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삶] 살아가는 이야기

[고담준론] 우리는 친구가 몇이나 될까? (2021.08.12)

푸레택 2021. 8. 12. 21:30

■ 우리는 친구가 몇이나 될까?

'정 진사'는 무골호인(無骨好人)*입니다.
*무골호인(無骨好人)-줏대가 없이 두루뭉술하여 남의 비위를 모두 맞추는 사람.​

한평생 살아오며 남의 가슴에 못 한번 박은 적이 없고, 적선(積善) 쌓은 걸 펼쳐 놓으면, 아마도 만경창파(萬頃蒼波) 들판을 덮고도 남으리라. 그러다보니 선대(先代)로 부터 물려받은 그 많던 재산(財産)을 야금야금 팔아치워 겨우 제 식구들 굶기지 않을 정도의 중농(中農) 집안이 되었습니다.

정 진사는 덕(德)만 쌓은 것이 아니라 재(才)도 빼어났습니다. 학문이 깊고, 붓을 잡고 휘갈기는 휘호(揮毫)는 천하 명필(名筆)입니다. 고을 사또도 조정(朝廷)으로 보내는 서찰(書札)을 쓸 때는 정 진사에게 이방(吏房)을 보낼 정도였다고 합니다.

​정 진사네 사랑방엔 선비와 문사(文士)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부인과 혼기에 찬 딸 둘은 허구한 날, 밥상과 술상을 차려 사랑방에 들락날락하는 게 일과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오랜만에 허법 스님이 찾아 왔습니다. 잊을만 하면, 정 진사를 찾아와, 고담준론(高談峻論-뜻이 높고 바르며 매우 엄숙하고 날카로운 말)을 나누고, 바람처럼 사라지는 허법 스님을 정 진사는 늘 스승처럼 대해왔습니다.

그날도 사랑방엔 문사(文士)들이 가득 차, 스님이 처마 끝 디딤돌에 앉아 기다리자, 손님들이 눈치채고 우르르 몰려 나갔습니다.

허법 스님과 정 진사가 곡차상을 가운데 두고 마주 앉았습니다.
“정 진사는 친구가 도대체 몇이나 되오?”​
스님이 묻자, 정 진사는 천장을 보고 한참 생각하더니, 자랑스럽게 말했습니다.
“얼추 일흔은 넘을 것 같습니다”​
스님은 혀를 끌끌 찼습니다.
“진사는 참으로 불쌍한 사람이오.”​

정 진사가 눈을 크게 뜨고, 문을 활짝 열더니 말했습니다.
“스님, 한눈 가득 펼쳐진 저 들판을 모두 남의 손에 넘기고, 친구 일흔을 샀습니다.”​
스님은 껄껄 웃으면서,
“친구란 하나 아니면 둘, 많아야 셋, 그 이상이면 친구가 아닐세.”​

두 사람은 밤새도록 곡차를 마시다가, 삼경(三更, 밤 11시부터 새벽 1시 사이)이 지나서야 고꾸라졌습니다. 정 진사가 눈을 떴을 때, 스님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다음날부터 정 진사네 대문(大門)이 굳게 닫혔습니다. 집안에서는 심한 기침소리가 들리고, 의원만 들락거려 글 친구들이 대문 앞에서 발길을 돌렸습니다. 열흘이 가고 보름이 가도, 진사네 대문은 열릴 줄 몰랐습니다.

그러더니 때아닌 늦가을 비가 추적 추적 내리던 날 밤에, 정 진사 집에서는 곡(哭) 소리가 담을 넘어 나왔습니다. 정 진사가 지독한 고뿔(감기)을 이기지 못하고 이승을 하직(下直)한 것입니다.

빈소(殯所)는 초라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부인과 딸 둘이 상복을 입고 머리를 떨어뜨린 채 침통하게 빈소를 지켰습니다. 진사(進士) 생전에 문지방이 닳도록 드나들던 글친구들은 낯짝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한 친구가 문상을 와서 섧게 섧게 곡(哭)을 하더니, 진사 부인을 살짝이 불러냈습니다. “부인, 상중(喪中)에 이런 말을 꺼내 송구스럽지만 워낙 급한 일이라...”​
그 친구는 품속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어 미망인에게 건넸습니다. 봉투를 열어보니 차용증(借用證)이었습니다.

정 진사가 돈 백냥을 빌리고, 입동 전에 갚겠다는 내용으로, 진사의 낙관(落款)까지 찍혀 있었습니다. 또 한 사람의 문상객은 왕희지(王憙之) 족자(簇子) 값 삼백냥을 못 받았다며, 지불각서를 디밀었습니다.

구일장을 치르는데, 여드레째가 되니 이런 채권자들이 빈소를 가득 채웠습니다.
“내 돈을 떼먹고선 출상(出喪)도 못해!”​
“이 사람이 빚도 안갚고 저승으로 줄행랑을 치면 어떡해.”​
빈소에 죽치고 앉아 다그치는 글 친구들 면면(面面)은 모두 낯익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로 그때 허법 스님이 목탁을 두드리며, 빈소에 들어섰습니다. 미망인이 한 뭉치 쥐고 있는 빚 문서를 낚아챈 스님은 병풍을 향해 고함쳤습니다.
“정 진사! 일어나서 문전옥답 던지고 산, 잘난 당신 글 친구들에게 빚이나 갚으시오.”​

병풍 뒤에서 ‘삐거덕’ 관(棺) 뚜껑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정 진사가 걸어 나왔습니다. 빚쟁이 친구들은 혼비백산(魂飛魄散)해 신도 신지 않은 채 도망쳤습니다. 정 진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허법 스님은 빚 문서 뭉치를 들고, 사또에게 찾아갔습니다.

이튿날부터 사또의 호출장을 받은 진사(進士)의 글 친구 빚쟁이들이, 하나씩 벌벌 떨면서 동헌 뜰에 섰습니다. “민 초시는 정 진사에게 삼백냥을 빌려줬다지?”​

사또의 물음에 꿇어앉아 머리를 땅바닥에 조아린 민 초시는 울다시피 읍소했습니다.
“나으리, 목숨만 살려 주십시오.”​
“곤장 삼백대를 맞을 텐가, 삼백냥을 부의금으로 정 진사 빈소에 낼 건가?”

이렇게 하여 정 진사는 글 친구들을 사느라 다 날린 재산을, 그 친구(?)들을 다 버리고 다시 찾았습니다.

친구란, 온 세상 사람이 다 내 곁을 떠났을 때, 나를 찾아오는 바로 그 사람입니다.

나는 과연 진정(眞正)한 친구가 몇이나 될까?

[출처] '받은 글' 옮겨 적음


■ 친구에게 / 김재진·시인

어느 날 네가 메마른 들꽃으로 피어
흔들리고 있다면
소리 없이 구르는 개울 되어
네 곁에 흐르리라

저물녘 들판에 혼자 서서 네가
말없이 어둠을 맞이하고 있다면
작지만 꺼지지 않는 모닥불 되어
네 곁에 타오르리라

단지 사랑한다는 이유로 네가
누군가를 위해 울고 있다면
손수건 되어 네 눈물 닦으리라

어느 날 갑자기
가까운 사람과 헤어져야 하는
안타까운 순간 내게 온다면
가만히 네 손 당겨 내 앞에 두고
네가 짓는 미소로 위로하리라

■ 한 둘 / 허형만·시인

이만큼 살다보니
함께 나이 든 친구 한 둘
뭐 하냐 밥 먹자
전화해 주는 게 고맙다

이만큼 살다보니
보이지 않던 산빛도 한 둘
들리지 않던 풍경소리도 한 둘
맑은 생각 속에 자리 잡아가고

아꼈던 제자 한 둘
선생님이 계셔 행복합니다
말 건네주는 게 고맙다

■ 친구 / 문정희·시인

사람도 자연의 일부라는 것을
누가 몰랐으랴
아무리 사랑하던 사람끼리도
끝까지 함께 갈 순 없다는 것을

진실로 슬픈 것은 그게 아니었지
언젠가 이 손이 낙엽이 되고
산이 된다는 사실이 아니다

그 언젠가가
너무 빨리 온다는 사실이지
미처 숨돌릴 틈도 없이
온몸으로 사랑할 겨를도 없이

어느 하루
잠시 잊었던 친구처럼
홀연 다가와
투욱 어깨를 친다는 사실이지

■ 친구 / 천양희·시인

좋은 일이 없는 것이 불행한 게 아니라
나쁜 일이 없는 것이 다행한 거야
어느 날 친구가 내게 말했습니다
되는 일이 없다고 세상이나 원망하던
나는 부끄러웠습니다

더러워진 발은 깨끗이 씻을 수 있지만
더러워지면 안 될 것은 정신인 거야
어느 날 친구가 내게 말했습니다
되는 일이 없다고 세상에 투덜대던
나는 부끄러웠습니다

자기 하나만을 생각하는 이기심은
실상의 빛을 가려버리는 거야
어느 날 친구가 내게 말했습니다
되는 일이 없다고 세상에 발길질이나 하던
나는 부끄러웠습니다

/ 2021.08.12(목) 편집 택


https://youtu.be/HmdVsYdarYw

https://youtu.be/e8Mc5hPsyLg

https://youtu.be/p2E9v173xo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