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띠염 모도(茅島)의 해변누리길, 인천 삼형제섬길 신시모도 트레킹 마무리 (6)
친구와 함께 걸은 신시모도 해안누리길
△ 일시: 2021.06.12(토)
△ 장소: 옹진군 신도·시도·모도 삼형제섬
운서역(공항철도) 1번 출구→삼목항(三木港) 선착장→세종해운 매표소(2,000원)→페리호 승선→신도(信島) 선착장→신도바다역→신도 농어촌길→구봉산→시도 연도교(連島橋)→시도(矢島)→북도면(北島面) 면사무소→해안누리길(해안삼형제 섬길)→해당화꽃길→시도염전→어촌계갯벌→수기해변(수기해수욕장, 전망대)→노루메기→모도 연도교→해당화나들목 식당→암행어사 이건창 불망비→모도(茅島) 쉼터 버스 종점→버스 승차→신도 선착장→페리호 승선→삼목항 선착장 도착→택시로 이동(7,000 원)→운서역→공항철도 탑승→마곡나루역 도착
◆ 인천 신시모도 삼형제섬 해안누리길 트레킹을 마무리하며
시도모도연도교를 지나 삼형제섬 중 가장 작은 막내 섬인 모도로 넘어왔다. 모도는 신도와 시도와는 또다른 느낌이 드는 아늑하고 한적한 섬이다. 해당화나들목 식당에서 소라비빔밥을 맛있게 먹고 버스종점 소공원 쉼터에서 잠시 쉬었다. 쉼터엔 모도암행어사불망비(茅島暗行御史不忘碑)가 세워져 있다. 이 비석은 1880년 경 모도 주민들의 어려움을 해결해 준 이건창 암행어사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이건창은 폐의파립(敝衣破笠)으로 신분을 가장하고 고향 강화도를 비롯하여 외딴 섬들을 두루 암행하며 민정을 살폈다. 이건창은 탐관오리들의 학정에 시달리는 모도 주민들의 어려움을 조정에 건의하여 부역과 세금을 면제해 주었고, 그후 주민들은 생의 의욕을 되찾아 더욱 부지런히 생업에 종사하여 살림이 곧 좋아졌다고 한다. 이에 을유년(1885년) 6월에 주민들이 이건창 암행어사의 은혜에 보답하고 그 뜻을 잊지 않겠다는 간절한 마음을 모아 이건창 암행어사 불망비를 세우게 되었다.
다음백과 ‘나무위키’를 찾아보니 이건창은 조선 최연소 과거 급제자라는 기록을 갖고 있다. 1866년 강화도 별시에서 15세의 나이로 합격했는데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바로 출사(出仕, 선비가 벼슬아치가 되어 처음으로 세상에 나아감)하지 못하고 3년간 발령 대기 상태로 있다가 18살에 비로소 승정원 주서(7품)로 출사하여 충청우도와 경기도 암행어사, 황해도 관찰사를 지냈다. 고종은 이건창을 매우 신뢰했으며 지방관을 새로 발령해 내려보내며 “가서 잘못하면 이건창이 갈 것이다”라고 말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민중들 사이에서는 이건창 하면 곧 암행어사였던 것이다. 그의 공덕비도 여러 군데 남아있다고 한다.
송파근린공원에도 ‘이건창 영세불망비’가 세워져 있다고 한다. 그 내용은 이러하다. 이건창이 암행어사로 활동하던 시절, 이곳 송파마을에 둘러 신분을 속인 채 장터의 장사꾼들을 만나 그들의 고충을 들어주면서 용기를 복돋아 주었다. 백성들은 그가 누구인줄 몰랐으나 그가 떠나고 난 뒤에야 그의 신분을 알게 되었다. 이에 감동한 백성들이 그의 공덕과 행적을 기리며 1883년 5월 그가 머물렀던 장터입구에 비석을 세워 그를 기렸다. 그후 을축년(1925년) 홍수에 유실되었다가 1979년 어느 향토사학자에 의해 발견되어 현재의 위치에 그 모습을 되찾아 세워지게 되었다.
모도 배미꾸미조각공원까지 900m라는 안내판이 보인다. 그곳까지 다녀오면 신도선착장 배 시간을 맞추기 어려울 것 같아 이곳에서 친구와 함께 걸은 신시모도 삼형제섬 해안누리길 트레킹을 마무리하였다. 청량한 숲길, 아름다운 꽃길, 호젓한 해안길을 걸으며 섬마을의 소박한 농어촌 풍경과 초여름 바다의 정취를 마음껏 느낀 뜻깊은 하루였다. 오랜 시간 트레킹으로 비록 몸은 피곤하지만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넉넉하고 풍요롭다. 신도선착장을 출발하여 삼목항으로 향하는 페리호 여객선 뱃머리에는 여전히 괭이갈매기가 멋진 날갯짓을 하고 있다.
/ 2021.06.12(토) 글: 김영택
■ [다음백과 나무위키] 영재 이건창(寧齋 李建昌, 1852년~1898년)
조선의 양명학자. 전주 이씨 덕천군파. 조선 말기의 학자, 관료, 문장가. 강화학파의 거두.
아명은 송열(松悅), 자는 봉조(鳳朝·鳳藻), 호는 영재(寧齋)이고, 당호(堂號)는 명미당(明美堂). 정종의 아들 덕천군 이후생(德泉君 李厚生)의 후손이며, 본관은 당연히 전주 이씨. 할아버지인 사기 이시원(沙磯 李是遠)이 개성 유수를 지낼 때 유수부 관아에서 태어나 출생지는 개성이지만, 이 집안이 대대로 강화학파의 거두인 만큼 강화도에서 성장해 강화도에서 죽었다.
조선 최연소 과거 급제자의 기록을 갖고 있는데, 1866년 강화도 별시에서 15세의 나이로 합격해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바로 출사하지 못하고 3년간 발령 대기 상태였다. 18살에 비로소 승정원 주서(7품)로 출사하여 충청우도/경기도 암행어사, 황해도 관찰사를 지냈으며, 1884년부터 연달아 부모상을 당해 6년 간 상을 치르고 이후 한성부소윤으로 복직, 함경도 안핵사를 지냈으나 1894년 갑오경장에 반발해 고향인 강화도 사기리로 낙향했고, 4년 후인 1898년 47세로 사망했다.
저서로는 《명미당집 (明美堂集)》과 《당의통략(黨議通略)》등이 있다. 당의통략은 조선 시대 당쟁의 발생 원인과 전개를 비교적 객관적으로 서술했다는 평을 받으며, 조선 후기 정치사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텍스트로 꼽히고 있다.
이건창의 9대조는 백헌 이경석의 형인 이경직이다. 당파를 따지자면 소론으로, 숙종 대에 이경직의 4대조 이광명이 아버지 이진위의 상을 당해 강화도 사기리에 장사지낸 뒤부터 사기리에 정착해 살기 시작했다. 문제는 당시 집권 세력이 소론과 대립하던 노론이었다는 것. 정치적 풍파에 심하게 시달리는 집안이었으니 어찌 보면 강화도에 정착해 낙향한 이광명의 선택은 집안을 보존하기 위한 것이었을지도. 이광명은 조선 후기 양명학을 공부한 강화학파의 시조 하곡 정제두의 손녀사위이기도 했는데, 이로부터 양명학을 배우게 되고, 강화도에 입도한 이후 이후 6대 250년을 강화학파 학맥을 잇게 된다.
이건창은 다섯 살 때부터 문장을 지었다고 전해질 정도의 천재였다. 이 꼬마 천재의 스승 노릇을 해준 이는 강화학파의 정통을 이었다고 평가받았던 할아버지 이시원. 병인양요 당시 이시원은 이미 76세의 고령이었다. 강화 유수 이인기는 도망쳤고, 유수부 내의 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던 어진을 비롯한 서책과 유물들이 약탈당했다. 이시원은 “나라가 도탄에 빠졌을 때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하지 않겠는가. 내 비록 지방의 향리고 오갈 곳 없는 늙은이지만 나라의 녹을 먹었던 사람으로서 후세 사람들이 부끄럽지 않게 해야 하지는 않겠는가.”라며 유소와 손자 이건창 앞으로 남기는 절명시를 남기고 두 살 아래 동생 이지원과 함께 비상을 마시고 자결했다. 당대의 유신으로 이름났던 학자가 ‘역사 앞에서 부끄럽지 않기 위해’ 스스로 선택한 죽음이었다.
그의 죽음이 알려지자 강화도에서 그의 순국을 기리는 별시 문과가 행해졌다. 시험을 치르기 전부터 분위기가 거의 흉흉한 수준이었는데, 시중에는 이 시험에서 이건창이 급제하지 않으면 시험 자체가 무효라는 말이 나돌았다. 오죽하면 시험관에게 그의 친척 동생이 찾아와 대놓고 “이건창이 급제하지 못하면 이 시험은 무효이니 무조건 합격시켜야 한다라고 내질렀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을 정도. 대원군도 이건창이 응시하면 무조건 합격시켜라라는 밀명까지 내렸다고 한다. 한마디로 이건창을 합격시키기 위한 과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
어떻게 보자면 이건창의 입장에서는 자기 앞으로 절명시를 남기신 할아버지를 기리는 시험이니 무조건 응시해야 했고, 또 낙방한다는 것 자체가 있어선 안 될 일이었을 것이다. 국가 입장에서도 이시원을 기리는 별시이니 이시원의 손자를 무조건 합격시켜야만 했다. 결국 단 6명만을 합격시킨 이 시험에서 이건창은 5등으로 합격한다. 1852년생인 그의 나이 만 14세 때의 일. 조선 왕조 최연소 과거 합격 기록이었다.
15살 난 소년에게 관직을 내린 전례가 없는 탓으로 과거에 합격했음에도 그의 출사는 미뤄졌다. 과거 합격 3년 후인 18세 때 승정원 주서로 첫 관직 생활을 시작한다. 23세 때는 동지사 서장관으로 북경에 다녀왔고, 26세 때는 충청우도 암행어사로 발령받는데, 이 때를 시작으로 유난히 지방관 감찰의 임무를 많이 맡는다. 충청우도 암행어사 당시 그가 중앙에 올린 보고서들이 따로 간행되었는데, 여기 보고된 사건들은 지방 아전과 결탁해 토지 대장을 조작하고 토지세를 포탈한 사건, 지방 군영, 군진의 통합으로 인한 폐단에 대한 해결, 세미/군전의 과다 징수 문제, 벌목 금지 지역인 안면도 소나무 숲 훼손 문제 등이다.
충청 감사 조병식의 비리를 적발해 아예 그를 파면하기도 했다. 이 암행 과정에서 무고한 선비를 장살했다는 이유로 1년 간 유배를 당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9세 때도 경기도 암행어사로 발령났고, 42세 때도 함경도 안핵사로 파견되어 함경도 관찰사를 파면시켰다. 고종은 이후 지방관을 새로 발령해 내려보내며 “가서 잘못하면 이건창이 갈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민중들 사이에서는 이건창=암행어사였던 것이다. 공덕비도 여러 군데 남아있다고 한다.
서울시 정무부시장 정도로 이해할 수 있는 한성부 소윤을 지낼 때는 조청 수호 통상 조약에 따라 서울로 진출한 청나라 상인들이 서울 시가지의 부동산을 대거 사들이는 것을 보고 이것을 통제하지 않으면 나중에 ‘자국민 보호’라는 명분으로 서울에 대한 청의 간섭이 심해질 것이라 보고 이에 대한 규제안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청의 압력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대신 청나라 상인들에게 부동산을 팔아넘긴 사람이 적발되면 다른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처벌했다고 한다.
이건창과 더불어 구한 말의 두 천재로 불렸던 김택영은 이건창을 고려와 조선을 통틀어 마지막 문장가로 꼽았다. 그가 문학에 뜻을 두거나 전념한 것은 아니지만 사실주의에 입각해 자신이 지방관 혹은 지방 감찰로 돌아다니며 보고 들은 일들을 제법 시로 남겼다.
不知喫打苦。但道喫錢甘。汝輩亦人耳。肌膚何以堪。
一鞭一箠間。常恐傷而死。縱我失之寬。我心本如此。
피맺히는 고통을 모르고 돈 먹는 달콤함만 말하다니
너희들도 사람이거늘 살가죽이 어찌 견디랴.
채찍 하나 회초리 하나에도 혹 상해 죽지나 않을까 걱정이다.
차라리 관대하다는 잘못이 있을망정 내 마음은 본디 이와 같다.
ㅡ 〈녹수작 (錄囚作)〉
이건창은 국권침탈 이전에 죽었지만, 그의 절친인 김택영과, 이건창의 친동생 이건승 등은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했다. 김택영은 장쑤성 난통에 정착하여 상해임시정부 수립 때에도 중국정부의 지원을 얻어내려 애썼지만, 후원자가 죽고 앞이 보이지 않자 1927년 자진했고, 강화도에서 계명의숙을 세워 교육계몽운동을 하던 이건승은 동지들과 함께 만주에 학교를 세워 후학을 양성하다가 1924년 타계했다. 이건창의 자손들도 그들을 따른 인물들이 있었다. 이건창의 강화학파는 이회영, 이상룡등과도 연관이 있어 독립운동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으니, 그의 천재성이 헛되이 쓰여지지는 않은 듯하다.
[출처] 나무위키 (2021.05.30)
■ 신·시·모도 육지와 맞닿는다..4km 연륙교 착공, 남북경협 중심축 기대 / YTN 이기정
[앵커]
인천 옹진군 북도면에 나란히 이어진 3개 섬, 신도와 시도, 모도는 육지와 연결된 다리 건설이 오랜 숙원이었습니다. 이곳에서 영종-신도 평화도로 착공식이 열렸는데 이 다리는 향후 남북경협의 기반이 될 전망입니다.이기정 기자의 보도입니다.
[기자]
서해의 작은 섬 신도에서 지축을 뒤흔드는 발파음이 울려 퍼지고 오색의 축하 연기가 하늘을 뒤덮었습니다. 인천 영종도와 옹진군 북도면의 신도를 잇는 영종-신도 평화도로가 첫 삽을 뜨는 순간입니다. 바다를 가로질러 길이 4km의 2차로 교량과 접속도로를 건설하는 이 사업은 1,245억 원이 투자돼 2025년에 마무리됩니다.
[박남춘 / 인천시장 : 오늘의 이 평화도로 착공식은 한반도가 새로운 도약과 전환의 첫발을 디딘 날로 역사에 기억될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영종도와 강화도 사이에 나란히 늘어선 신도와 시도·모도 3개 섬은 작은 연도교로 이어져 있지만 육지로 가려면 영종도까지 운행하는 배편을 이용해만 해서 불편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연륙교 건설로 3개의 섬 주민 천여 명은 지역경제도 활성화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선영 / 인천시 옹진군 신도 주민 : 다리가 놓이면 모든 게 생활권이 좋아지니까 여기 계신 분들도 그렇고 여기 들어 오시는 분 누구나 다 편해지니까 아무래도 많이 좋아지겠죠.]
이번 연륙교 착공은 접경지역 균형발전뿐 아니라 서해 남북평화도로 구축의 시발점이 되는 구간이어서 관심이 모아지고 있습니다. 정부는 영종도에서 옹진군과 강화군을 잇는 총연장 14.6km의 도로를 향후 개성과 해주까지 연결해 남북경협과 물류중심축의 기반이 되도록 하겠다는 구상입니다. YTN 이기정입니다.
[출처] YTN 뉴스 2021.01.27
■ 모도(茅島)
인구 약 120명. ‘띠염’이라고도 부른다. 인천에서 북서쪽으로 14km 떨어져 있다. 면적 0.81km2. 모도는 신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명칭의 유래를 보면, 이 섬의 앞바다에서 고기잡이를 할 때 고기는 잡히지 않고 띠[茅]만 걸려 나왔다. 띠 모(茅)자와 섬 도(島)자를 써서 모도(茅島)라고 부르게 되었다. 지금도 이 지역 노인들은 이 섬을 ‘띠염’으로 부른다.
간뎃마을은 모도리 중앙에 있는 마을이며, 고래마을은 간뎃말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신도, 시도, 모도는 삼형제섬으로 불리며, 연도교(連島橋) 통해서 서로 이어졌다.
시도~모도 연도교는 처음에는 갯벌 표면에 도로를 건설한 잠수교 형태로 건설됐다. 밀물 때는 다리가 물에 잠기는 잠수교 특성상 하루 통행 가능 시간이 5~6시간에 불과해 주민 불편이 계속되자 옹진군은 2002년 연도교 높이를 5m에서 10m로 높이는 보강공사를 했다.
모도 연도교를 통해 들어가면 자연부락이 하나뿐이다. 연도교 옆의 마을이 그것이다. 마을 입구에 소공원이 있다. 마을 중심부에 해당하는 곳으로 운동시설과 함께 불망비(不忘碑)가 세워져 있다.사진 ‘암행어사 이건창 불망비’로 부러져 땜질한 옛 비석은 밀려나고, 새로 비석을 만들어 보호울타리를 둘렀다.
130여 년 전에 강화 출신인 암행어사 이건창은 추상같은 기개를 지닌 분으로 과중한 세금과 부역을 시키던 탐관오리를 벌하고 백성들을 구휼한 강직한 성격이었다. 모도 주민들은 세금과 부역에서 혜택을 받자 주민들이 불망비를 세웠다. 당시 고종은 지방으로 관리를 보낼 때 “그대가 가서 잘못하면 이건창이 가게 될 것이다”라고 경고했다고 한다. 불망비가 세워져 있는 이곳을 모도쉼터라고 한다.
세 섬 간에는 공영버스가 운행되고 있는데 신도선착장에서 매시 30분에 출발한다. 공영버스는 버스정류장이 아니라도 손을 들면 태워준다. 자세한 것은 옹진군 공영버스 참조. 시도, 신도와 함께 노랑부리백로와 괭이갈매기 등 희귀조류의 서식지로도 알려져 있다.
주요 관광지로는 배미꾸미 해변(배미꾸미 조각공원)과 당산, 높은산이 있다. 특산물로는 자연산 굴과 당도가 높은 포도가 있다. 초등학교(모도분교)가 있었으나 현재는 폐교되고 없다. 감리회 모도교회가 있다.
섬 서쪽(장봉도 방향)으로 행정구역상 모도리에 속하는 말끗, 벙어리섬 2개의 무인도가 있다. 모도와 장봉도를 연결하는 연도교가 생길지도 모른다. 이렇게 되면 신도, 시도, 모도, 장봉도 4개섬이 모두 연도교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여담으로, 전라남도 진도군에도 모도(茅島)라는 섬이 있으므로 헷갈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 영종도 삼목항 부근부터 신도를 거쳐 강화도까지 향하는 영종~신도~강화 연도교가 건립될 예정이다. 이 연도교 건립 사업은 예비타당성조사도 면제를 받은 사업이라 추진 속도가 빨라졌다. 이 중에서 영종~신도 간 3.5km 구간 왕복 2차로 교량이 2021년 1월 착공이다
[출처] 다음백과 ‘나무위키’
■ 다리로 이어진 신도·시도·모도.. 꽃길·숲길·바닷길 ‘3색 매력’
바다 풍경을 즐기면서 걷기에 좋은 길을 물색할 때 기억해 둘 이름이 있다. ‘해안누리길’이다. 해안누리길은 2010년 해양수산부 산하 한국해양재단이 선정한 걷기여행길 52개 노선을 가리킨다. 여기에 지난 9월 인천 옹진군 북도면의 세 개 섬 신도·시도·모도를 잇는 ‘인천 삼형제섬길’이 53번째 노선으로 합류됐다.
인천 삼형제섬길은 바다 여행과 걷기 여행을 한 번에 즐길 수 있는 해안누리길의 표본과 같다. 이 인천 삼형제섬길을 걸으며 섬·바다·길의 삼색 매력을 느끼고 왔다.
인천시 옹진군 북도면의 신도·시도·모도는 영종도 북쪽 바다에 떠있는 섬이다. 세 섬의 면적을 다 합해봤자 8㎢에 불과하다. 서울시청에서 자동차로 1시간을 달려 영종도 삼목선착장에 도착했고, 삼목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10분 만에 신도선착장에 닿았다.
신도·시도·모도가 서쪽으로 차례차례 늘어서 있어 ‘신시모도’ 또는 ‘형제섬’이라고 부른다. 한국해양재단은 주민의 입말을 따서 세 섬을 잇는 걷기여행길에 ‘인천 삼형제섬길’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11년 전 신도와 시도, 시도와 모도를 잇는 연도교가 들어섰다.
인천 삼형제섬길은 형제섬의 ‘맏이’ 격인 신도에서 시작한다. 신도선착장에 내려 해안누리길 안내판을 따라가면 구봉산(179m) 등산로~신·시도 연도교~시도 수기해변~시·모도 연도교~모도 배미꾸미조각공원으로 길이 이어진다. 9.5㎞에 이르는 길을 전부 돌아보는 데 5시간이면 충분하다. 길이 평탄해서 걷기에 별 어려움은 없다.
“주민 1200여 명에 불과한 형제섬에 해마다 30만 명이 넘는 관광객이 찾아옵니다. 특히 자전거 동호회 사이에서 명소로 꼽히죠. 하지만 두 발로 걸어야만 볼 수 있는 섬 풍경이 있습니다.”
취재에 동행한 박광근(50) 북도면장은 섬의 매력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여행법은 “걷기”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박 면장의 추천에 따라 신도와 시도를 연결하는 연도교를 여행의 시작점으로 삼았다. 다리를 건너 오른편에 바다를 끼고 걷다 보니 해당화꽃길에 접어들었다. 1.4㎞에 이르는 제방을 따라 해당화 나무 4,000여 그루가 자라는 길인데, 제방 폭이 1m 남짓이라 자전거의 출입을 막고 오로지 사람만 드나든다.
계절이 늦어 꽃이 만발한 장면은 볼 수 없었지만, 길을 가운데 두고 펼쳐지는 경치로 아쉬움을 달랬다. 길 왼쪽으로 50년 역사를 자랑하는 시도염전을, 오른쪽으로 서해 바다와 어우러진 신도를 감상했다.
길은 수기해변으로 이어진다. 형제섬의 유일한 해수욕장이다. 서걱서걱 모래를 밟는 소리를 즐기면서 한적한 해변을 따라 걸었다. 수기해변에서 이어진 언덕길을 20여 분 올라 수기해변 전망대에 다다랐다. 강화도를 비롯해 크고 작은 섬이 둥실둥실 떠 있는 서해바다가 한눈에 들어왔다.
전망대에서 시·모도 연도교까지는 숲길이 이어졌다. 낙엽이 수북이 쌓여 길이 푹신푹신했다. 다시 연도교를 뚜벅뚜벅 걸어가 형제섬의 막내섬 모도로 입도했다. 산을 타고, 제방에 오르고, 해변을 걷고, 다리를 건널 때도 풍경 한구석에 바다가 있었다. 인천 삼형제섬길은 바다와 섬을 동경하는 도시인의 마음을 어루만졌다.
글=양보라 기자
[출처] 중앙일보 2015.11.27
/ 2021.06.12 편집 택
https://blog.daum.net/mulpure/15856319
https://blog.daum.net/mulpure/15856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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