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친구가 몇이나 될까?
'정 진사'는 무골호인(無骨好人)*입니다.
*무골호인(無骨好人)-줏대가 없이 두루뭉술하여 남의 비위를 모두 맞추는 사람.
한평생 살아오며 남의 가슴에 못 한번 박은 적이 없고, 적선(積善) 쌓은 걸 펼쳐 놓으면, 아마도 만경창파(萬頃蒼波) 들판을 덮고도 남으리라. 그러다보니 선대(先代)로 부터 물려받은 그 많던 재산(財産)을 야금야금 팔아치워 겨우 제 식구들 굶기지 않을 정도의 중농(中農) 집안이 되었습니다.
정 진사는 덕(德)만 쌓은 것이 아니라 재(才)도 빼어났습니다. 학문이 깊고, 붓을 잡고 휘갈기는 휘호(揮毫)는 천하 명필(名筆)입니다. 고을 사또도 조정(朝廷)으로 보내는 서찰(書札)을 쓸 때는 정 진사에게 ‘이방’(吏房)을 보낼 정도였다고 합니다.
정 진사네 사랑방엔 선비와 문사(文士)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부인과 혼기에 찬 딸 둘은 허구한 날, 밥상과 술상을 차려 사랑방에 들락날락하는 게 일과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오랜만에 ‘허법 스님’이 찾아 왔습니다. 잊을만 하면, 정 진사를 찾아와, 고담준론(高談峻論-뜻이 높고 바르며 매우 엄숙하고 날카로운 말)을 나누고, 바람처럼 사라지는 허법 스님을 정 진사는 늘 스승처럼 대해왔습니다.
그날도 사랑방엔 문사(文士)들이 가득 차, 스님이 처마 끝 디딤돌에 앉아 기다리자, 손님들이 눈치채고 우르르 몰려 나갔습니다.
허법 스님과 정 진사가 곡차상을 가운데 두고 마주 앉았습니다.
“정 진사는 친구가 도대체 몇이나 되오?”
스님이 묻자, 정 진사는 천장을 보고 한참 생각하더니, 자랑스럽게 말했습니다.
“얼추 일흔은 넘을 것 같습니다”
스님은 혀를 끌끌 찼습니다.
“진사는 참으로 불쌍한 사람이오.”
정 진사가 눈을 크게 뜨고, 문을 활짝 열더니 말했습니다.
“스님, 한눈 가득 펼쳐진 저 들판을 모두 남의 손에 넘기고, 친구 일흔을 샀습니다.”
스님은 껄껄 웃으면서,
“친구란 하나 아니면 둘, 많아야 셋, 그 이상이면 친구가 아닐세.”
‘두 사람’은 밤새도록 곡차를 마시다가, 삼경(三更, 밤 11시부터 새벽 1시 사이)이 지나서야 고꾸라졌습니다. 정 진사가 눈을 떴을 때, 스님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다음날부터 정 진사네 대문(大門)이 굳게 닫혔습니다. 집안에서는 심한 기침소리가 들리고, 의원만 들락거려 ‘글 친구’들이 대문 앞에서 발길을 돌렸습니다. 열흘이 가고 보름이 가도, 진사네 대문은 열릴 줄 몰랐습니다.
그러더니 때아닌 늦가을 비가 추적 추적 내리던 날 밤에, 정 진사 집에서는 곡(哭) 소리가 담을 넘어 나왔습니다. 정 진사가 지독한 고뿔(감기)을 이기지 못하고 이승을 하직(下直)한 것입니다.
빈소(殯所)는 초라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부인과 딸 둘이 상복을 입고 머리를 떨어뜨린 채 침통하게 빈소를 지켰습니다. ‘진사(進士)’ 생전에 문지방이 닳도록 드나들던 ‘글친구’들은 낯짝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한 친구가 문상을 와서 섧게 섧게 곡(哭)을 하더니, 진사 부인을 살짝이 불러냈습니다. “부인, 상중(喪中)에 이런 말을 꺼내 송구스럽지만 워낙 급한 일이라...”
그 친구는 품속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어 미망인에게 건넸습니다. 봉투를 열어보니 차용증(借用證)이었습니다.
정 진사가 돈 백냥을 빌리고, 입동 전에 갚겠다는 내용으로, 진사의 낙관(落款)까지 찍혀 있었습니다. 또 한 사람의 문상객은 ‘왕희지’(王憙之) 족자(簇子) 값 삼백냥을 못 받았다며, 지불각서를 디밀었습니다.
‘구일장’을 치르는데, 여드레째가 되니 이런 채권자들이 빈소를 가득 채웠습니다.
“내 돈을 떼먹고선 출상(出喪)도 못해!”
“이 사람이 빚도 안갚고 저승으로 줄행랑을 치면 어떡해.”
빈소에 죽치고 앉아 다그치는 ‘글 친구’들 면면(面面)은 모두 낯익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로 그때 허법 스님이 목탁을 두드리며, 빈소에 들어섰습니다. ‘미망인’이 한 뭉치 쥐고 있는 빚 문서를 낚아챈 스님은 병풍을 향해 고함쳤습니다.
“정 진사! 일어나서 문전옥답 던지고 산, 잘난 당신 ‘글 친구’들에게 빚이나 갚으시오.”
병풍 뒤에서 ‘삐거덕’ 관(棺) 뚜껑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정 진사가 걸어 나왔습니다. ‘빚쟁이’ 친구들은 혼비백산(魂飛魄散)해 신도 신지 않은 채 도망쳤습니다. 정 진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허법 스님은 빚 문서 뭉치를 들고, 사또에게 찾아갔습니다.
이튿날부터 사또의 호출장을 받은 진사(進士)의 글 친구 ‘빚쟁이’들이, 하나씩 벌벌 떨면서 동헌 뜰에 섰습니다. “민 초시는 정 진사에게 삼백냥을 빌려줬다지?”
사또의 물음에 꿇어앉아 머리를 땅바닥에 조아린 민 초시는 울다시피 읍소했습니다.
“나으리, 목숨만 살려 주십시오.”
“곤장 삼백대를 맞을 텐가, 삼백냥을 부의금으로 ‘정 진사’ 빈소에 낼 건가?”
이렇게 하여 정 진사는 ‘글 친구’들을 사느라 다 날린 재산을, 그 친구(?)들을 다 버리고 다시 찾았습니다.
‘친구란, 온 세상 사람이 다 내 곁을 떠났을 때, 나를 찾아오는 바로 그 사람’입니다.
나는 과연 진정(眞正)한 친구가 몇이나 될까?
[출처] '받은 글' 옮겨 적음
■ 친구에게 / 김재진·시인
어느 날 네가 메마른 들꽃으로 피어
흔들리고 있다면
소리 없이 구르는 개울 되어
네 곁에 흐르리라
저물녘 들판에 혼자 서서 네가
말없이 어둠을 맞이하고 있다면
작지만 꺼지지 않는 모닥불 되어
네 곁에 타오르리라
단지 사랑한다는 이유로 네가
누군가를 위해 울고 있다면
손수건 되어 네 눈물 닦으리라
어느 날 갑자기
가까운 사람과 헤어져야 하는
안타까운 순간 내게 온다면
가만히 네 손 당겨 내 앞에 두고
네가 짓는 미소로 위로하리라
■ 한 둘 / 허형만·시인
이만큼 살다보니
함께 나이 든 친구 한 둘
뭐 하냐 밥 먹자
전화해 주는 게 고맙다
이만큼 살다보니
보이지 않던 산빛도 한 둘
들리지 않던 풍경소리도 한 둘
맑은 생각 속에 자리 잡아가고
아꼈던 제자 한 둘
선생님이 계셔 행복합니다
말 건네주는 게 고맙다
■ 친구 / 문정희·시인
사람도 자연의 일부라는 것을
누가 몰랐으랴
아무리 사랑하던 사람끼리도
끝까지 함께 갈 순 없다는 것을
진실로 슬픈 것은 그게 아니었지
언젠가 이 손이 낙엽이 되고
산이 된다는 사실이 아니다
그 언젠가가
너무 빨리 온다는 사실이지
미처 숨돌릴 틈도 없이
온몸으로 사랑할 겨를도 없이
어느 하루
잠시 잊었던 친구처럼
홀연 다가와
투욱 어깨를 친다는 사실이지
■ 친구 / 천양희·시인
좋은 일이 없는 것이 불행한 게 아니라
나쁜 일이 없는 것이 다행한 거야
어느 날 친구가 내게 말했습니다
되는 일이 없다고 세상이나 원망하던
나는 부끄러웠습니다
더러워진 발은 깨끗이 씻을 수 있지만
더러워지면 안 될 것은 정신인 거야
어느 날 친구가 내게 말했습니다
되는 일이 없다고 세상에 투덜대던
나는 부끄러웠습니다
자기 하나만을 생각하는 이기심은
실상의 빛을 가려버리는 거야
어느 날 친구가 내게 말했습니다
되는 일이 없다고 세상에 발길질이나 하던
나는 부끄러웠습니다
/ 2021.08.12(목) 편집 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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