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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표상식] 우표의 역사, 세계 최초의 우표 (2021.03.10)

푸레택 2021. 3. 10. 09:41

■ 우표의 역사, 세계 최초의 우표

세계 최초의 우표가 등장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170여 년 전의 일입니다. 우표가 등장하기 아주 오래전부터 우편의 왕래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표가 없었던 시대에는 오늘날과 같이 편지를 부치는 사람이 아닌 편지를 받는 사람이 현금으로 우편 요금을 주었다고 합니다. 그 당시의 우편은 오늘날의 기차 요금처럼 배달되는 거리에 따라 요금이 달랐습니다. 또한, 편지의 무게와 장수에 따라 요금이 천차만별이었기 때문에 우체부가 편지를 전해 줄 때 개봉하여 그 자리에서 우편 요금을 계산하는 복잡한 방식이었습니다.

그런데 누가, 언제 편지를 보내올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요금을 낼 돈이 없을 때에는 부득이 우편물을 되돌려 주고 다시 와 달라고 사정을 하는 경우가 생기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에는 돈이 없어서 기다리던 편지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며, 일반 국민은 비싼 요금 때문에 우편을 이용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여 우편제도는 사실상 널리 이용되지 못하였습니다. 이렇게 불편한 우편 제도에 대한 개혁안을 연구하여 제의한 사람은 영국의 교육자이자 세금 개혁가인 로랜드 힐이었습니다.

그는 1836년 12월 「우체국의 개혁 그 중요성 Post office : Its Importance and Practicability」이란 논문에서 우편 요금의 지급 방법으로 우체국에서 판매하는 우표를 붙이는 새로운 방법을 고안하여 정부에 제출했습니다. 그 후, 3년이란 긴 논쟁 끝에 하원과 상원에서 통과되어 드디어 1839년 8월 17일 빅토리아 여왕의 재가를 얻은 뒤, 다음 해인 1840년에 역사적인 균일 우편요금 제도가 드디어 영국에서 시행되게 됩니다. 이 개혁안에 따라 요금 선급 방법으로 우표가 창안되었고, 1840년 5월 6일 오랜 노력 끝에 빅토리아 여왕의 옆 모습을 그린 1페니와 2펜스로 된 2종의 우표가 세계 최초로 발행되었습니다. 수집가들은 이 우표를 색깔에 따라 페니 블랙(Penny Black), 펜스 블루(Pence Blue)라는 애칭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편지에 우표를 붙이자는 안이 확정되고 영국의 재무국에서는 새 우표 디자인을 위하여 도안을 공모한 결과 2,600건의 작품이 접수되었으나, 그중 한 건도 채택되지 않았습니다. 이에 생각다 못한 로랜드 힐 경이 직접 우표 디자인에 착수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조각가 윌리엄 욘(William Wyon)이 만든 빅토리아 여왕의 초상이 든 아름다운 메달을 우표의 모델로 선정합니다. 이 메달을 모델로 하여 두 장의 우표 디자인을 물감으로 스케치하고, 찰스와 프레드릭 하이스 (Charles and Fredric Heath) 부자(父子)에게 조각을 부탁하여 완성된 조각으로 퍼킨스 베이콘사(社)(Perkins, Bacon and co.)에서 인쇄함으로써 세계 최초 우표가 탄생한 것입니다. 이 우표는 1840년 1월 1일 발행될 예정이었으나 디자인이 늦어져 1840년 5월 6일에야 역사적인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발행된 세계 최초 우표는 1페니(1 Penny)의 흑색 우표와 2펜스(2 Pence)의 청색 우표 두 종류로 전지는 240장으로 구성되었으며, 우표인면 하단의 양쪽 귀퉁이 안에 알파벳 문자를 각각 다르게 넣었습니다. 또 변지에는 판 번호와 각종 문자를 넣었기 때문에 문자와 기호에 따라 우표 한 장 한 장 마다 평가를 달리하고 있습니다.

세계 최초의 우편 봉투는 화가 윌리엄 멀레디(William Mulready)가 도안하였다 하여 수집가들은 멀레디 봉투(Mulready Envelope) 라고 부릅니다.

‘POSTAGE ONE PENNY’라는 요금이 표시된 이 봉투는 1840년 5월 6일 세계 최초의 우표가 탄생하기 전에 이미 제작되어 최초 우표와 같은 시기에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봉투에 의하여 실제로 운송된 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세계 최초 우표보다 전에 발행되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봉투가 처음 발행할 당시에는 우편 요금 균일 제도의 하나인 요금 선납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일정한 크기의 봉투에 POSTAGE ONE PENNY(우편요금 1페니) 라는 요금이 표시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내용물(우편물)이 봉투보다 크거나 부피가 클 때에는 취급할 수 없는 등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어 별도로 우표를 만들게 된 것입니다. 이 봉투에 넣을 수 있는 우편물의 중량은 1온스당 1페니 였으며, 무게가 초과하면 1온스당 1페니를 추가로 받았는데 이때 추가되는 요금만큼의 우표를 붙이게 하였습니다.

■ 한국 최초의 우표

우리나라 신식 우편 제도의 아버지로 불리는 홍영식(洪英植)을 중심으로 한 신진개혁파 정치 지도자들의 끈질긴 노력으로 1884년 11월 18일(음력 10월 1일) 우정총국이 역사적인 업무를 개시함으로써 우리나라 최초의 우표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문위우표는 이때 발행된 우표의 액면이 당시의 화폐 단위인 ‘문(文)’이었기 때문에 수집가들 사이에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우리 정부에서 5종의 우표 인쇄를 일본 대장성인쇄국에 의뢰하고, 우정총국의 개국과 동시에 우표를 발매할 예정이었으나, 우정총국 개국일까지 5문과 10문 2종만 도착해 한성(서울)과 인천 간에 운송된 우편물에 사용되었을 뿐, 나머지 25문과 50문, 100문의 3종은 같은 해 12월 4일 발발한 갑신정변의 실패로 우정총국이 폐쇄될 때까지 현품이 도착하지 않아 미발행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홍영식(洪英植)의 본관은 남양으로 철종 6년(1855년) 12월 29일 영의정 홍순목(洪淳穆)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호는 금석(琴石)으로 남달리 총명하여 18세의 나이로 칠석사(七夕試)에 급제한 영재였다고 합니다.
금석 홍영식은 개화의 선각자로서 한국 근대 우편과 통신의 창시자이자 신식 문물 도입의 주역이었습니다. 김옥균 등과 갑신정변(1884년 12월)을 일으켜 급진적인 개화를 시도하였으나 3일 만에 실패로 끝나고 외국으로 망명하라는 동지들의 충고를 듣지 않고 고종을 호종(護從)하던 중 창덕궁 담 너머 옥류천 상류에서 30세의 젊은 나이로 청병에 의해 피살당하고 말았습니다. 1895년 갑오경장 후 그의 공적을 인정받아 억울하게 뒤집어쓴 죄를 씻어 주는 신원(伸寃)을 받았으며 1910년에는 규장각 대제학의 추증(追贈)으로 충민공(忠愍公)이라는 시호를 받게 되었습니다.

1884년 11월 18일 우정 사업 개시와 함께 대한민국 최초로 발행된 문위우표는 갑신정변의 실패로 같은 해 12월 8일 왕명에 의하여 폐지됨으로써, 모처럼 이룩한 신식 우정 사업제도와 함께 불과 20여 일 만에 그 명을 다하게 됩니다.

우정 사업을 시작한 지 18일째인 1884년 12월 4일 우정국 개설 축하연을 계기로 개화파의 홍영식,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이상재 등이 일으킨 갑신정변의 실패는 개화당 일파의 몰락을 가져오고 말았습니다. 이에 연루된 사람은 대부분 자취를 감추었고, 증거를 없애기 위하여 그동안 오간 서신 등 물증이 될 만한 것은 철저히 없애거나 불태워 버렸기 때문에 당시에 사용한 우편물의 실체봉투나 우편 사료가 될 만한 물증이 없는 실정입니다.

[출처] 중앙우체국 홈페이지

/ 2021.03.10 편집 택