질 것이다. 백인덕 시인의 시를 읽으며 ‘잠깐’의 넓이와 깊이를 새로이 만끽해본다.
글=신종호 시인
/2021.09.29 옮겨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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