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스리움, 칸나, 극락조화 ??
■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 김재진
믿었던 사람의 등을 보거나
사랑하는 이의 무관심에 다친 마음 펴지지 않을 때
섭섭함 버리고 이 말을 생각해보라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두 번이나 세 번, 아니 그 이상으로 몇 번쯤 더 그렇게
마음속으로 중얼거려보라
실제로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지금 사랑에 빠져 있거나 설령
심지 굳은 누군가 함께 있다 해도 다 허상일 뿐
완전한 반려란 없다
겨울을 뚫고 핀 개나리의 샛노랑이 우리 눈을 끌듯
한때의 초록이 들판을 물들이듯
그렇듯 순간일 뿐
청춘이 영원하지 않은 것처럼
그 무엇도 완전히 함께 있을 수 있는 것이란 없다
함께 한다는 건 이해한다는 말
그러나 누가 나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가
얼마쯤 쓸쓸하거나 아니면 서러운 마음이
짠 소금물처럼 내밀한 가슴 속살을 저며놓는다 해도
수긍해야 할 일
어차피 수긍할 수 밖에 없는 일
상투적으로 말해 삶이란 그런 것
인생이란 그런 것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그러나 혼자가 주는 텅 빔
텅 빈 것의 그 가득한 여운
그것을 사랑하라
숭숭 구멍 뚫린 천장을 통해 바라뵈는 밤하늘 같은
투명한 슬픔 같은
혼자만의 시간에 길들라
별들은
멀고 먼 거리 시간이라 할 수 없는 수많은 세월 넘어
저 홀로 반짝이고 있지 않은가
반짝이는 것은 그렇듯 혼자다
가을날 길을 묻는 나그네처럼, 텅 빈 수숫대처럼
온몸에 바람소릴 챙겨넣고
떠나라
ㅡ 김재진 詩集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中에서
■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 도종환
저녁 숲에 내리는 황금빛 노을이기보다는
구름 사이에 뜬 별이었음 좋겠어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버드나무 실가지 가볍게 딛으며 오르는 만월이기보다는
동짓달 스무 날 빈 논길을 쓰다듬는 달빛이었음 싶어
꽃분에 가꾼 국화의 우아함보다는
해가 뜨고 지는 일에 고개를 끄덕일 줄 아는 구절초이었음 해
내 사랑하는 당신이 꽃이라면
꽃 피우는 일이 곧 살아가는 일인
콩꽃 팥꽃이었음 좋겠어
이 세상의 어느 한 계절 화사히 피었다
시들면 자취 없는 사랑 말고
저무는 들녘일수록 더욱 은은히 아름다운
억새풀 처럼 늙어갈 순 없을까
바람 많은 가을 강가에 서로 어깨를 기댄 채
우리 서로 물이 되어 흐른다면
바위를 깎거나 갯벌을 허무는 밀물 썰물보다는
물오리떼 쉬어가는 저녁 강물이었음 좋겠어
이렇게 손을 잡고 한 세상 흐르는 동안
갈대가 하늘로 크고 먼바다에 이르는 강물이었음 좋겠어
■ 산문(山門)에 기대어 / 송수권
누이야
가을 산 그리메*에 빠진 눈썹 두어 낱*을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정정(淨淨)한* 눈물 돌로 눌러 죽이고
그 눈물 끝을 따라가면
즈믄* 밤의 강이 일어서던 것을
그 강물 깊이깊이 가라앉은 고뇌의 말씀들
돌로 살아서 반짝여 오는 것을
더러는 물속에서 튀는 물고기같이
살아오던 것을
그리고 산다화(山茶花)* 한 가지 꺾어 스스럼없이
건네이던 것을
누이야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가을 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그 눈썹 두어 낱을 기러기가
강물에 부리고* 가는 것을
내 한 잔은 마시고 한 잔은 비워 두고
더러는 잎새에 살아서 튀는 물방울같이
그렇게 만나는 것을
누이야 아는가
가을 날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그 눈썹 두어 낱이
지금 이 못물 속에 비쳐 옴을
ㅡ 《문학사상》 (1975) 수록
◎시어 풀이
*산문(山門):① 산의 어귀, 입구 ② 절의 바깥 문
*그리메:‘그림자’의 옛말
*낱 ː 셀 수 있게 된 물건의 하나하나
*정정(淨淨)한:아주 맑고 깨끗한
*즈믄:천(千)의 옛말. 많은
*산다화(山茶花):동백나무의 꽃
*부리고 : 짐 따위를 내리고
▲ 이해와 감상
1975년도 《문학사상》 신인상 당선작인 「산문에 기대어」는 죽은 누이에 대한 그리움과 한(恨)의 정서, 그리고 재회(再會)에의 소망을 불교적 윤회 사상과 인연설을 바탕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이 시의 제목 「산문(山門)에 기대어」에서 ‘산문(山門)’은 절의 문을 의미하지만, 단순히 절 문이 아니라 삶(이승)과 죽음(저승)을 넘나드는 경계의 문으로 윤회와 부활을 상징한다. 따라서 이 시가 불교적인 세계관을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는 현재에서 과거를 되돌아보는 회상의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대화체 형식으로 쓰여 있으나 내용상 독백에 해당한다. 그리고 예스러운 시어를 사용하여 전통적 분위기를 드러내고 있으며, 선명한 시각적 이미지를 통해 화자의 정서를 함축적으로 표출하고 있다.
이 작품의 수사적 구조를 보면, 1~ 2연은 ‘누이야~지금도 살아서 보는가’라는 질문에 목적어가 결합된 의문문의 구조를 지니면서, 목적어를 뒤에 두어 도치법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수사적 구조는 독자의 주의를 환기하는 역할을 한다. 3연에서는 ‘누이야 아는가’로 변용되었지만 같은 수사적 구조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이 시의 각 연에 나열된 목적어를 파악하는 것은 이 시를 이해하는 첫걸음이 된다.
화자는 첫 마디로 ‘누이야’라는 호칭을 사용한다. 지금 ‘누이’는 없지만, 마치 누이가 눈앞에 있는 것처럼 부름으로써 죽은 누이에 대한 화자의 간절한 그리움의 정서를 나타낸다. 또한, 누이와의 추억을 누이에게 직접 말하는 형식으로 표현하여 읽는 이에게 애상적이고 회한 어린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효과를 나타내고 있다.
그런데 화자가 누이와의 회상에서 먼저 떠올린 것은 ‘가을 산 그리메에 빠진 눈썹 두어 낱’이다. 이것은 가을 산 그림자가 ‘눈썹’ 모양인 것에서 누이의 눈썹을 떠올리며 죽은 누이를 회상하며, 그것이 현재까지 이어져 옴을 느끼는 것이다. 그리고 맑고 깨끗한 ‘정정한 눈물 돌로 죽이고’ 즉, 누이를 잃은 슬픔을 무거운 ‘돌’로 눌러 극복하려 하고, 그 눈물 끝을 따라가면 ‘강물 깊이깊이 가라앉은 고뇌의 말씀들/ 돌로 살아서 반짝여’ 오고, 더러는 ‘물속에서 뛰는 물고기’같이 살아오고, 그리고 ‘산다화 한 가지 꺾어 스스럼없이/ 건네이던 것’을 아느냐고 한다. 여기서 ‘강물’은 눈물의 흐름이자 기러기가 눈썹을 떨어뜨려 흐르게 한 대상, 즉 죽음과 재생 사이를 연결해 주는 희망의 의미를 담고 있다. 그리고 ‘고뇌의 말씀들’은 누이에 대한 생생한 기억과 그리움을 상징하는 것인데, 이것이 ‘돌’의 모습으로 살아난다는 것이다. 여기서 ‘돌’은 앞으로 다가오게 될 내세에 대한 신념을 나타내는 것으로, 윤회와 인연에 대한 믿음이 담겨 있다. 마찬가지로, 죽은 누이의 혼은 물속에서 튀는 물고기같이 부활함으로써 생명을 얻고 있다. 그러므로 화자는 스스럼없이 누이에게 ‘산다화’를 건넬 수 있는 것이다.
이어 2연에서, 화자는 강물에 비친 기러기 떼의 모습에서 누이를 떠올리고 죽은 누이와의 재회를 기대하고 있다. ‘내 한 잔은 마시고, 한 잔은 비워 두고’에서 보듯이, ‘비워 둔 한 잔’은 재회할 누이를 위해 비워 둔 것으로, ‘잎새에 살아서 튀는 물방울같이’ 죽은 누이와 재회할 것을 기대하고 있다.
그래서 마지막 3연에서 화자는 누이의 눈썹이 새로운 생성의 공간인 ‘못물’에 비쳐 오는 것으로 형상화함으로써 앞으로 누이와의 만남이 꼭 이루어지리라는 확신을 하게 된다. 여기서 물의 이미지인 ‘못물’은 ‘눈물’이 ‘강물’로. ‘강물’이 ‘못물’로 전환되며 제시된 것으로서, 누이의 소생에 대한 믿음이 이미지화된 것이며, 새로운 생성의 상징인 것이다. 따라서, 이 시는 곧 누이의 부활 내지 환생에 바치는 시인의 노래라고 할 수 있다.
▲송수권(宋秀權, 1940~)
시인, 전남 고흥 출생. 1975년 《문학사상》에 「산문에 기대어」 외 4편이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남도의 서정과 질긴 남성적 가락으로 한민족의 한과 부정적 허무주의를 극복하고 역동적인 경지를 보여준다. 시집으로 《산문에 기대어》(1980), 《꿈꾸는 섬》(1983), 《아도(啞陶)》(1985), 《새야 새야 파랑새야》(1987), 《벌거숭이》(1987), 《우리들의 땅》(1988), 《자다가도 그대 생각하면 웃는다》(1991) 등이 있으며, 장편서사시 「동학란」 (1975)이 있다.
ㅡ 해설 및 정리 : 남상학(시인)
[사진] 서울식물원 온실 열대관에서 촬영 (2021.06.19)
https://blog.daum.net/mulpure/15856355
https://blog.daum.net/mulpure/15856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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