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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승기행] 예향 진도 남종화의 산실 '운림산방' (2021.08.11)

푸레택 2021. 8. 11. 11:45

△ 출처: 옌타이 천왕의 블로그
△ 출처: 옌타이 천왕의 블로그

◇ 천왕 한천옥 선생의 블로그 글 ‘운림산방의 배롱나무 꽃’을 읽고

예향(藝鄕) 진도(珍島)가 고향인 천왕 한천옥 선생이 포스팅한 블로그 글 운림산방의 배롱나무 꽃이 단톡에 올라왔다. 한 선생이 여러 차례 포스팅하여 익히 알고는 있었지만, 한번도 가보지 못한 진도의 명승 운림산방이 궁금하여 인터넷을 검색하여 자세히 알아보았다.
운림산방(雲林山房)에 관한 글을 관심있게 읽어보니, 과연 운림산방은 천왕님이 자랑할 만한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언젠가 한번 탐방할 기회가 있으리라는 생각에 운림산방에 관한 정보를 실어본다.

운림산방(雲林山房)은 전라남도 진도군 의신면 운림산방로 315에 위치해 있으며, 문화재 지정 명승(제80호)이다. 운림산방이란 이름은 첨찰산을 지붕으로 하여 사방으로 수많은 봉우리가 어우러져 있는 깊은 산골에 아침 저녁으로 피어오르는 안개가 구름 숲을 이루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운림산방은 서화 예술이 발달한 진도에서도 대표적인 서화 예술가로 꼽히는, 조선후기 남종화(南宗畵)의 대가로 불리는 소치(小痴) 허련(許鍊)이 말년에 서울 생활을 그만두고 고향인 이 곳에 돌아와 거처하며 그림을 그리던 화실의 당호(堂號)이다.

소치 허련(許鍊) 선생은 1809년 진도읍 쌍정리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그림에 재주를 보였고, 28세부터 해남 대둔사 일지암에서 기거하던 초의선사(草衣先師)에게서 가르침을 받고, 30대 초반 그의 소개로 서울로 가서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에게서 본격적인 서화수업을 받아 남종화(南宗畵)의 대가로 성장했다고 한다.

그는 왕실의 그림을 그리고 여러 관직을 맡기도 했으나, 김정희가 죽자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인 진도에 내려와 운림산방을 마련하고 그림에 몰두했다. 이곳은 또한 허련의 3남 미산 허형(許瀅)과 손자인 남농 허건(許楗)이 남종화의 대를 이은 곳이기도 하고, 한 집안 사람인 의재 허백련(許百鍊)이 그림을 익힌 곳으로 한국 남종화의 성지로 불린다.

오랫동안 방치되었는데 1982년 손자 남농 허건(許楗)에 의해 지금과 같이 복원되었으며, 화실 안에는 허씨 집안 3대의 그림이 복제된 상태로 전시되어 있고, 새로 지어진 소치기념관에는 운림산방 3대의 작품과 수석, 도자기 등이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

해발 485m의 첨찰산(尖察山) 봉우리를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운림산방은 사랑채, 화실과 연못이 있고 연못 가운데 직경 6m 크기의 원형으로 된 섬이 있으며, 입구의 암벽과 가까운 거리에 쌍계사(雙溪寺)가 있고, 첨찰산 서쪽 기슭에 천연기념물 제107호로 지정된 상록수림이 있다.

쌍계사(雙溪寺)는 첨찰산이 품은 사찰로 통일신라의 승려 도선국사가 창건했으며, 양옆으로 시냇물이 흐르는 계곡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첨찰산은 동백나무와 후박나무, 참가시나무, 감탕나무, 구실잣밤나무, 참식나무 등 상록수가 숲을 이루며, 1962년 천연기념물(제107호)로 지정되었으며 2007년에는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공존산’(共存賞)을 수상했다고 한다.

20년 전, 땅끝마을 해남 보길도와 완도로 생태탐사를 다녀온 적이 있다. 진도는 아직 한번도 못 가보았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진도를 탐방할 기회가 있으면, 운림산방과 쌍계사를 둘러보고 상록수림 우거진 첨찰산의 난대 숲길을 걸어보고 싶다. 운림산방에서 소치 허련을 만나는 것보다 첨찰산 난대 숲길을 걸으며 참식나무와 구실잣밤나무를 더 만나고 싶어하는 내 속내가 드러날까 봐 조심스럽다.   

/ 2021.08.11(수) 푸레 택

ttps://youtu.be/9PA93uzZdlY


Daum백과에 실려있는 우리 명승기행 남종화의 산실, 운림산방을 그대로 옮겨 싣는다.

◇ 남종화의 산실 운림산방

진도에 가면 세 가지를 자랑하지 말라고 한다. 바로 글씨와 그림, 노래가 그것이다. 이중 글씨와 그림은 모두 운림산방(雲林山房)에서 비롯되었는데 이른바 남종화의 산실로 일컬어지는 운림산방이 진도에 있기 때문이다. 운림산방은 진도군 의신면 사천리에 자리하고 있다. 이곳에는 섬에 있는 산치고는 비교적 높은 485m의 첨찰산(尖察山)이 있는데 이 아래 안온한 위치에 운림산방이 있다. 운림산방은 그 이름처럼 자연경개가 아름다우며 운무가 깃드는 유현하고 그윽한 곳이다.

운림산방은 조선시대 후기 남종화(南宗畵)의 대가였던 소치(小痴) 허련(許鍊, 1808~1893)이 기거한 곳이다. 허련은 진도읍 쌍정리에서 허임의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그림에 재주가 많았던 그는 20대 후반에 해남의 두륜산방에서 초의선사의 지도 아래 공재 윤두서의 화첩을 보고 그림을 공부했다.

1840년 33세 때 초의선사(初衣先師)의 소개로 평생 가장 소중히 모신 스승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를 만나게 되어 본격적인 서화수업을 받았다. 비록 남도의 섬에서 출생하기는 했지만 천부적으로 타고난 재질과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 시(詩), 서(書), 화(畵)에 모두 능한 삼절을 이루게 되었다.


소치는 허유(許維)라는 이름을 쓰기도 했다. 중국 당나라 남종화의 효시로 알려진 왕유(王維)의 이름을 따서 허유라고 명명한 것이다. 당대의 명사였던 석파 이하응(흥선대원군), 민영익, 신관호, 권돈인, 정학연 등 권문세가의 고위 관리들과 교유한 그는 장안에 명성이 높았다. 소치를 일컬어 민영익은 묵신(墨神)이라 하고, 정문조는 여기에 더해 삼절(三絶)이라고 평했다.

1856년(철종 7) 허련은 그의 스승 추사 김정희가 죽은 후 49세가 되던 다음 해에 고향인 진도로 내려와 초가를 짓고 거처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곳의 이름을 처음에는 운림각(雲林閣)이라 하고 마당에 연못을 파서 주변에 여러 가지 꽃과 나무를 심어 정원을 만들었다. 소치는 이곳에서 만년을 보내면서 그림을 그렸다. 남종화의 터전으로서 운림각이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이다.

허련은 이곳에서 1893년 85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불후의 명작들을 많이 남겼다. 그러나 허련이 사망한 후 그의 아들 허형이 진도를 떠나면서 운림산방은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 예전의 모습을 거의 잃게 된다. 그 후 오랫동안 관리하지 않아 피폐된 이곳을 허형의 아들 허윤대가 다시 사들였고 또 다른 아들 허건이 1982년부터 2년에 걸쳐 옛 모습으로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운림산방은 경사지를 다듬어 세웠는데 맨 위쪽에는 허련의 화상을 모신 운림사(雲林祠)가 있고 오른쪽 후면에는 사천사(斜川祠)가 자리하고 있다. 사천사는 소치의 문중 제각으로 매년 한식날 소치 선생의 6대조 가문이 춘향대제를 봉행하는 건물이다. 그 아래에는 돌담으로 둘러진 터에 살림집인 안채가 지어져 있으며, 안채의 앞으로는 허련이 머물던 사랑채가 자리하고 있다.

운림산방의 앞마당에는 커다란 연못이 조성되어 있다. 이 연못은 방지원도의 형태로 외곽은 네모나고 그 안에 동그라미가 있기 때문에 외방내원(外方內圓)의 형상이라고도 한다. 연못의 한가운데 위치한 섬에는 허련이 심었다는 배롱나무가 자라고 있다.

운림산방은 남종화의 산실이었다. 남종화는 북종화와 구분되는 화법이다. 당나라의 문인화가이자 시인이었던 왕유를 비조로 하여 송나라를 거쳐 원나라의 사대가(四大家, 뛰어난 산수화가였던 오진, 황공망, 예찬, 왕몽을 이름), 명나라의 심주(沈周), 문징명(文徵明) 같은 오파(吳派)의 문인화가들에 의해 전해 내려온 화법이다. 남종화는 북종화보다 존숭되었는데 중국 명청시대에는 남종화가 전성기를 이루었다. 두 분파의 큰 차이점은 주로 대상을 어떻게 표현하는가에 있다. 북종화는 외형을 위주로 한 사실적인 묘사를 주로하고 남종화는 작가의 내적 심경, 즉 사의표출(寫意表出)에 중점을 둔다.

소치 허련은 이러한 남종화에 심취했다. ‘소치’라는 아호는 스승인 김정희가 내려주었는데 원나라 때 사대가의 한 사람이었던 대치 황공망을 본떠 지은 것이다. 추사는 소치의 화재를 두고 “압록강 동쪽에서는 소치를 따를 자가 없다”고 극찬했다고 한다. 옛날 선비들은 학문을 이르는 문사철(文史哲)과 문예를 통칭한 시서화를 소양으로 모두 갖추어야만 지식인으로 인정받았다. 소치는 시서화로 당대를 휘어잡은 대가였는데 특히 묵죽을 잘 그렸다. 김정희의 글씨를 따라 흔히 추사체를 썼다고 한다. 하경산수도(夏景山水圖), 추강만교도(秋江晩橋圖), 노송도병풍(老松圖屛風) 등 다수의 작품이 전해진다.

진도의 운림산방을 근거로 허련에 의해 풍미되기 시작한 남종화는 그의 가계에 의해 이어진다. 미산(米山) 허형(許瀅, 1862~1938)은 소치가 늦은 나이에 얻은 아들로 그의 화풍을 이어받아 산수, 노송, 모란, 사군자 등을 잘 그렸는데 아버지의 화격에는 이르지 못했다고 평가받는다. 미산은 남농(南農) 허건(許楗, 1907~1987)을 낳았다. 남농은 조선미술전람회에서 특선을 한 후 20세기 근대 화단에 한국화의 중심에 자리한 화가가 되었으며, 운림산방을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했다. 남종화는 소치, 미산, 남농 3대에 걸쳐 이어져 왔고 이러한 가풍에 영향을 받아 지금도 화가로 활동하는 후손들이 많다.

첨찰산 주위의 여러 봉우리가 어우러진 깊은 산골에 아침 안개가 구름처럼 피어오르는 모습은 소치가 그린 한 폭의 산수화를 떠올리게 한다. 운림산방이란 옥호가 바로 그러한 산수화를 연상케 하는 이름이다.

[출처] Daum백과 우리 명승기행

/ 2021.08.11 편집 택


https://youtu.be/xThaz-GibRg

https://blog.naver.com/hanco52/222462452322

 

운림산방의 배롱나무 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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